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투쟁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노래
“음악계에서는 신인 아티스트가 느닷없이 뜨는 경우가 있어요. 어느 날 갑자기 모두가 그의 노래를 흥얼거리죠.”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지난해 6월 ‘1989 월드 투어’ 도중 미국 필라델피아 콘서트장의 환호하는 관객 5만 명 앞에서 말했다. 그녀는 특별 게스트를 소개하려던 참이었다. “지금 들려드릴 곡의 제목은 ‘Fight Song!’입니다.” 스위프트가 이렇게 말하자 객석이 술렁였다.
잠시 후 싱어송 라이터 레이철 플래튼(34)이 스위프트 옆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 대다수 사람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가수였다. 플래튼이 맑고 숨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Fight Song’의 첫 소절을 불렀다. 그녀가 10년 넘게 거절당해 온 음악계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쓴 기백이 넘치는 인디 팝 곡이다. 온라인에 오른 흐릿한 콘서트 동영상에서 플래튼이 그래미상을 휩쓴 톱 스타 스위프트가 자신의 노래 둘째 소절을 부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플래튼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녀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스위프트가 무대 위에서 나를 소개한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플래튼의 메이저 음반사 데뷔 앨범인 ‘Wildfire’는 지난 1월 ‘빌보드 200’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를 차지한 아델의 ‘25’와 4단계 차이다. 플래튼은 “앨범을 만드는 힘든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목표와 상황을 마음 속에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내가 음반사에서 트리플 플래티넘(음반 판매량 300만 장 이상) 기념패를 받는 모습, 단독 순회공연 버스에 앉아 있는 모습,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주먹을 흔들며 ‘Fight Song!’을 외치는 광경 등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모두 이뤄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플래튼은 젊음에 열광하는 음악계에서 활동 중인 팝스타 대다수에 비해 나이가 거의 2배나 많다. 스위프트와 로드, 셀레나 고메즈, 데미 로바토, 에이브릴 라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리한나 등이 모두 20세 전에 첫 성공을 거뒀다. 플래튼은 그녀처럼 30대에 성공한 여자 가수로는 누가 있느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셜리 크로우와 토리 에이머스, 그리고 시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따져 보니 재미있다!”
정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크로우는 데뷔 앨범 ‘Tuesday Night Music Club’을 발표했을 때 31세였다. 싱글 ‘All I Wanna Do’가 히트한 건 그로부터 1년 뒤였으며 이를 발판으로 1995년에는 그래미상 3개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토리 에이머스는 29세에 데뷔 앨범 ‘Little Earthquakes’를 냈고, 시아의 ‘Breathe Me’가 HBO의 드라마 ‘식스 피트 언더(Six Feet Under)’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됐을 때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시아는 그때를 “죽어가던 내 음악 인생을 되살린 순간”이었다고 묘사했다.플래튼은 가수 생활 초창기에 나이를 속이고 싶으냐고 묻는 매니저에게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내게 나이는 중요치 않다. 나이를 장애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큰 문제가 아니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팝스타’가 되는 데는 어떤 장애나 나이 제한도 없다는 걸 내가 증명했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20세였을 때 누군가 앞으로 14년은 더 기다려야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플래튼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튼에서 성장했고 그곳에서 가까운 케임브리지에 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고교 시절엔 아카펠라 그룹에서 노래했다.
2003년 트리니티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해 작은 클럽과 바에서 노래했다. 새벽 1시~4시까지 일했는데 임시직이라 해고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한 밴드에 취직해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5층에서 살았다. 맥두걸 거리에 있는 그 건물은 한때 밥 딜런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플래튼이 설명하는 그녀의 20대는 마치 TV 드라마 ‘걸스(Girls)’의 영화판 예고편처럼 들린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의 ‘외로운’ 산책, 눈물 젖은 일기장, 늦은 밤 조스 피자 가게에서 먹는 피자, 음악하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의 작은 바로 몰려가 찾을 수 있는 악기는 모두 꺼내놓고 연주하며 큰 소리로 노래하다 위층에 사는 가난한 할머니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랐던 일 등.
플래튼은 첫 번째 순회공연을 준비할 때 에이전트로 가장해 미국 곳곳의 작은 커피숍과 공연 계약을 했다. 그녀는 드러머 크레이그 메이어와 함께 자신의 밴을 타고 전국을 돌며 공연했다. 플래튼은 이전에 앨범을 두 번(2003년 ‘Trust in Me’와 2011년 ‘Be Here’) 냈지만 반짝하다 말았다. 2011년 싱글 ‘1000 Ships’가 미국 ‘빌보드 성인 톱 40’ 차트에서 24위를 차지하면서 메이저 음반사의 눈길을 끌었지만 계약이 성사되진 않았다.
그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30이 다 돼 가는데 돈 한푼 없고. 내 자신을 믿다니 미친 짓이야.’” 그때 ‘Fight Song’의 악상이 떠올랐다. 코러스 부분을 쓸 때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노래는 나의 투쟁을 위한 곡이야/ 내 인생을 돌려줄 노래/ 내가 괜찮다는 걸 증명해줄 노래(This time this is my fight song/ Take back my life song/ Prove I’m all right song)’. 굳센 결의가 담긴 이 노래는 꿈이든 친구든 운동이든, 뭔가를 포기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Fight Song’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6위를 차지했고 ‘빌보드 성인 컨템포러리 송 차트’에서 9주 동안 1위를 지켰다. 이 노래는 TV 드라마 ‘프리티 리틀 라이어스’, 다이어트 프로그램 ‘비기스트 루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 ‘더 보이스’, 드라마 ‘슈퍼걸’ 예고편 등에 삽입됐다. 또 포드 자동차 광고와 ABC 방송의 뉴스 프로 ‘굿 모닝 아메리카’의 #MyFightSongGMA 캠페인에도 이용됐다. ‘Fight Song’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노래로 남학생 사교클럽의 모임 장소나 초등학생의 등교 차량,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클럽, 동네 편의점 등 어디서 들어도 어색하지 않다.다운로드 횟수 248만 회를 기록한 ‘Fight Song’은 지난해 ‘팝 디지털 다운로드 송’ 베스트셀러 9위에 올랐다. 힐러리 클린턴은 아이오와 주 민주당 당원대회에서 대선 후보 경선 1위를 차지했을 때 이 곡을 승리의 노래로 선택했다. 또 스위프트는 ‘This Is My Fight Song’이라는 문구가 쓰인 T셔츠를 입기도 했다. ‘Wildfire’에 수록된 싱글 ‘Stand by You’는 ‘Fight Song’에 이어 ‘빌보드 성인 팝송 라디오 방송 횟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그녀의 두 번째 노래가 됐다.
“가끔 ‘Fight Song’을 만들 당시에 쓴 일기장을 들춰본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이 노래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느껴져 새삼 놀랍다. 그런 확신이 있었는지 잊고 지냈다. 당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절망에 차서 일을 더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부족한 자신감을 메우려고 그랬던 것 같다.”
플래튼은 명상과 요가를 하고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는다. 그래서 그녀의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엔 여러 권의 책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자만심을 가라앉히고, 내부의 악마와 싸우는 것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 안에 아직도 그런 것들이 있다. 여전히 불안하다.” 결혼해서 가족이 있는 그녀는 갑자기 유명해진 뒤 가장 어려운 점이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북미 순회공연 중인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다. 3월의 마지막 2주 동안만 해도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 솔트레이크 시티,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밴쿠버 등지를 돌며 공연했다.
“뮤지션으로서의 내 꿈이 한꺼번에 이뤄지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일과 사생활의 균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삶이 순식간에 완전히 바뀌어서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제자리를 찾았다. 경이로운 한 해를 보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자신의 팬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됐을 때였다. “그렇게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이라는 말은 팝스타가 자신의 히트곡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Fight Song’은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다. 그녀의 팬들은 #MyFightSong이라는 해시태그를 이용해 자신들의 투쟁에 관한 사진과 비디오,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린다. 플래튼은 그것들을 정리해 온라인에 게시한다. 홀리 키친이라는 전이성 유방암 환자가 죽기 전 ‘Fight Song’을 틀어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500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이 노래는 또 다섯 살짜리 소녀 카이시 테리의 가족에게도 감동을 줬다. 테리는 제1형 당뇨병 진단을 받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테리가 깨어나자 가족은 그녀의 회복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어 ‘카이시의 재활 Fight Song’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리는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플래튼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심각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과 뮤지션을 연결시켜주는 단체 ‘뮤지션스 온 콜(Musicians on Call)’에서 일했다. 그녀가 그동안 들은 수만 개의 사연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크리스틴 러켄바그의 이야기다. 러켄바그는 처음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됐다가 13년 후 재발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플래튼은 “러켄바그가 가족과 친구 150명 앞으로 보낸 이메일을 그녀의 조카가 내게 전달해줬다”고 말했다. “그 메일에서 그녀는 종양의 재발 사실을 알리고 ‘Fight Song’ 뮤직비디오 링크를 올렸다. 그녀는 이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며 들을 때마다 마음이 긍정적이 되고 강해진다고 썼다.”
플래튼은 그 메일에 답장한 뒤 러켄바그가 사는 버지니아 주 몽클레어로 찾아갔다. 그녀는 러켄바그의 가족과 친구 150명이 모두 모인 교회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런 순간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 애비게일 존스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잠시 후 싱어송 라이터 레이철 플래튼(34)이 스위프트 옆에 앉았다. 얼마 전까지 대다수 사람이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가수였다. 플래튼이 맑고 숨소리가 섞인 음성으로 ‘Fight Song’의 첫 소절을 불렀다. 그녀가 10년 넘게 거절당해 온 음악계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서 쓴 기백이 넘치는 인디 팝 곡이다. 온라인에 오른 흐릿한 콘서트 동영상에서 플래튼이 그래미상을 휩쓴 톱 스타 스위프트가 자신의 노래 둘째 소절을 부르는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장면을 볼 수 있다. 플래튼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녀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이었다.
“스위프트가 무대 위에서 나를 소개한 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눈물이 글썽거렸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플래튼의 메이저 음반사 데뷔 앨범인 ‘Wildfire’는 지난 1월 ‘빌보드 200’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다. 1위를 차지한 아델의 ‘25’와 4단계 차이다. 플래튼은 “앨범을 만드는 힘든 기간 동안 여러 가지 목표와 상황을 마음 속에 그리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내가 음반사에서 트리플 플래티넘(음반 판매량 300만 장 이상) 기념패를 받는 모습, 단독 순회공연 버스에 앉아 있는 모습, 공연장을 가득 메운 관객이 주먹을 흔들며 ‘Fight Song!’을 외치는 광경 등이다. 불가능해 보이던 일들이 모두 이뤄지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플래튼은 젊음에 열광하는 음악계에서 활동 중인 팝스타 대다수에 비해 나이가 거의 2배나 많다. 스위프트와 로드, 셀레나 고메즈, 데미 로바토, 에이브릴 라빈,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리한나 등이 모두 20세 전에 첫 성공을 거뒀다. 플래튼은 그녀처럼 30대에 성공한 여자 가수로는 누가 있느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한 후 이렇게 대답했다. “셜리 크로우와 토리 에이머스, 그리고 시아? 잘 모르겠다. 그렇게 따져 보니 재미있다!”
정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다. 크로우는 데뷔 앨범 ‘Tuesday Night Music Club’을 발표했을 때 31세였다. 싱글 ‘All I Wanna Do’가 히트한 건 그로부터 1년 뒤였으며 이를 발판으로 1995년에는 그래미상 3개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다. 토리 에이머스는 29세에 데뷔 앨범 ‘Little Earthquakes’를 냈고, 시아의 ‘Breathe Me’가 HBO의 드라마 ‘식스 피트 언더(Six Feet Under)’의 마지막 장면에 삽입됐을 때 그녀의 나이는 29세였다. 시아는 그때를 “죽어가던 내 음악 인생을 되살린 순간”이었다고 묘사했다.플래튼은 가수 생활 초창기에 나이를 속이고 싶으냐고 묻는 매니저에게 아니라고 펄쩍 뛰었다. “내게 나이는 중요치 않다. 나이를 장애로 생각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큰 문제가 아니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팝스타’가 되는 데는 어떤 장애나 나이 제한도 없다는 걸 내가 증명했다.”
“힘들었던 지난날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과정이 꼭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20세였을 때 누군가 앞으로 14년은 더 기다려야 빛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플래튼은 미국 매사추세츠 주 뉴튼에서 성장했고 그곳에서 가까운 케임브리지에 있는 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고교 시절엔 아카펠라 그룹에서 노래했다.
2003년 트리니티대학을 졸업한 뒤 뉴욕으로 이주해 작은 클럽과 바에서 노래했다. 새벽 1시~4시까지 일했는데 임시직이라 해고되기 일쑤였다. 그러다가 한 밴드에 취직해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의 5층에서 살았다. 맥두걸 거리에 있는 그 건물은 한때 밥 딜런이 살던 곳이기도 하다.
플래튼이 설명하는 그녀의 20대는 마치 TV 드라마 ‘걸스(Girls)’의 영화판 예고편처럼 들린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의 ‘외로운’ 산책, 눈물 젖은 일기장, 늦은 밤 조스 피자 가게에서 먹는 피자, 음악하는 친구들과 함께 동네의 작은 바로 몰려가 찾을 수 있는 악기는 모두 꺼내놓고 연주하며 큰 소리로 노래하다 위층에 사는 가난한 할머니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랐던 일 등.
플래튼은 첫 번째 순회공연을 준비할 때 에이전트로 가장해 미국 곳곳의 작은 커피숍과 공연 계약을 했다. 그녀는 드러머 크레이그 메이어와 함께 자신의 밴을 타고 전국을 돌며 공연했다. 플래튼은 이전에 앨범을 두 번(2003년 ‘Trust in Me’와 2011년 ‘Be Here’) 냈지만 반짝하다 말았다. 2011년 싱글 ‘1000 Ships’가 미국 ‘빌보드 성인 톱 40’ 차트에서 24위를 차지하면서 메이저 음반사의 눈길을 끌었지만 계약이 성사되진 않았다.
그녀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대체 뭘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 30이 다 돼 가는데 돈 한푼 없고. 내 자신을 믿다니 미친 짓이야.’” 그때 ‘Fight Song’의 악상이 떠올랐다. 코러스 부분을 쓸 때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 노래는 나의 투쟁을 위한 곡이야/ 내 인생을 돌려줄 노래/ 내가 괜찮다는 걸 증명해줄 노래(This time this is my fight song/ Take back my life song/ Prove I’m all right song)’. 굳센 결의가 담긴 이 노래는 꿈이든 친구든 운동이든, 뭔가를 포기하려는 모든 사람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다.
‘Fight Song’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6위를 차지했고 ‘빌보드 성인 컨템포러리 송 차트’에서 9주 동안 1위를 지켰다. 이 노래는 TV 드라마 ‘프리티 리틀 라이어스’, 다이어트 프로그램 ‘비기스트 루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 ‘더 보이스’, 드라마 ‘슈퍼걸’ 예고편 등에 삽입됐다. 또 포드 자동차 광고와 ABC 방송의 뉴스 프로 ‘굿 모닝 아메리카’의 #MyFightSongGMA 캠페인에도 이용됐다. ‘Fight Song’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폭넓게 다가갈 수 있는 노래로 남학생 사교클럽의 모임 장소나 초등학생의 등교 차량,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클럽, 동네 편의점 등 어디서 들어도 어색하지 않다.다운로드 횟수 248만 회를 기록한 ‘Fight Song’은 지난해 ‘팝 디지털 다운로드 송’ 베스트셀러 9위에 올랐다. 힐러리 클린턴은 아이오와 주 민주당 당원대회에서 대선 후보 경선 1위를 차지했을 때 이 곡을 승리의 노래로 선택했다. 또 스위프트는 ‘This Is My Fight Song’이라는 문구가 쓰인 T셔츠를 입기도 했다. ‘Wildfire’에 수록된 싱글 ‘Stand by You’는 ‘Fight Song’에 이어 ‘빌보드 성인 팝송 라디오 방송 횟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그녀의 두 번째 노래가 됐다.
“가끔 ‘Fight Song’을 만들 당시에 쓴 일기장을 들춰본다”고 플래튼은 말했다. “이 노래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믿음이 강하게 느껴져 새삼 놀랍다. 그런 확신이 있었는지 잊고 지냈다. 당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절망에 차서 일을 더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부족한 자신감을 메우려고 그랬던 것 같다.”
플래튼은 명상과 요가를 하고 자기계발서를 많이 읽는다. 그래서 그녀의 침대 머리맡 탁자 위엔 여러 권의 책이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그녀는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자만심을 가라앉히고, 내부의 악마와 싸우는 것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내 안에 아직도 그런 것들이 있다. 여전히 불안하다.” 결혼해서 가족이 있는 그녀는 갑자기 유명해진 뒤 가장 어려운 점이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북미 순회공연 중인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이 그립다. 3월의 마지막 2주 동안만 해도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 솔트레이크 시티, 포틀랜드, 시애틀, 캐나다 밴쿠버 등지를 돌며 공연했다.
“뮤지션으로서의 내 꿈이 한꺼번에 이뤄지면서 가장 힘든 부분이 일과 사생활의 균형”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내 삶이 순식간에 완전히 바뀌어서 좀 이상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녀는 제자리를 찾았다. 경이로운 한 해를 보내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자신의 팬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게 됐을 때였다. “그렇게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놀랐다”고 그녀는 말했다.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이라는 말은 팝스타가 자신의 히트곡에 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은 아니다. 하지만 ‘Fight Song’은 생명을 위협하는 질병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노래다. 그녀의 팬들은 #MyFightSong이라는 해시태그를 이용해 자신들의 투쟁에 관한 사진과 비디오,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린다. 플래튼은 그것들을 정리해 온라인에 게시한다. 홀리 키친이라는 전이성 유방암 환자가 죽기 전 ‘Fight Song’을 틀어놓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담은 비디오는 5000만 명 이상이 시청했다.
이 노래는 또 다섯 살짜리 소녀 카이시 테리의 가족에게도 감동을 줬다. 테리는 제1형 당뇨병 진단을 받은 뒤 발작을 일으키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테리가 깨어나자 가족은 그녀의 회복에 관한 비디오를 만들어 ‘카이시의 재활 Fight Song’이라는 제목을 붙였다(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리는 폐렴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플래튼은 지난 10여 년 동안 심각한 질병을 앓는 환자들과 뮤지션을 연결시켜주는 단체 ‘뮤지션스 온 콜(Musicians on Call)’에서 일했다. 그녀가 그동안 들은 수만 개의 사연 중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이 크리스틴 러켄바그의 이야기다. 러켄바그는 처음 뇌종양 진단을 받은 뒤 상태가 호전됐다가 13년 후 재발해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플래튼은 “러켄바그가 가족과 친구 150명 앞으로 보낸 이메일을 그녀의 조카가 내게 전달해줬다”고 말했다. “그 메일에서 그녀는 종양의 재발 사실을 알리고 ‘Fight Song’ 뮤직비디오 링크를 올렸다. 그녀는 이 노래의 가사가 자신의 감정을 대변하며 들을 때마다 마음이 긍정적이 되고 강해진다고 썼다.”
플래튼은 그 메일에 답장한 뒤 러켄바그가 사는 버지니아 주 몽클레어로 찾아갔다. 그녀는 러켄바그의 가족과 친구 150명이 모두 모인 교회에서 이 노래를 불렀다. “그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런 순간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 애비게일 존스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윤 대통령 “백종원 같은 민간 상권기획자 1000명 육성할 것”
2삼성전자, 반도체 위기론 커지더니…핫 하다는 ETF 시장서도 외면
3롯데 뒤흔든 ‘위기설 지라시’…작성·유포자 잡힐까
4박서진, 병역 면제 논란…우울·수면 장애에 가정사까지?
5홍준표 "기업 살아야 한국이 산다...투자하는 기업엔 얼마든지 특혜를 줘도 상관 없어"
6미국투자이민 새 기준 국민이주㈜, VIP 미국영주권 세미나 개최…예비 신청자 기대감 모아
7컴투스 ‘스타시드’, 출시 하루만에 태국 구글 인기 게임 1위
8지씨셀 떠난 제임스 박 대표...롯데바이오로직스로
9S&P "내년 한국 기업 신용도 둔화 가능성 높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