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제재 빗장 풀린 이란] 지식기반산업 구축해 퀀텀 점프 노려
[경제 제재 빗장 풀린 이란] 지식기반산업 구축해 퀀텀 점프 노려
박근혜 대통령이 5월 1~4일 이란을 방문한 것은 중동 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은 ‘블루오션’ 시장에 문을 세차게 두드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란이라는 신세계에 대한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더 큰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번 방문은 대한민국 정상으로선 수교 이후 처음이다. ‘신정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 비이슬람 국가의 여성 정상이 방문하는 것도 처음이다. 이는 이란이 한국에 기대하는 것도 많고, 한국도 이란에서 얻을 것이 상당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핵개발을 유보하고 의혹을 해소하기위해 국제사회의 핵사찰을 허용하면서 지난 1월 10년 간에 걸친 유엔 경제제재가 풀린 이란 현지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지금은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며 미래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양한 경제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지난 4월 21~25일 이란에 머물면서 수도인 테헤란은 물론 경제 수도로 불리는 이스파한, 고도 시라즈 등 여러 지역을 돌며 이 나라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원장 김성귀)이 지난 4월 23~24일 이란의 이스파한과 테헤란에서 개최한 ‘2016 한·이란 비즈니스 포럼’에서 이란인들의 경제 개발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스파한에선 한국과 교역을 희망하는 견과류와 공예품 무역업자들은 물론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국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젊은 창업 희망자까지 몰렸다. 테헤란의 행사장에는 항만 개발, 해운 운항, 철도 등 해운항만물류 관계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4월 25일 테헤란에서 만난 이란의 알리 타예브니아 경제재정장관은 “연 8%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야심찬 경제개발 계획을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은 한국 경제가 이런 이란을 돕고 우리도 새로운 시장을 얻는 윈윈의 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란은 한국 기업이 기술과 경험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추가 시장 확보가 한계에 봉착한 조선·해운·건설·자동차 등 ‘재래식 산업’에 대한 갈망이 크다. ‘중동의 마지막 블루오션’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란은 유엔의 경제제재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친미 파흘레비 왕조가 무너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제재에 시달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재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이란 국적의 학생은 입학 몇 달 후 학교 측으로부터 ‘납부한 등록금을 돌려줄 테니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공이 핵물리학인 것을 파악한 당국이 대학 측에 협조를 요청한 때문이었다. 2011년 이란에서 6개월 간 어학연수를 했던 한국 여학생은 같은 해 영국에 입국하면서 공항에서 30분간 꼬치꼬치 심문을 당했다. 한국인은 영국에 6개월 간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서구의 이런 ‘이란 때리기’ 때문에 이란은 인프라와 기술 투자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특히 이란은 철도와 도로보다 항공 교통에 크게 의존하는 독특한 교통 시스템이 있다. 항공교통이 더 발달한 이유는 국토 면적이 한국의 7.7배나 되는 대국인데도 육상 교통 인프라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란 국내 항공료는 한국 돈으로 1만원 대라 국민이 쉽게 이용한다. 그런데도 비행기는 낡고 부품 확보는 쉽지 않다. 특히 파흘레비 왕조 시절 구매했던 미제 비행기는 부품을 확보할 수 없어 몇 대는 세워놓고 부품 공급용으로만 뜯어내고 있는 실정이다. 2005년 12월에는 108명을 태우고 가던 미국산 C-130 수송기가 테헤란 주택가에 추락해 타고 있던 이란 국방부 출입기자 전원이 숨지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유엔 제재가 풀리자마자 곧바로 이탈리아·프랑스로 날아가 유럽산 여객기를 대량 구매한 데는 이러한 이란의 속사정이 숨어있다.
이란은 국토만 넒은 게 아니라 인구도 8000만이 넘기 때문에 항공만으로 교통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철도·도로 건설 수요가 널려 있다. 거기를 달릴 힘있고 성능 좋은 철도차량과 자동차도 필요하다. 이란 도시들을 질주하는 수많은 자동차도 연식이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차는 수입가보다 더 많은 관세를 부가하는 탓도 있지만 기술이나 부품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 좋은 차를 생산하기 힘든 탓이 크다. 이란 국영 자동차 회사인 SAIPA는 기아의 프라이드 베타를 ‘사바’라는 이름으로 면허 생산하고 있는데 인기가 좋다. 이 때문에 이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20% 이상이 사바다. 한국에서 직접 수출한 프라이드와 프라이드 베타도 도로에 널려 있다. 르노 등 프랑스와 합작으로 이란 현지에서 생산한 소형 자동차도 많이 다닌다. 이제 이런 자동차들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란이 한국에 바라는 것도 이런 것이다. 오랜 제재로 움츠렸던 경제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함께하자는 것이다. 경제 교류를 둘러싼 한국과 이란 사이에 온도 차가 있는 셈이다. 이번 박 대통령의 방문에서 본 것처럼 한국은 선박·자동차·가전제품을 팔고, 현지 항만 왕래를 강화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상당수 이란인들은 ‘그 다음 단계’를 원하고 있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을 흡수해 한국과 같은 고도 산업국가로 가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란 방문 중 현지 학자와 공무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 하나가 ‘지식기반산업’일 정도였다. 이란의 경제 실세인 알리 타예브니야 경제재정장관도 양국 협력이 가장 필요한 분야로 자동차산업을 꼽았다. 타예브니아 장관은 “이란 자동차산업은 주목할 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며 “한국 기업과 이란 업체와의 합작이 주요 발전 분야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란이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해 중동·중앙아시아·유럽아시아를 잇는 물류 대국이 되고 싶다는 야망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그 꿈을 실현한 견인차로 ‘이란 동남부의 반다르 아바스(페르시아만 입구의 호르무스 해협에 접한 항구도시)와 차바하르(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오만만에 접한 이란 최남단 항구도시이자 자유무역지구) 개발’을 들었다. 그는 “오만만을 지나는 선박이 차바하르에서 화물을 환적하고, 이 화물이 이란 내륙을 거쳐 중앙아시아와 중국까지 갈 수 있도록 항만과 철도를 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차바하르 항만 개발과 이 항구에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카프카스 지역 국가인) 아제르바이잔까지 이어지는 내륙 철도의 완성이 관건이다. 그는 “현재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은 물론 심지어 중국까지 이 환적 노선을 지원한다”며 “이 지역 국가는 물론 인도까지 이 분야 투자에 막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한국의 투자를 권했다.
이스파한대 기업가 정신학과(경영학과에 해당)의 모하마드 바르자니 교수는 “이란은 오랜 제재로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두뇌가 해외로 유출돼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젊은이들에게 일자리와 함께 앞으로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란 인구의 60%는 30세 이하 청년으로, 이들은 대부분 무상에 가까운 교육 혜택을 입어 과학과 기술을 제대로 공부한 우수 인력”이라고 소개했다. 이란의 최고 자원은 석유와 가스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휴대전화나 가전제품·자동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오는 시장이 되기보다, 이란에서 개발·제조해 주변 지역에 수출하는 고도산업 국가로 거듭나고 싶다”고 희망했다. 이스파한대 국제경제소장인 코마일 타예비 교수는 “이란은 야망이 있는 나라”라며 “유엔 제재 해제를 계기로 오일달러에다 그간 양성한 과학·기술·통상 인력, 지정학적 위치 등 나라의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지역의 새로운 경제강국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테헤란의 샤히드 베헤슈티 대학의 아바스 아랍 마자르 교수는 “MENA(중동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카프카스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이란에 투자하면 인구 8000만의 이란은 물론, 총 4억에 이르는 주변 지역에서 쉽게 마케팅을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테헤란대 대학원 국제경영학과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 이은솔씨는 “이란에는 고대와 중세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관광 인프라가 풍부한데다 국민이 친절하고 치안이 안정돼 앞으로 관광 붐도 기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소비자들의 수요가 많은 질 좋은 의약품과 의료기기도 진출이나 합작생산을 추진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발언을 종합하면 풍부한 젊은 인재와 지정학적 위치를 바탕으로 지식기반 산업과 물류산업을 일으켜 선진국으로 거듭나겠다는 것이다. 석유와 가스를 판 돈으로 풍족하게 살자는 포퓰리즘보다 이제는 기회를 살려 선진산업 국가로 가자는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한국의 과학기술계·벤처업계·보건의료계·교육연구계가 이란으로 달려가야 하는 이유다.
이란이 이러한 야심찬 계획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데는 오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지난 3월 25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골레스턴 궁전에서 이란의 오랜 염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란 대법원 부근에 있는 이 궁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 되고 역사적인 유적이다. 과거 진흙과 짚으로 만든 테헤란 성벽에 둘러싸였던 유서 깊은 장소다. 성벽은 사파비 왕조(1502~1736)의 타흐마스프 1세 때 만든 것이다. 그 뒤 잔드 왕조의 카림 칸(1750~1779)이 수리했다. 이후 카자르 왕조(17 94~1925)의 아가 모하마드 칸(17 42~1797)이 테헤란을 수도로 삼으면서 이 궁전을 왕조의 중앙 궁전으로 삼았다. 1865년 다시 지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골레스턴은 ‘장미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름대로 장미를 비롯한 수많은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 한가운데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궁전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대관식장이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로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몰락했던 파흘레비 왕조(1925~79) 시절에 이 궁전은 왕실의 리셉션장으로 사용됐다. 왕조의 공식 거처는 니아바란 궁전이지만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와 연회는 이곳에서 열었다. 하를레비 왕조의 초대 군주였던 레자 샤(1925~41)는 골레스턴 궁전의 대리석 대관식장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그의 아들이자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모하마드 레자 파흘레비(1941~79)는 이 궁전의 뮤지엄 홀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지금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장소다.
곳곳의 건물에는 18~19세기 이란의 공예품과 유럽의 선물로 가득 찼다. 유럽의 흉내를 낸 근대적인 회화와 동양과 유럽의 도자기 방, 거울 방 등이 줄줄이 보였다. 거울의 방과 도자기의 방에서 만난 네덜란드 여성 여행객은 “서구의 궁전과 하나 차이가 없다”며 “머나먼 이란의 테헤란까지 와서 서구 문물의 흔적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의 도자기 주산지인 이야기를 꺼내며 환담을 나눴다.
거울과 도자기는 당시 유럽 왕실의 부를 상징하는 값진 장식물이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이를 수입하느라 은이 너무 많이 유출되자 독일 작센의 군주는 마이센 지역에서 자체 도자기를 개발하게 했다. 도자기 무역으로 부를 일궜던 네덜란드인들은 델프트라는 도시에서 우아한 델프트 자기를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고가품의 수입 대체를 노린 것이다. 이 때문에 왕실의 값비싼 도자기 선호는 국민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 테헤란의 궁전에서 당시로선 엄청난 값이었을 도자기로 장식한 방을 구경한 유럽인으로선 묘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란이 19세기 서구 문물을 제대로 받아 들여 국가의 위신을 높이려고 시도했던 흔적이다. 이 궁전은 이란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이란이 영국과 러시아 같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바람에 근대화와 발전, 반영의 기회를 놓쳤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을 왕실의 중전으로 삼았던 카자르 왕조는 내내 외세에 시달렸다.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계 카자르족의 아가 모하마드가 일시 이란을 지배한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세상을 떠나자 1794년에 독립하면서 창건한 왕조이다. 테헤란에 수도를 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왕조 초기에는 러시아의 침입을 물리치고 한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판도를 넓히는 등 세력을 떨쳤다. 그러면서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고 서구 문물을 들여오려고 애썼다. 이를 통해 근대화를 이뤄 이란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골레스턴 궁전에 이란 고유의 문물보다 서구 문물의 흔적이 더 많이 보이는 이유다. 하지만 이도 잠시. 근대적인 무기로 무장한 러시아가 다시 맞붙었다 패배하면서 나라가 기우뚱하게 됐다. 카자르 왕조는 1828년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맺고 러시아인이 이란에서 치외 법권의 특혜를 누리는 것을 인정했다. 이 특혜는 고스란히 다른 서구 열강에도 적용됐다. 영국을 비롯한 다양한 나라가 이 같은 특혜를 바탕으로 이란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영국의 경우 이란을 통해 북쪽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고 동쪽 인도 식민지와 서쪽 중동을 연결하려는 구상을 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고고학 연구를 이유로 이란에 진출했다. 이처럼 이란은 19세기 말부터 서구의 반식민지 상태가 됐다. 비슷한 시기였던 구한말의 우리와 처지가 비슷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근대화 과정에선 유럽 열강에 대항하는 민중항쟁이 줄을 이었다. 1890년 담배 전매권이 영국인의 손에 넘어가자 민중은 ‘담배 불매 운동’을 폈다. 불매 운동은 민족자결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됐다.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는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무능했으며 이란은 먼저 근대화를 이룬 열강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영국은 이란 동북부의 아프가니스탄과 동남부 발루치스탄과 시스탄 지역에, 러시아는 이란 서북부의 캅카스 지방에 각각 세력을 형성했다. 이란은 제국주의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일부 종교 세력이나 소수 민족 등에 의한 민족해방운동이 벌어졌으나 열강에 진압됐다. 그러자 카자르의 군주 모자파르 알딘 샤(1896~1907 재위)는 1906년에 페르시아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립해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 1905년 테헤란에서 물가 폭등 사태가 벌어지자 민중의 저항이 심화되고 그 해 12월부터 제헌 운동이 확산됐다. 결국 입헌파들은 1906년 8월 알딘 샤로부터 입헌 조서를 받아내고 그 해 10월 제헌의회를 구성해 12월 헌법을 만들었다. 정치 체제부터 개혁해 근대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세상을 떠난 알딘 샤를 이어 아들 모하마드 알리 샤(1907~1909 재위)가 즉위하면서 이란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다. 하지만, 알리 샤는 헌법이 이슬람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하며 이를 무효화하고 의회를 해산하면서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의회에 포격을 가하고 영국과 러시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나라는 내전 상황에 접어들었다. 결국 테헤란은 헌법수호파 군인들이 점령하고 1909년 6월 새로 구성된 의회는 압도적인 투표로 알리 샤의 폐위를 결정하고 대신 그의 9살 난 아들인 아마드 샤가 즉위했다. 알리 샤는 해외로 망명해 이탈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입헌혁명이라고 부른다.
입헌혁명을 통한 근대화 시도는 1911년 러시아 제국의 무력 간섭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면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열강에 경제적 의존까지 높아진 상황에서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갑오경장이 독립과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실패한 개혁으로 끝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급기야 1912년에는 영국·러시아가 이란을 나눠 먹기로 하는 협정을 맺고 카자르의 샤에게 승인을 강요했다. 우리의 을사늑약과도 비슷한 상황이다. 강요를 이기지 못한 샤가 결국 이를 승인하면서 이란은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과 러시아 혁명까지 터져 이란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192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레자 칸은 총리를 맡다가 1925년 의회를 조종해 새 왕조를 세웠다. 레자 칸은 레자 샤(1925~1941년 재위)로 즉위했다. 이렇게 들어선 왕조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무너진 파흘라비 왕조(1925~1979)다. 레자 칸은 1935년에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란 제국으로 바꿨다. 페르시아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온 서양의 용어라는 게 이유였다.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가 자리 잡은 파르스 지방에서 나온 이름이다. 1941년 즉위한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파흘레비 샤는 세속주의와 근대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시작해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의 근대화 조치를 했다. 1971년에는 이란 건국 2500주년 축제(고대 페르시아 제국 키루스 2세(구약성서에 고레스왕으로 등장)의 건국을 기원으로 삼음)를 페르세폴리스에서 3만 개의 텐트를 치고 열었으며, 테헤란에 ‘국왕 기념탑(이슬람 혁명 뒤 이름을 자유를 뜻하는 아저디 타워로 고침)’도 세우는 등 상징조작에 바탕을 둔 통치를 했다. 1974년에는 테헤란에서 아시안게임을 열었다. 그러나 백색혁명은 왕권 안정을 위한 국방비 증액과 인플레이션, 생필품 부족 등에 대한 국민의 불만과 이슬람 전통을 중시하는 원리주의 무슬림·민족주의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이는 이란 이슬람 혁명의 원인이 됐다. 1978년 발생한 학생 데모는 나중에 호메이니 등의 종교인들까지 가세하게 됐다. 결국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져 1979년 2월에 샤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2500년이 넘는 전통의 군주제는 사라졌다. 그 해 아야톨라 호메니이가 이란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해 지금에 이른다. 이란은 여전히 배가 고프다. 그런 이란의 꿈이 이제 여물려고 한다.
- 테헤란·이스파한·시라즈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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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에 마지막 남은 블루오션
지난 4월 21~25일 이란에 머물면서 수도인 테헤란은 물론 경제 수도로 불리는 이스파한, 고도 시라즈 등 여러 지역을 돌며 이 나라 사람들을 숱하게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원장 김성귀)이 지난 4월 23~24일 이란의 이스파한과 테헤란에서 개최한 ‘2016 한·이란 비즈니스 포럼’에서 이란인들의 경제 개발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스파한에선 한국과 교역을 희망하는 견과류와 공예품 무역업자들은 물론 자신의 아이디어를 한국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젊은 창업 희망자까지 몰렸다. 테헤란의 행사장에는 항만 개발, 해운 운항, 철도 등 해운항만물류 관계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4월 25일 테헤란에서 만난 이란의 알리 타예브니아 경제재정장관은 “연 8% 성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야심찬 경제개발 계획을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은 한국 경제가 이런 이란을 돕고 우리도 새로운 시장을 얻는 윈윈의 기회를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란은 한국 기업이 기술과 경험 등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으나 추가 시장 확보가 한계에 봉착한 조선·해운·건설·자동차 등 ‘재래식 산업’에 대한 갈망이 크다. ‘중동의 마지막 블루오션’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란은 유엔의 경제제재가 시작되기 훨씬 전인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친미 파흘레비 왕조가 무너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의 경제제재에 시달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제재도 적지 않았다. 지난해 영국 케임브리지대 석사과정에 입학한 이란 국적의 학생은 입학 몇 달 후 학교 측으로부터 ‘납부한 등록금을 돌려줄 테니 떠나라’는 통보를 받았다. 전공이 핵물리학인 것을 파악한 당국이 대학 측에 협조를 요청한 때문이었다. 2011년 이란에서 6개월 간 어학연수를 했던 한국 여학생은 같은 해 영국에 입국하면서 공항에서 30분간 꼬치꼬치 심문을 당했다. 한국인은 영국에 6개월 간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서구의 ‘이란 때리기’에 인프라·기술투자 부진
이란은 국토만 넒은 게 아니라 인구도 8000만이 넘기 때문에 항공만으로 교통 수요를 다 감당할 수 없다. 이에 따라 철도·도로 건설 수요가 널려 있다. 거기를 달릴 힘있고 성능 좋은 철도차량과 자동차도 필요하다. 이란 도시들을 질주하는 수많은 자동차도 연식이 오래된 것이 대부분이다. 국내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수입차는 수입가보다 더 많은 관세를 부가하는 탓도 있지만 기술이나 부품 교류가 원활하지 않아 좋은 차를 생산하기 힘든 탓이 크다. 이란 국영 자동차 회사인 SAIPA는 기아의 프라이드 베타를 ‘사바’라는 이름으로 면허 생산하고 있는데 인기가 좋다. 이 때문에 이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20% 이상이 사바다. 한국에서 직접 수출한 프라이드와 프라이드 베타도 도로에 널려 있다. 르노 등 프랑스와 합작으로 이란 현지에서 생산한 소형 자동차도 많이 다닌다. 이제 이런 자동차들의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상황이다.
이란이 한국에 바라는 것도 이런 것이다. 오랜 제재로 움츠렸던 경제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을 도와 달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함께하자는 것이다. 경제 교류를 둘러싼 한국과 이란 사이에 온도 차가 있는 셈이다. 이번 박 대통령의 방문에서 본 것처럼 한국은 선박·자동차·가전제품을 팔고, 현지 항만 왕래를 강화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상당수 이란인들은 ‘그 다음 단계’를 원하고 있었다. 한국의 과학기술을 흡수해 한국과 같은 고도 산업국가로 가겠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란 방문 중 현지 학자와 공무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단어 중 하나가 ‘지식기반산업’일 정도였다.
이란 경제재정장관 “자동차산업 협력 가장 필요”
이스파한대 기업가 정신학과(경영학과에 해당)의 모하마드 바르자니 교수는 “이란은 오랜 제재로 경제가 힘들어지면서 두뇌가 해외로 유출돼 심각한 문제를 겪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젊은이들에게 일자리와 함께 앞으로 선진국으로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란 인구의 60%는 30세 이하 청년으로, 이들은 대부분 무상에 가까운 교육 혜택을 입어 과학과 기술을 제대로 공부한 우수 인력”이라고 소개했다. 이란의 최고 자원은 석유와 가스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다. 그는 “세계적인 수준의 한국 휴대전화나 가전제품·자동차를 완제품으로 들여오는 시장이 되기보다, 이란에서 개발·제조해 주변 지역에 수출하는 고도산업 국가로 거듭나고 싶다”고 희망했다. 이스파한대 국제경제소장인 코마일 타예비 교수는 “이란은 야망이 있는 나라”라며 “유엔 제재 해제를 계기로 오일달러에다 그간 양성한 과학·기술·통상 인력, 지정학적 위치 등 나라의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지역의 새로운 경제강국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테헤란의 샤히드 베헤슈티 대학의 아바스 아랍 마자르 교수는 “MENA(중동북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카프카스 지역으로 이어지는 길목인 이란에 투자하면 인구 8000만의 이란은 물론, 총 4억에 이르는 주변 지역에서 쉽게 마케팅을 할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테헤란대 대학원 국제경영학과에 다니는 한국인 유학생 이은솔씨는 “이란에는 고대와 중세의 역사와 문화를 살필 수 있는 관광 인프라가 풍부한데다 국민이 친절하고 치안이 안정돼 앞으로 관광 붐도 기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소비자들의 수요가 많은 질 좋은 의약품과 의료기기도 진출이나 합작생산을 추진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골레스턴 궁전에서 이란의 오랜 염원 확인
이란이 이러한 야심찬 계획을 과감하게 추진하는 데는 오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지난 3월 25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있는 골레스턴 궁전에서 이란의 오랜 염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란 대법원 부근에 있는 이 궁전은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 되고 역사적인 유적이다. 과거 진흙과 짚으로 만든 테헤란 성벽에 둘러싸였던 유서 깊은 장소다. 성벽은 사파비 왕조(1502~1736)의 타흐마스프 1세 때 만든 것이다. 그 뒤 잔드 왕조의 카림 칸(1750~1779)이 수리했다. 이후 카자르 왕조(17 94~1925)의 아가 모하마드 칸(17 42~1797)이 테헤란을 수도로 삼으면서 이 궁전을 왕조의 중앙 궁전으로 삼았다. 1865년 다시 지어지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골레스턴은 ‘장미의 나라’라는 뜻이다. 이름대로 장미를 비롯한 수많은 꽃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정원이 한가운데에 널찍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궁전에서 가장 사람이 많이 찾는 곳은 대관식장이다. 이란의 마지막 왕조로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몰락했던 파흘레비 왕조(1925~79) 시절에 이 궁전은 왕실의 리셉션장으로 사용됐다. 왕조의 공식 거처는 니아바란 궁전이지만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행사와 연회는 이곳에서 열었다. 하를레비 왕조의 초대 군주였던 레자 샤(1925~41)는 골레스턴 궁전의 대리석 대관식장에서 대관식을 열었다. 그의 아들이자 왕조의 마지막 군주였던 모하마드 레자 파흘레비(1941~79)는 이 궁전의 뮤지엄 홀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지금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장소다.
곳곳의 건물에는 18~19세기 이란의 공예품과 유럽의 선물로 가득 찼다. 유럽의 흉내를 낸 근대적인 회화와 동양과 유럽의 도자기 방, 거울 방 등이 줄줄이 보였다. 거울의 방과 도자기의 방에서 만난 네덜란드 여성 여행객은 “서구의 궁전과 하나 차이가 없다”며 “머나먼 이란의 테헤란까지 와서 서구 문물의 흔적을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네덜란드의 도자기 주산지인 이야기를 꺼내며 환담을 나눴다.
거울과 도자기는 당시 유럽 왕실의 부를 상징하는 값진 장식물이었다. 일본과 중국에서 이를 수입하느라 은이 너무 많이 유출되자 독일 작센의 군주는 마이센 지역에서 자체 도자기를 개발하게 했다. 도자기 무역으로 부를 일궜던 네덜란드인들은 델프트라는 도시에서 우아한 델프트 자기를 자체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고가품의 수입 대체를 노린 것이다. 이 때문에 왕실의 값비싼 도자기 선호는 국민의 눈에 곱게 보이지 않았다. 테헤란의 궁전에서 당시로선 엄청난 값이었을 도자기로 장식한 방을 구경한 유럽인으로선 묘한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란이 19세기 서구 문물을 제대로 받아 들여 국가의 위신을 높이려고 시도했던 흔적이다. 이 궁전은 이란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곳이다. 이란이 영국과 러시아 같은 외세의 침략에 시달리는 바람에 근대화와 발전, 반영의 기회를 놓쳤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다. 이곳을 왕실의 중전으로 삼았던 카자르 왕조는 내내 외세에 시달렸다.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계 카자르족의 아가 모하마드가 일시 이란을 지배한 잔드 왕조의 카림 칸이 세상을 떠나자 1794년에 독립하면서 창건한 왕조이다. 테헤란에 수도를 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왕조 초기에는 러시아의 침입을 물리치고 한때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판도를 넓히는 등 세력을 떨쳤다. 그러면서 서구 열강과 외교 관계를 맺고 서구 문물을 들여오려고 애썼다. 이를 통해 근대화를 이뤄 이란을 부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다. 골레스턴 궁전에 이란 고유의 문물보다 서구 문물의 흔적이 더 많이 보이는 이유다.
골레스턴 궁전에 서구 문물이 많은 이유는
이에 따라 이란의 근대화 과정에선 유럽 열강에 대항하는 민중항쟁이 줄을 이었다. 1890년 담배 전매권이 영국인의 손에 넘어가자 민중은 ‘담배 불매 운동’을 폈다. 불매 운동은 민족자결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됐다. 돈을 모아 나라 빚을 갚자는 한국의 국채보상운동과 비슷한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무능했으며 이란은 먼저 근대화를 이룬 열강을 당할 수 없었다. 결국 영국은 이란 동북부의 아프가니스탄과 동남부 발루치스탄과 시스탄 지역에, 러시아는 이란 서북부의 캅카스 지방에 각각 세력을 형성했다. 이란은 제국주의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다.
그 후 일부 종교 세력이나 소수 민족 등에 의한 민족해방운동이 벌어졌으나 열강에 진압됐다. 그러자 카자르의 군주 모자파르 알딘 샤(1896~1907 재위)는 1906년에 페르시아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립해 입헌군주제를 추진했다. 1905년 테헤란에서 물가 폭등 사태가 벌어지자 민중의 저항이 심화되고 그 해 12월부터 제헌 운동이 확산됐다. 결국 입헌파들은 1906년 8월 알딘 샤로부터 입헌 조서를 받아내고 그 해 10월 제헌의회를 구성해 12월 헌법을 만들었다. 정치 체제부터 개혁해 근대화를 이루자는 것이다.
제국주의 열강은 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세상을 떠난 알딘 샤를 이어 아들 모하마드 알리 샤(1907~1909 재위)가 즉위하면서 이란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됐다. 하지만, 알리 샤는 헌법이 이슬람법에 어긋난다는 주장을 하며 이를 무효화하고 의회를 해산하면서 전제군주제의 부활을 시도했다. 의회에 포격을 가하고 영국과 러시아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나라는 내전 상황에 접어들었다. 결국 테헤란은 헌법수호파 군인들이 점령하고 1909년 6월 새로 구성된 의회는 압도적인 투표로 알리 샤의 폐위를 결정하고 대신 그의 9살 난 아들인 아마드 샤가 즉위했다. 알리 샤는 해외로 망명해 이탈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입헌혁명이라고 부른다.
입헌혁명을 통한 근대화 시도는 1911년 러시아 제국의 무력 간섭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정지하면서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열강에 경제적 의존까지 높아진 상황에서 개혁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갑오경장이 독립과 근대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실패한 개혁으로 끝난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급기야 1912년에는 영국·러시아가 이란을 나눠 먹기로 하는 협정을 맺고 카자르의 샤에게 승인을 강요했다. 우리의 을사늑약과도 비슷한 상황이다. 강요를 이기지 못한 샤가 결국 이를 승인하면서 이란은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태가 됐다. 여기에 제1차 세계대과 러시아 혁명까지 터져 이란은 혼란에 빠졌다. 그 와중에 192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레자 칸은 총리를 맡다가 1925년 의회를 조종해 새 왕조를 세웠다. 레자 칸은 레자 샤(1925~1941년 재위)로 즉위했다. 이렇게 들어선 왕조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무너진 파흘라비 왕조(1925~1979)다. 레자 칸은 1935년에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 제국에서 이란 제국으로 바꿨다. 페르시아가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온 서양의 용어라는 게 이유였다. 페르시아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가 자리 잡은 파르스 지방에서 나온 이름이다. 1941년 즉위한 그의 아들 모하마드 레자 파흘레비 샤는 세속주의와 근대화 정책을 밀고 나갔다. 1963년부터 백색혁명을 시작해 토지개혁·여성참정권 부여 등의 근대화 조치를 했다.
2500년 전통의 군주제 역사 속으로
- 테헤란·이스파한·시라즈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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