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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4) 앤드루 카네기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4) 앤드루 카네기

앤드루 카네기는 조지프 슘페터가 말한 ‘혁신의 기업가’로서 자신이 창업한 ‘카네기 철강’을 미국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키웠다. 존 매이너드 케인즈가 말한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에 따라 과감한 투자로 기업을 일군 도전적인 기업가이기도 했다.
‘철강왕’ 카네기는 최고의 기업을 지향해 생전에 미국 사상 최대의 부를 쌓았고, 전 제산의 90%를 기부해 사회발전에 쓰게 함으로써 기부문화의 문을 열었다. / 중앙포토·채인택
앤드루 카네기(1835~1919)는 흔히 ‘철강왕’이라는 애칭으로 유명하다. 19세기 후반 미국의 철강 산업을 엄청난 규모로 성장시킨 주역이다. 그가 세운 카네기 철강은 미국에서 가장 집중적이고 통합된 형태의 철강업체가 됐다. 카네기 철강은 미국이 후발 산업혁명을 주도하는 동안 큰 성장을 이뤘다. 영국에 뒤질세라 19세기 들어 프랑스·독일·미국 등이 뒤늦게 산업혁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철은 필수 자원이었다. 카네기는 이를 기회로 삼아 사업의 성공과 부의 축적에 성공했다. 지금으로 보자면 디지털 혁명을 주도한 셈이다. 달리 말하면 카네기 철강이 ‘산업의 밥’인 철강을 순조롭게 공급함으로써 후발국가인 미국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카네기 철강이 지나치게 커지자 미국 정부는 반독점법을 적용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카네기가 지극히 정당하고 합법적인 경영을 했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1901년 자신의 회사를 당대 최고의 금융인 JP 모건에 4억8000만 달러에 넘겼다. 이 회사는 모건의 손으로 US스틸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해 오랫동안 미국 최대의 철강업체로 군림했다. 당시 14억 달러의 투자를 받아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10억 달러가 넘는 ‘빌리오네어 회사’가 됐다. 산업과 자본의 시너지였다. 카네기의 개인 재산은 만년에 4억7500만 달러를 넘었다. 이는 당시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0.6%에 해당했다. 이는 현재 가치로는 3720억 달러에 이른다. 포브스는 카네기를 인류 역사상 4위, 미국 사상 1위의 부자로 선정했다.
 포브스 선정 인류 역사상 4위, 미국 사상 1위 부자
카네기의 기부로 세워진 카네기 멜론대와 카네기에게 헌정된 미국 국립성당의 스테인드글래스.
카네기는 이 재산을 아낌없이 세상에 기부했다. 미국과 영국의 기업인 기부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수많은 사람이 그를 따랐다. 그는 미국 기업인과 부자의 기부문화를 만든 주인공이다. 카네기는 생애 마지막 18년 동안 자선단체·공익재단·대학 등에 3억5000만 달러를 기부했다. 2015년 가치로 786억 달러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재산의 90%에 이르는 돈을 내놓았다. 그는 다양한 곳에 기부해 세상이 따뜻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바쳤다.

카네기는 기부도 전략적으로 했다. 단순히 돈을 뿌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돈으로 뭔가 사회와 인류를 위해 필요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하는 방향으로 기부활동을 했다. 시작 단계에서부터 뚜렷한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지속가능한 기부를 했다. 지역도서관, 세계평화, 교육, 과학연구 등에 나눠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으로 카네기홀을 건립했으며 뉴욕의 카네기 협회를 세웠다. 국제평화를 위한 카네기협회, 카네기 교육진흥재단, 스코틀랜드 대학을 위한 카네기 재단, 카네기 영웅 펀드, 카네기 멜론 대학, 피츠버그의 카네기 박물관 등을 세웠다. 카네기는 돈이 아닌 이름과 명예로 남았다.

기부는 1919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쉬지 않고 계속됐다. 그가 세상을 떠날 때 개인적으로 남긴 재산은 3000만 달러 정도였다. 이 역시 적지 않은 액수지만 그가 평생 쌓은 재산에 비하면 10%도 되지 않는 것이었다. 카네기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돼 세상을 떠났다. 카네기는 그가 1889년에 쓴 ‘재산이라는 복음’이라는 글에서 부자들에게 재산을 사회를 개선하는 데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그의 행동과 호소는 미국 사회에서 기부를 일상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부자는 거액의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격언이 여기서 비롯됐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재산의 90%를 기부하고 맞은 카네기의 죽음보다 더욱 극적인 것이 그의 삶이다. 카네기는 영국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 1세다. 기업인으로서 카네기도 미국 산업 역사에서 선두를 다툴 정도로 중요하다. 지금으로 따지면 빌 게이츠에 스티브 잡스를 합친 정도의 인물이다. 창의적인 산업을 개척해 이를 엄청난 규모로 키웠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적인 산업국가의 반열에 올라서는 데 기여했다. 기업가가 자신의 나라를 번영하는 나라로 만드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경우의 하나다. 국가라는 공동체의 번영에는 기업가의 끊임없는 노력과 집념, 그리고 혁신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카네기는 스코틀랜드 출신이다. 스코틀랜드 노동자의 아들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 1707년 연합법을 함께 제정해 나라를 서로 합쳤다. ‘그레이트 브리튼(GB)’의 탄생이었다.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도 합병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가 추진해 오던 국제 교역과 식민지 개척에 함께 참여해 경제적 이익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합병에 따라 스코틀랜드에선 전통의 부족(클랜) 제도가 해체됐다. 부족장들은 토지 소유주로 신분이 바뀌어 부족을 통솔할 필요가 없게 됐다. 잉글랜드처럼 대토지 소유제가 스코틀랜드에서도 일상적이 됐다. 그 여파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농민들이 농장에서 대거 이탈했다. 이들은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됐다. 영국 산업혁명의 원동력 역할을 했던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19세기 영국 노동자들의 삶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카네기가 1835년 스코틀랜드 동부의 던펄린에서 태어날 무렵도 그랬다.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글로벌 제국으로 성장했지만 노동자들은 가난했다. 던펄린은 현재 인구 5만 정도의 소도시다. 노동당 소속인 고든 브라운 전 영국 총리의 지역구가 던펄린 이스트다. 카네기의 아버지는 이 도시에서 섬유 노동자로 일했다. 카네기의 어머니는 살림을 도우려고 작은 상점을 운영했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카네기의 부모는 찢어지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이민을 선택했다. 13살이던 1848년 카네기는 부모와 함께 미국에 도착해 산업도시인 피츠버그에 정착했다.

미국이라고 해서 사정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어린 카네기는 교육을 받는 대신 일을 해야 했다. 방직공장 보조공으로 시작해 노동자를 거쳐 증기기관을 돌보는 기관조수로 일했다. 전보배달원으로 일하다 전신기사로 승격한 것이 그가 처음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것이었다. 1850년 카네기는 오하이오 전신회사의 피츠버그 사무소의 전보배달부가 됐다. 주급 2달러 50센트를 받았다. 작은 수입에도 그는 신명을 다해 일했다. 전보배달을 가야 하는 피츠버그에 있는 기업의 위치와 주요 인사의 얼굴을 거의 다 외우고 다녔을 정도였다. 머릿속에 피츠버그 지도를 담고 다녔다. 이를 통해 그는 수많은 사람과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었다. 그가 정보배달부로 일한 지 1년 만에 전신기사로 승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카네기가 전신기사로 일할 무렵 인생의 전기가 다가왔다. 제임스 앤더슨이라는 예비역 대령이 일하는 소년을 위해 토요일 밤에 개인 도서관의 문을 연 것이다. 대령은 자신의 장서 400권을 청소년을 위해 내놨다. 카네기는 이 도서관의 최다 이용객이 됐다. 그는 수많은 책을 빌려 읽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경제에 대한 상식을 넓히는 한편 지성과 문화적 감각도 익힐 수 있었다. 카네기는 가난 때문에 제대로 교육을 받지도 못하고 지적이거나 문화적인 경험을 하거나 소양을 넓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책을 통해 그 중요성과 가치는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성공한 기업인이자 기부문화의 선구자인 카네기의 정신은 독서를 통해 다진 인문학적 소양에서 출발했다. 카네기는 이 도서관과 장서를 기증한 앤더슨 대령에 대해 평생 감사하며 그를 칭송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만일 재산을 모으게 되면 그 고귀한 분에게 빚졌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다른 가난한 소년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다”라고 말했다.
 독서로 인생 깨우친 카네기, 도서관 건립으로 보답
1914년 만년의 카네기. 카네기는 행복하게 은퇴했다. 기업 경영권에 집착하지 않고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났다. / 중앙포토·채인택
카네기가 가장 먼저 나섰던 기부사업이 지역도서관 건립사업이었던 것은 이러한 경험과 관련이 있다. 카네기는 1881년 고향인 스코틀랜드의 던펄린의 생가 근처에 무료 공공도서관 건립을 위해 돈을 내놨다. 1883년 완공된 ‘던펄린 카네기 도서관’은 카네기가 기부해서 건립한 첫 도서관이다. 카네기는 이를 시작으로 전 세계에 2811곳의 무료 공공도서관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

독서로 다진 품성은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줬다. 카네기는 1853년 펜실베니아 철도회사 직원이라는 더욱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펜실베니아는 철도가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한 지역이었다. 카네기는 이 회사에서 빠른 속도로 승진해 18세에 이 철도회사 피츠버그 지점의 관리자가 됐다. 카네기는 이곳에서 일하면서 기업 경영과 비용관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철도회사 창업주인 스코트의 곁에서 그의 수완을 익힐 수 있었다. 당시 미국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경영 실무였다. 카네기를 알아본 스코트, 스코트에게 열심히 경영을 배운 카네기 모두의 시너지였다. 카네기는 스코트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전보운송업과 침대차 사업 등에 투자해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이때 모은 돈이 그가 철강업에 뛰어드는 종잣돈이 됐다. 열정적인 혁신의 기업인이자 아낌없이 주는 기부가 카네기가 탄생하기까지는 뼈를 깎는 노력이 있었다. 카네기에 대해 비교적 덜 알려진 것이 그가 남북전쟁 때 큰 활약을 했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모시던 철도회사의 대표 스코트가 연방정부의 전쟁차관보가 되면서 카네기는 동부지역의 군용철도와 군용전신 분야 책임자에 임명됐다. 남북전쟁은 최초의 현대전 성격의 전쟁이었다 철도를 통한 엄청난 병력과 전쟁물자의 신속하고 효율적인 이동, 전신을 통한 신속한 정보통신이라는 두 가지 면에서 특히 그렇다. 산업과 기술의 통합이 전쟁 승리의 결정적 요인임을 일깨운 첫 전쟁이었다. 카네기는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맡았던 것이다.

 남북전쟁에 기여한 ‘엔지니어 영웅’
카네기는 워싱턴DC의 연방정부와 연결되는 전신은 모두 잘 이어지도록 조치했지만 남부연합으로 이어지는 전신은 남김없이 차단했다. 그는 전신을 통해 철로를 조정해 핵심 전력이 기차를 타고 워싱턴DC를 수비하기 위해 집결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빌런이라는 곳에서 연방군인 북군이 남부연합군인 남군에 패배하자 즉시 전신을 통해 열차를 인근으로 보내 장병이 신속하게 이동할 수 있게 지원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전신과 철도를 효율적으로 이용해 북군이 최종 승리하는 데 일조했다. 그는 남북전쟁에 기여한 ‘엔지니어 영웅’이다.

카네기는 투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투자는 경제 흐름을 파악하는 게 핵심이었다. 1864년 펜실베니아에 있는 유전에 4만 달러를 투자했는데 1년 만에 100만 달러의 수익으로 돌아왔다. 석유와 더불어 당시 미국의 대표적인 벤처산업이 철강이었다. 포함의 장갑, 대포, 포탄 등 전쟁물자는 엄청난 양의 철을 필요로 했다. 철에 대한 수요는 전쟁이 끝나도 여전했다. 수많은 산업설비와 기계에 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전부터 현대산업에서 철의 가치를 알아보고 투자를 했던 카네기는 전쟁이 끝나면서 본격적으로 강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남북전쟁 뒤 카네기는 철도회사를 떠나 자신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키스톤브리지 제작소와 유니언 철강제작소를 창업한 그는 펜실베니아 철도 인맥을 활용해 철도에 필요한 철강 제품을 납품했다. 그는 고객사인 펜실베니아 철도를 운영하는 토머스 스코트와 에드가 톰슨에게 자신의 회사 주식을 나눠줬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고객이나 사회적인 영향력이 큰 사람들에게도 비슷한 혜택을 줬다. 공동운명체로 만든 것이다. 카네기는 자신의 이익을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는 것이 더 큰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믿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큰 그림을 본 것이다.

철강업에 종사하면서 카네기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했다. 기업집중을 통해 여러 공장이 서로 연결돼 일관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든 것이 대표적이다. 고농도의 탄소를 태워 빠른 속도로 철을 생산하는 베시머 공정도 도입했다. 그 결과 강철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그는 모든 원재료 공급자들을 수직 계열화했다. 그 결과 원가를 크게 절감해 미국 철강업계의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다. 1880년에는 하루 2000t의 조간 능력으로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철강분야에서 1위에 오를 수 있었다. 1883년에는 경쟁업체인 홈스테드 철강 인수를 통해 이 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철광산과 탄광, 그리고 685km에 이르는 철도까지 함께 확보했다. 카네기는 모기업과 인수기업을 차별하지 않았다. 두 업체는 긴밀하게 협조하다 하나가 되어 시너지 효과를 추구하게 됐다. 그는 1892년 두 회사를 완전히 합치고 이름도 카네기 철강으로 바꿨다. M&A에 따른 부작용을 시너지로 바꾼 것이다.

1889년 미국의 철강생산량은 산업혁명의 원조국가인 영국을 넘어섰다. 그의 철강제국은 24시간 고로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카네기는 혁신의 철강제국을 이뤘다. 기업은 생산량을 늘렸고 노동자는 높은 임금을 받아갔다. 카네기는 기업 경영 혁신의 상징이 됐다. 1901년 61세가 된 카네기는 은퇴를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기업가 정신’을 알아본 금융인 모건에게 회사를 넘겼다. 이 거래는 미국 사상 최대의 M&A로 기록된다. 모건은 카네기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카네기 철강에 다른 주요 철강회사를 합쳐 US스틸을 세웠다. 중복되거나 필요 없는 부분을 정리했다. 이 회사는 주식공개 과정에서 자본이 몰려 세계 최초로 자본이 10억 달러가 넘는 기업이 됐다.

카네기는 행복하게 은퇴했다. 카네기 철강 연간 이익의 12배가 넘는 돈을 받은 카네기는 이를 바탕으로 여생을 기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훌륭한 기업인은 은퇴도 합리적으로 하는 법이다. 카네기는 기업인이 어떻게 은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기업 경영권에 집착하지 않고 물러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났다. 그 결과 기업은 오래오래 살고 자신은 명예를 얻었다.

채인택 - 채인택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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