재계 12위 두산그룹의 총수가 바뀐다. 우리나라 30대 대규모기업집단 중 최초로 4세 경영 시대가 열린다. 박용만(61) 두산그룹 회장은 지난 3월 2일 열린 두산 이사회에서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조카인 박정원(54) 두산 지주부문 회장을 추천했다. 두산그룹은 두산 이사회 의장이 두산그룹의 회장 직무를 맡고 있다. 오는 3월 25일 주주총회에서 박정원 회장은 이사회 의장으로 정식 선임된다.

박용만 회장은 창업 3세다. 두산그룹은 1980년대부터 창업 3세 형제가 차례로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장남인 박용곤 회장을 필두로 차남인 고(故) 박용오 회장, 3남 박용성 회장, 4남 박용현 회장, 5남 박용만 회장이 나이 순서대로 총수를 역임했다. 이생그룹으로 분가한 6남 박용욱 회장을 제외하면 형제들이 순서대로 그룹 회장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번에 회장직을 이어받은 박정원 회장은 창업 2세인 고(故) 박두병 회장의 맏손자이자 박용곤 두산 명예회장의 장남으로서 적통성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최초로 오너 일가 4세가 두산그룹 총수직을 물려받은 것이다. 두산 오너 일가 중에서 지주사 역할을 하는 두산의 지분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이로써 두산그룹은 ‘세대순·장자(長子)순’이라는 승계 원칙을 지켜가게 됐다.

박정원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5년 두산산업[현 두산 글로넷BU] 사원으로 입사했다. 중간에 일본기린맥주와 동양맥주에서도 근무했다. ‘남의 밥을 먹어봐야 안다’는 두산의 경영철학 때문이다.

오비맥주 상무를 거쳐 두산 관리본부 전무 및 상사BG 대표이사를 역임한 그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두산산업개발 부회장을, 2007년부터 2009년까지는 두산건설 부회장을 지냈다. 2009년부터는 두산건설 회장과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맡고 있으며 2012년에 두산 지주부문 회장에 올라섰다.

박용만 회장은 2년여 전부터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회장직 승계를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꾸준히 그룹 회장 업무를 박정원 회장에게 위임했다. 지난해부터 경영계획 점검안 보고를 박정원 회장에게 돌렸다. 분기별 동향 보고인 쿼털리 리뷰(quarterly review)도 지난해 하반기부터 박정원 회장실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사람이 미래다’라는 광고 카피를 직접 썼을 정도로 인재 경영을 강조한 박용만 회장은 매년 신입사원 최종면접을 직접 담당했지만, 승계를 결심한 이후 박정원 회장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지난해에는 최종면접 대부분을 박정원 회장이 맡았다. 오래 준비한 덕분에 공식적인 회장직 인수인계 절차는 없다는 게 두산그룹 관계자의 언급이다. 일각에서는 두산 오너 일가가 전체 가족회의를 통해 차기 회장을 결정한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두산그룹에 정통한 관계자는 “다른 그룹과 다소 다르게 두산가는 그룹 회장이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고, 이를 가족회의에서 공유하는 문화가 있다”며 “차기 회장 승계 시점도 박용만 회장의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두산그룹 4세 중 처음으로 총수 자리에 오른 박정원 회장의 제 1과제는 그룹 정상화다. 두산그룹 주력 계열사들은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두산그룹은 무려 1조7000억원 규모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국제회계기준(K-IFRS) 연결기준으로, 매출 18조9604억원, 영업이익 2646억원, 당기순손실 1조7008억원이다. 모기업 두산과 중간지주 역할을 하는 두산중공업은 실적이 비교적 양호하지만, 경영실적이 좋지 않은 손자회사들이 발목을 잡았다. 두산인프라코어가 지난해 연결기준으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93.94% 감소했다. 두산건설은 렉스콘 공장 매각 등 유동성 확보 노력에도 지난해 말 순차입금이 1조3000억원에 달한다. 때문에 주요 계열사들은 지난 2월 기업 신용도가 하락했다. 2012년 3월 17만원을 넘었던 두산 주가도 8만원 대로 주저앉았다. 그룹 재무구조 개선이 박 회장의 첫 번째 과제로 꼽힌다. 두산그룹은 지난 3월 2일 MBK파트너스와 두산인프라코어 공작기계 사업부문 매각 협상을 마무리해 1조1308억원가량의 자금을 확보했다. 연내 두산밥캣을 국내 증시에 상장하고, 방산업체 두산DST의 매각 작업을 마무리하면 3조원 안팎의 자금을 수혈할 수 있을 전망이다.

두산그룹의 장기 성장동력 확보도 박 회장이 처리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올해 사업권을 따낸 시내 면세점 등 유통 부문을 확대해, 기존 중공업 중심에서 소비재 중심으로 그룹 구조를 재편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두산그룹 실적 악화에는 중후장대 사업에 편중된 그룹 구조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두산의 서울 시내 면세점 사업 진출 결정에도 박정원 회장이 관여했다.

박정원 회장이 일궈낸 신규 사업인 연료전지 사업 확장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박용만 회장이 구조조정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만큼, 박정원 회장은 두산 지주부문 사장으로 일하면서 2014년 연료전지 사업을 신성장 분야로 정하고 국내의 퓨얼셀파워와 미국 기업인 클리어에지파워 인수를 주도한 바 있다. 두산 지주부문 사장은 그룹 회장을 보좌하면서 그룹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자리다.

두산가는 박정원 회장의 승부사 기질에 기대를 거는 분위기다. 박정원 회장은 1999년 두산 상사BG 부사장에 취임한 이후 사업 포트폴리오를 수익사업 위주로 과감히 정리해 2000년 매출액을 30% 이상 끌어올렸다. 23세에 사원으로 입사한 이래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31년 만에 그룹 총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준비된 회장’으로 불린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야구광인 박정원 회장은 야구팀 두산베어스 구단주를 맡아 ‘화수분 야구’라는 현재의 선수 육성 시스템을 안착시켰다”며 “인재 발굴과 육성을 가장 중시하는 박정원 회장의 경영 철학이 두산그룹 전체로 확산된다면 재무구조 개선과 신성장동력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편 박정원 회장에게 그룹 총수 자리를 물려준 박용만 회장은 두산인프라코어 회장으로 되돌아간다. 실적이 좋지 않은 두산인프라코어 턴어라운드에 주력하면서 최근 설립한 두산 리더십 연구소(DLI) 회장 업무를 겸임하며 미래 인재 양성에도 나선다. 현직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그룹 총수에서 물러나더라도 그대로 유지할 방침이다.

- 문 희 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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