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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모스크바를 맛보다

런던에서 모스크바를 맛보다

금융위기 이후 해외로 눈돌린 러시아 레스토랑업자들,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영국인 입맛 사로잡아
러시아 출신 사업가 레오니드 슈토프가 런던에 문을 연 레스토랑 ‘밥 밥 리카드(BBR)’.
러시아인이 영국 런던을 접수하고 있다. 고급 부동산이나 프리미어 리그 축구팀이 아니라 음식과 술에 관한 얘기다. 최근 런던에 레스토랑을 연 사업가 중 다수가 러시아 출신이다. 그들이 운영하는 혁신적인 레스토랑은 경쟁이 치열한 런던 요식업계에서 인기 주자로 떠올랐다.

이들 레스토랑은 대체로 러시아 음식을 팔지 않지만 예외적인 경우가 더러 있다. 모스크바 출신의 요리사 겸 음식비평가 알렉세이 지민이 지난 4월 런던 소호 지역의 프리스 거리에 문을 연 ‘지마’가 그런 예다. 지마는 러시아 길거리 음식을 전문으로 한다. 하지만 사실상 러시아에는 길거리 음식이 없다. 러시아인은 추운 날씨 탓에 거의 일년 내내 실내에서 식사하는 걸 좋아한다.

퉁퉁한 몸매에 텁수룩한 붉은색 턱수염으로 톨스토이 시대의 지주 같은 인상을 주는 지민은 “요즘 런던에 새로 생긴 최신 유행의 에스닉 푸드(ethnic food, 이국적인 음식) 레스토랑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러시아의 특색이 살아 있는 식당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일례로 지마의 클럽 샌드위치는 조지아식 매운 치킨 타바카(프라이팬에 구운 닭)와 소금에 절인 오이를 넣어 만든다. 또 펠미니(러시아식 만두)에는 사슴고기를 넣고 연어찜에는 스위트 비트와 사워 크림을 곁들이며 청어는 배와 함께 내놓는다.이 식당에서는 또 진짜 블랙 오시에트라 캐비어를 원하는 만큼 주문해 먹을 수 있다. g당 1파운드(약 1700원)로 값도 비교적 싸다. 깡통에 든 제품처럼 저온에 살균된 것이 아니라 소금에 살짝 절인 신선한 ‘말로솔’ 캐비어다. 블리니(러시아식 팬케이크)는 사워 크림과 감자를 곁들여 양철 접시에 담아 낸다.

모스크바 출신의 요리사 알렉세이 지민이 운영하는 ‘지마’는 러시아 길거리 음식을 전문으로 한다.
지마는 옛 소련 시절 보드카와 오픈 샌드위치를 팔던 스탠드업 바에서 아이디어를 따왔다고 알려졌다. 주말 밤이면 시끌벅적한 주류밀매점 같은 분위기가 난다. 후추와 크랜베리부터 홀스래디시와 갈매나무, 커리 잎까지 각종 재료를 혼합한 다양한 보드카 칵테일을 판다. 커리 보드카의 맛은 (인도와 러시아) 두 문화가 충돌을 일으킨 듯 부자연스런 느낌을 줬다.

지마는 값싸고 발랄한 분위기인데 반해 버클리 광장 근처의 ‘노비코프’는 싸구려 손님을 상대하는 곳이 아니다. 미니멀리즘 양식의 실내장식이 돋보이는 이 레스토랑의 음식은 국제적이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면 아시아관, 오른쪽으로 돌면 이탈리아관, 곧장 가면 고상한 라운지바가 나온다. 모스크바 레스토랑업계의 거물 아르카디 노비코프가 4년 전 문을 연 1765㎡의 이 대형 식당은 연간 매출이 2500만 파운드(약 428억원)를 웃돈다고 알려졌다.억만장자 손님들을 끌어 모으는 매력은 화려한 외관뿐이 아니다. 아시아관의 음식은 완성도가 매우 높다. 푸른 바다의 맛을 가득 품은 랑구스틴 타르타르, 감칠맛이 풍부한 곰치 요리, 너무 신선해서 입 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방어 카르파초(날고기나 날생선을 얇게 썰어 소스를 얹은 요리) 등등. 노비코프는 또 ‘농장에서 식탁까지’를 모토로 삼아 주방에서 쓰는 농산물 대부분을 서포크 지방의 레이븐햄 근처에서 직접 재배한다. 노비코프 런던의 웹사이트에는 호화스런 ‘개인 비행기용 및 테이크어웨이 메뉴’가 소개돼 있다. 마블링이 기막힌 호주산 와규 스테이크(72파운드)와 시칠리아산 새우 요리(67파운드) 등이다.

‘노비코프’는 아시아관(왼쪽)과 이탈리관으로 분리됐으며 화려한 외관만큼 음식의 완성도도 매우 높다.
노비코프는 모스크바에 고급 레스토랑 50개를 소유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독특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체인에 속한 레스토랑 50개를 더 갖고 있다. 런던에서는 현재 3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는데 노비코프는 런던 진출 이유를 “세계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레스토랑 시장 중 하나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금융위기는 레스토랑업자의 해외 진출을 부추겼다. 모스크바의 또 다른 레스토랑 대기업 ‘긴자 프로젝트’는 6년 전 러시아 대형 레스토랑 중 최초로 해외에 진출했다. 옛 소련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레스토랑 체인 ‘마리 바나’의 지점을 미국 뉴욕과 워싱턴, 로스앤젤레스에 열었다. 이 레스토랑에서는 옛 소련의 공동아파트를 떠올리는 실내장식에 할머니들이 만들던 러시아 전통 음식을 판다. 2012년엔 런던에도 지점을 열었는데 윌리엄 영국 왕세손 부부가 이곳에서 보르시치(비트로 만든 수프)를 먹는 장면이 목격되기도 했다.

2014년 이후 루블화의 가치와 더불어 러시아인의 구매력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면서 모스크바의 고급 레스토랑업계에 큰 타격을 줬다. 이런 상황은 레스토랑업자의 해외 진출을 한층 더 부추겼다. 노비코프는 런던과 뉴욕, 두바이로 사업을 확장했다. 2005년 안드레이 델로스가 5500만 달러를 들여 설립한 모스크바의 호화 레스토랑 ‘투란도트’도 올해 런던으로 사업을 확장한다. 고급 주택가인 메이페어 지역의 버클리 거리에 ‘카페 푸시킨’(러시아 귀족의 궁전으로 불린다)과 함께 문을 연다.

러시아의 불안정한 사업 환경도 러시아 레스토랑들의 해외 진출 증가에 한몫했다. 얼마 전 모스크바의 광고업체를 매각하고 런던으로 이주해 레스토랑을 연 레오니드 슈토프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많은 레스토랑업자가 안정적인 사업을 위해 외국에서 기반을 닦고 싶어 한다. 러시아에서 이미 최고 위치에 오른 그들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슈토프가 런던에 문을 연 레스토랑 ‘밥 밥 리카드(BBR)’는 소호 지역의 골든 스퀘어 근처에 있다. 미국의 고급 레스토랑과 1930년대 풀먼 기차 식당칸을 합쳐놓은 듯한 묘한 분위기다. 테이블마다 원뿔형 램프와 놋쇠로 된 가로대가 설치됐고 ‘샴페인을 원하시면 눌러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은 단추가 있다. 밝은 핑크색과 녹색의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 덕분에 식당 안은 마치 테리 길리엄 영화에 나오는 파티장처럼 보인다. 음식은 러시아식과 영국식을 혼합한 퓨전이며 훌륭한 와인을 저렴하게 판매한다. 소매가가 52파운드인 ‘레제르브 드 레오빌 바르통’ 와인을 82파운드의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한다.

“BBR은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고 슈토프는 말했다. “최고급 레스토랑 시장에서는 검증된 공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걸 시도하는 데 따르는 위험이 더 크다. 따라서 대다수 업자들은 그런 모험을 하려 들지 않는다.” 슈토프의 다음 프로젝트는 내년 런던에 문을 여는 ‘밥 밥 익스체인지’다. 리처드 로저스가 설계한 레든홀 빌딩(‘치즈 강판’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에 자리 잡는다.러시아 레스토랑업자들이 런던에서 성공을 거두는 비결은 영국인 사업가들이 엄두도 못 내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데 있다. 러시아 휴대전화 재벌 예브게니 치치바르킨이 2012년 메이페어에 문을 연 와인 상점 겸 바 ‘헤도니즘 와인스’(이하 헤도니즘)가 그런 예다. 이곳은 ‘베리 브러더스’나 ‘저스터리니 & 브룩스’ 같은 웨스트엔드의 구식 와인 매장과는 딴판이다. 헤도니즘의 바닥은 유리로 됐으며 거목의 그루터기를 깎아 만든 의자와 와인 잔으로 이뤄진 샹들리에가 눈길을 끈다. 봉제완구가 갖춰진 어린이 놀이공간도 있다. 치치바르킨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당시 와인 사업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었다고 털어놨다.

“1990년대 사업을 하던 러시아인 대다수는 이제 본국에서 더는 필요치 않은 존재가 됐다”고 치치바르킨은 말했다(그의 패션 스타일은 메이페어의 잘 나가는 사업가라기보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해변의 서퍼처럼 보인다). “기업인이 러시아 정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는 심정을 이해한다. 러시아에서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도둑 정치를 한다.”

영국에서 사업을 하는 모든 러시아 기업인이 그렇듯이 치치바르킨도 런던 도심에서 사업체를 설립할 때 지켜야 할 규정이 너무 많은 데 놀랐다. “하지만 영국은 개인의 재산을 존중하고 법으로 움직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괜찮다”고 그는 말했다.

헤도니즘은 개업 첫 해에 와인 잡지 ‘디캔터’에서 ‘올해의 런던 와인상’으로 선정됐다. 다양한 와인을 구비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헤도니즘에서 판매하는 최고급 와인 중 ‘샤토 디켕’ 1811년산은 병당 가격이 9만8000파운드(약 1억6500만원)다.

모스크바의 사업가 미하일 젤만이 운영하는 런던의 ‘버거 & 랍스터’ 체인도 혁신적이다. 이 업체는 상점의 이름과 같은 메뉴(버거와 랍스터, 랍스터 롤)를 균일가 20파운드에 판다. 젤만은 전문화가 새로운 레스토랑의 나아갈 길이라는 취지의 ‘단일 상품 선언서(mono-product manifesto)’까지 썼다. 옛 소련 시절처럼 메뉴 선택의 자유가 제한된 이 식당 앞에 런던 사람들이 줄을 선다.

젤만의 ‘글로벌 크래프츠맨 그룹’은 요즘 버거 & 랍스터 13개 매장에서 매일 5000마리가 넘는 랍스터를 판매한다. 물량을 대기 위해 캐나다의 랍스터 양식장도 사들였다. 그가 운영하는 스테이크와 자이언트 킹 크랩 전문 레스토랑 그룹에는 ‘굿먼’ 스테이크 하우스와 ‘스맥 랍스터 롤’ ‘렉스 & 마리아노’ ‘젤만 미츠’ ‘비스트’ 등이 있다.

“굿먼을 개업할 당시만 해도 런던 사람들이 ‘스페인 오븐에서 요리하고 러시아인이 날라다 주는 미국산 고기’를 먹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젤만은 말했다. “세계화의 긍정적인 효과다. 현대 런던의 강점은 영국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엉뚱한 아이디어를 들고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사실이다.”

- 오웬 매튜스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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