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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⑩] 고종부터 반성하고 경계하라

[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⑩] 고종부터 반성하고 경계하라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나라에 화란(禍亂)이 계속되고 있사옵니다. 임오년과 갑신년, 갑오년, 그리고 을미년에 이어 올해에는 안경수의 작란과 김홍륙의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외국의 침범과 국가 내부의 혼란이 달마다 끊임없으니, 실로 국가의 존망이 벼랑 끝에 몰려있는 실정입니다.’ 1898년 9월 18일, 한말의 유학자이자 독립지사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의정부 찬정을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며 당시의 정국을 이렇게 진단했다(이하 인용은 모두 해당 상소임).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한 이래 조선은 숨 돌릴 틈 없는 격변에 휩싸였다. 1884년에는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으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개입, 청일전쟁이 벌어졌다. 이 때 일본은 경복궁을 강제로 점거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1895년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낭인들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후 수립된 친일내각은 섣부른 단발령 공포로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어 최익현이 상소를 올린 해인 1898년에는 안경수가 고종의 퇴위 음모를 꾸미다가 사형에 처해졌다. 역관 김홍륙은 고종을 독살하려다 발각돼 처형당했다. 실로 국가 전체가 총체적 위기상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최익현은 고종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폐하께서는 이렇게 된 까닭을 규명해 보셨습니까?’ 나라에 큰 환란이 연이어 벌어지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있냐는 것이다. ‘대체로 화란이란 하루아침이나 하루저녁의 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리가 쌓여 굳은 얼음이 얼 듯 점차로 더해 생겨나는 것이 화란입니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항상 싹이 싹트기 전에 방지해 화란이 일어날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는 것이고, 현명하지 못한 군주라 하더라도 화란을 겪으며 반성해 그것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총체적 위기의 진앙지는 고종 자신
무릇 혼란은 어느 한 순간의 잘못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오늘 무얼 하나 실수했다고 해서 당장 어떤 일이 닥치는 것도 아니다. 잘못과 실수가 쌓여 위기가 초래되고 그것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기에 변란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책임은 누구보다도 최고 리더인 군주에게 있는 바, 최익현은 준엄하게 고종을 비판했다. ‘만일 폐하께서 임오년의 변란을 통해 깨닫고 고쳐나가셨다면 갑신년의 변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갑신년의 변란을 경계로 삼아 대비하셨더라면 갑오년의 변란은 없었을 것이며, 갑오년의 변란을 반성하셨더라면 을미년의 변란도 아마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러한 일을 겪으며 더욱 성찰하고 노력하셨다면 어찌 안경수와 김홍륙의 변란이 일어날 수 있겠나이까.’ 최익현이 보기에 나라가 이처럼 연이은 난리를 겪고 있는 것은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위기를 겪었어도 달라지지 않고, 문제를 발견했어도 바로잡지 못한 군주가 이런 상황을 만든 주범인 것이다.

하지만 최익현은 아직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제 와서 지나간 이야기를 한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나이까. 단지 어제에 반성과 경계를 하지 못함이 오늘의 뼈아픈 후회가 되고 있사오니, 만약 오늘 다시 성찰하고 고치지 않는다면 내일 또 다시 오늘을 뉘우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라도 정신을 가다듬고 전날의 잘못을 힘써 고쳐가야 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지금부터라도 문제를 개선하고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재앙을 막을 수 있고 반복되는 후회를 멈출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최익현은 고종에게 간곡하게 진언했다. ‘지금 시세가 위급하고 경황이 없다 하여 말단의 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좋은 의원은 반드시 먼저 병이 생기게 된 근원을 살펴 치료하고 원기를 차차 회복한 연후에야 여러 약을 쓰며 병증을 다스리는 법입니다. 지금 국가의 병폐를 논함에 있어 말로는 뭐라 하지 못하겠나이까. 그러나 진실로 병이 생긴 근원을 찾아내 구제하지 않는다면 나라가 겪고 있는 여러 병증을 끝내 제거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갑작스레 큰 일이 벌어지면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만 해결하려 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가장 시급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의 근원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일은 양상만 다를 뿐 언제고 다시 재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대한제국이 당면한 문제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최익현이 보기에 그것은 다름 아닌 고종 자신이었다. ‘폐하께서는 물욕에 마음이 끌리고 욕심이 습관이 되셨습니다. 부드러우나 강단이 부족하고 자잘한 일은 잘 챙기면서도 큰 그림을 그리는 일엔 어둡습니다. 아첨을 좋아하고 정직을 꺼리시며 안일함에 빠져 노력할 줄 모르십니다. 지난 30년 동안 위에서 하늘이 견책하였으나 깨닫지 못하셨고, 아래서 백성이 원망하였으나 돌보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란이 있게 된 이유입니다…(중략)…부디 중전께서 그처럼 흉악한 변을 당하신 까닭은 무엇인지, 국가의 사세가 점차 위망(危亡)으로 치닫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를 생각하십시오. 무슨 도리를 잃었기에 역적이 자주 일어나며, 무슨 계책을 실수했기에 적들의 침해와 모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십시오. 어찌하여 정사와 법령은 확립되지 않는지, 어찌하여 백성의 삶은 안정되지 못하고 있는지를 성찰하십시오. 반복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신다면, 폐하께서는 분명 척연하게 반성하고 두려워하여 잘못을 숙청하고 나라를 혁신해 내실 것입니다.’ 그때껏 무능하고 군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고종이 하루빨리 달라져야 하며, 그 첩경은 반성과 성찰에 있다는 것이다.

최익현은 말을 이어갔다. ‘이는 태산을 끼고 북해를 뛰어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상께서 하실 수 있는 분수 안에 있는 일입니다. 대저 나의 분수에 있는 일이라면 뜨거운 불에 뛰어 들고 날이 선 칼날을 밟는 일이라도 못할 것이 없을진데, 이처럼 스스로를 반성하고 마음가짐을 새로 하는 일이야 손바닥을 뒤집듯 쉬운 일이 아니겠나이까.’

 군주로서 해야 할 기본 도리 실천하라
그가 고종에게 바란 것은 영웅이나 이루는 위대한 성과가 아니다. 작금의 모든 위기와 병폐를 일소할 만병통치약을 요구한 것도 아니다. 그저 마음을 바로잡고 원칙에 충실하며 군주로서 해야 할 도리를 실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군주가 제 자리를 찾아야 신하들도 제 역할을 하게 되며,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정치가 안정되고 나라의 병폐도 개혁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런 최익현의 생각은 원론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군주의 마음자세를 운운할 여유가 어디 있냐는 것이다. 하지만 망한 나라의 공통점 또한 군주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군주, 대통령, CEO, 최고 지도층, 리더 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데도 건강한 조직은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었다. 불운을 탓하고, 엄혹한 국내외 환경을 비관하기 이전에 리더가 먼저 스스로를 반성하고 혼신의 노력을 다하라는 것. 이것이 최익현의 사직상소가 주는 메시지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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