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서는 ‘켈트의 호랑이’
다시 일어서는 ‘켈트의 호랑이’
최근 영화 ‘싱 스트리트’의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다녀왔다. 아일랜드 감독 존 카니(41)가 1980년대 더블린을 배경으로 만든 자전적 뮤지컬 영화다. 카니 감독은 시사회가 시작되기 전 내게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더블린의 관객이 이 영화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초조하다고 말했다.
‘싱 스트리트’는 매력적이고 희망적인 뮤지컬이다. 하지만 활기찬 오늘날의 더블린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1980년대는 더블린의 많은 젊은이가 가난과 경기침체를 피해 영국과 미국, 호주로 떠나간 암울한 시기였다.
“더블린은 1980년대와 확연히 달라졌다”고 카니 감독은 말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당시 더블린은 1950년대의 영국 같았다. 건축과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랬다. 그때까지도 교회가 학교를 운영했다. 모두가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늘날 더블린은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도시가 됐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카니 감독과 젊은 출연진(여주인공 라피나 역을 맡은 내 딸 루시도 포함됐다)이 무대로 나와 답례했다. 더블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돌아보는 게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싱 스트리트’는 ‘켈트의 호랑이’(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아일랜드를 일컫던 말) 시절 훨씬 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90년대 중반 아일랜드는 유럽연합(EU)의 투자와 부동산 거품을 바탕으로 유럽 최빈국 중 하나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거품이 꺼졌다. 2009년 1월 아일랜드의 정부 부채는 유로존에서 가장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지난번에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는 2011년 국가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아일랜드 정부 채권을 ‘투자부적격(정크)’ 등급으로 강등한 직후였다. 당시 더블린에서 살던 내 친구들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었다. 난 그 사이 더블린이 얼마나 변했는지 직접 느껴보려고 거리로 나섰다. 더블린과 아일랜드는 그때의 충격에서 서서히 헤어나오고 있었다.
이제 아일랜드는 유럽의 IT 수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구글과 페이스북, 페이팔, 마이크로소프트, 이베이의 유럽 본부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더블린에는 훌륭한 레스토랑도 꽤 있다. 런던이나 파리 등 요리의 수도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EU 각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유입된 젊은이들은 이 도시에 전에 없던 국제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예전에 낙후됐던 리피 강 북쪽의 브로드스톤 지역엔 새로운 바와 카페들이 들어서 활기가 넘쳤다. 더블린은 커피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카페 대다수가 현지인이나 외국 젊은이들에 의해 운영되며 값이 저렴하다. 캐펄 거리에 있는 ‘브러더 허버드’ 같은 인기 레스토랑들은 가격에 맞는 신선한 재료를 쓰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레스토랑의 ‘메네멘’(휘저은 페타 요거트와 구운 피망, 붉은 양파를 곁들인 터키 전통식 스크램블드 에그)은 맛이 일품이다.
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프랑스인 음식 블로거 겸 음식 투어 가이드 케티 엘리자베스가 나를 브러더 허버드로 안내했다. 엘리자베스는 켈트의 호랑이 시절 더블린에 왔다. 당초 6개월만 머물 예정이었지만 더블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눌러살게 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음식이 형편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주로 패스트푸드였고 값이 비싼 소위 ‘고급 레스토랑’도 닭고기와 연어, 소고기 등 메뉴가 뻔했다. 하지만 요즘 이곳의 레스토랑들은 현지에서 생산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엘리자베스는 이전에 성인용품점이 몰려 있던 캐펄 거리가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의 중심지가 됐다고 말했다. 브러더 허버드에서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거기서 몇 집 건너 있는 케이크점 ‘카메리노’로 나를 안내했다. 이탈리아계 캐나다인 카리나 카메리노가 2014년 말 문을 연 곳이다. 케이크와 빵이 잔뜩 쌓인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카메리노가 상점을 열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난 원래 인사 전문가로 일했는데 주말 시장에서 케이크를 구워 팔다가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현재 그녀는 직원 8명을 고용해 상점에서 파는 모든 케이크와 빵을 직접 만든다.
최근 아일랜드는 레스토랑과 음식 붐이 일면서 관광사업도 급성장했다. 요즘은 아일랜드를 찾는 관광객의 국적이 매우 다양해졌다. 30년 전 해외 관광객의 70%를 차지하던 영국인의 비율이 지금은 30%로 떨어졌다. 관광의 유형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미국인 관광객의 4분의 3이 ‘친구와 친척 방문(VFR)’을 목적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요즘은 대다수 관광객이 아일랜드에 혈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들로 교외의 친척 집에 머물기보다는 더블린의 호텔 객실 4만8000개 중 하나를 예약할 확률이 높아졌다.
더블린의 매력이 집중된 리피 강 남쪽으로 돌아와서 리버티스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때 가죽 가공업과 양모업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위스키 업체를 운영하는 잭 틸링을 만났다. 지난해 더블린에서 125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위스키 증류업체를 설립한 틸링은 이 도시가 지속가능한 경기회복을 이뤄나간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틸링의 집안은 아일랜드에서 대대로 위스키 제조업에 종사해 왔다. 그의 조상 월터 틸링은 1782년 더블린에 가문 최초의 증류주업체를 세웠다. 또 그의 아버지 존은 라우스 카운티에서 ‘쿨리 디스틸러리’를 거의 30년 동안 운영하다 2012년 미국 위스키 회사 짐 빔에 매각했다.
틸링에 따르면 현재 ‘틸링 위스키’는 증류주업체인 동시에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개업 첫해에 방문객 4만 명을 유치했다. 이곳에는 레스토랑과 시음장, 틸링 위스키와 브랜드 T셔츠, 에이프런, 휴대용 술병, 마멀레이드 등을 파는 상점이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아일랜드 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증류주였다고 틸링은 알려줬다. “하지만 1916년 부활절봉기(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한 아앨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무력 항쟁), 1919~1921년 독립전쟁, 1922~1923년 내전으로 내수시장이 약화됐다”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1920~1933년 미국의 금주령으로 위스키 산업이 심하게 위축됐다. 우린 자동차 충돌 사고를 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영국 스카치위스키협회(SWA)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세계 스카치위스키 판매량은 연간 약 9500만 상자이며 그중 4000만 상자는 미국, 2100만 상자는 캐나다에서 생산된 것이다. 아일랜드의 연간 위스키 판매량은 700만 상자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틸링은 “오늘날의 더블린을 대표하는 위스키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더블린은 하이테크가 발달한 국제적이고 세련된 도시다. 우리는 위스키를 만들 때 리피 강의 강물을 끌어다 쓴다. 진짜 더블린 물로 제대로 된 더블린 위스키를 만들고자 한다.”
카니의 말대로 더블린은 ‘싱 스트리트’의 배경이 된 예전의 그곳과는 많이 달라졌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블린에서의 마지막 저녁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펍 ‘스완’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 ‘예전의 더블린에 대해서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레이엄 보인턴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싱 스트리트’는 매력적이고 희망적인 뮤지컬이다. 하지만 활기찬 오늘날의 더블린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1980년대는 더블린의 많은 젊은이가 가난과 경기침체를 피해 영국과 미국, 호주로 떠나간 암울한 시기였다.
“더블린은 1980년대와 확연히 달라졌다”고 카니 감독은 말했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당시 더블린은 1950년대의 영국 같았다. 건축과 미학적 측면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그랬다. 그때까지도 교회가 학교를 운영했다. 모두가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오늘날 더블린은 국제적이고 다문화적인 도시가 됐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관객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카니 감독과 젊은 출연진(여주인공 라피나 역을 맡은 내 딸 루시도 포함됐다)이 무대로 나와 답례했다. 더블린 사람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돌아보는 게 불편하지 않은 듯했다.
‘싱 스트리트’는 ‘켈트의 호랑이’(1990년대 중반~2000년대 중반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아일랜드를 일컫던 말) 시절 훨씬 이전을 배경으로 한다. 1990년대 중반 아일랜드는 유럽연합(EU)의 투자와 부동산 거품을 바탕으로 유럽 최빈국 중 하나에서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발돋움했다. 하지만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거품이 꺼졌다. 2009년 1월 아일랜드의 정부 부채는 유로존에서 가장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
내가 지난번에 더블린을 방문했을 때는 2011년 국가 신용평가기관 무디스가 아일랜드 정부 채권을 ‘투자부적격(정크)’ 등급으로 강등한 직후였다. 당시 더블린에서 살던 내 친구들은 충격과 절망에 빠졌었다. 난 그 사이 더블린이 얼마나 변했는지 직접 느껴보려고 거리로 나섰다. 더블린과 아일랜드는 그때의 충격에서 서서히 헤어나오고 있었다.
이제 아일랜드는 유럽의 IT 수도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구글과 페이스북, 페이팔, 마이크로소프트, 이베이의 유럽 본부가 이곳에 있다. 그리고 더블린에는 훌륭한 레스토랑도 꽤 있다. 런던이나 파리 등 요리의 수도에 견줄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지난 몇 년 동안 EU 각국과 그 밖의 지역에서 유입된 젊은이들은 이 도시에 전에 없던 국제적인 분위기를 불어넣었다.
예전에 낙후됐던 리피 강 북쪽의 브로드스톤 지역엔 새로운 바와 카페들이 들어서 활기가 넘쳤다. 더블린은 커피 문화가 특히 발달했다. 카페 대다수가 현지인이나 외국 젊은이들에 의해 운영되며 값이 저렴하다. 캐펄 거리에 있는 ‘브러더 허버드’ 같은 인기 레스토랑들은 가격에 맞는 신선한 재료를 쓰는 데 중점을 둔다. 이 레스토랑의 ‘메네멘’(휘저은 페타 요거트와 구운 피망, 붉은 양파를 곁들인 터키 전통식 스크램블드 에그)은 맛이 일품이다.
한 친구를 통해 알게 된 프랑스인 음식 블로거 겸 음식 투어 가이드 케티 엘리자베스가 나를 브러더 허버드로 안내했다. 엘리자베스는 켈트의 호랑이 시절 더블린에 왔다. 당초 6개월만 머물 예정이었지만 더블린 남자와 사랑에 빠져 눌러살게 됐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음식이 형편없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주로 패스트푸드였고 값이 비싼 소위 ‘고급 레스토랑’도 닭고기와 연어, 소고기 등 메뉴가 뻔했다. 하지만 요즘 이곳의 레스토랑들은 현지에서 생산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데 중점을 둔다.”
엘리자베스는 이전에 성인용품점이 몰려 있던 캐펄 거리가 지금은 고급 레스토랑의 중심지가 됐다고 말했다. 브러더 허버드에서 식사를 마친 뒤 그녀는 거기서 몇 집 건너 있는 케이크점 ‘카메리노’로 나를 안내했다. 이탈리아계 캐나다인 카리나 카메리노가 2014년 말 문을 연 곳이다. 케이크와 빵이 잔뜩 쌓인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카메리노가 상점을 열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난 원래 인사 전문가로 일했는데 주말 시장에서 케이크를 구워 팔다가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현재 그녀는 직원 8명을 고용해 상점에서 파는 모든 케이크와 빵을 직접 만든다.
최근 아일랜드는 레스토랑과 음식 붐이 일면서 관광사업도 급성장했다. 요즘은 아일랜드를 찾는 관광객의 국적이 매우 다양해졌다. 30년 전 해외 관광객의 70%를 차지하던 영국인의 비율이 지금은 30%로 떨어졌다. 관광의 유형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미국인 관광객의 4분의 3이 ‘친구와 친척 방문(VFR)’을 목적으로 입국했다. 하지만 요즘은 대다수 관광객이 아일랜드에 혈연이나 지연이 없는 사람들로 교외의 친척 집에 머물기보다는 더블린의 호텔 객실 4만8000개 중 하나를 예약할 확률이 높아졌다.
더블린의 매력이 집중된 리피 강 남쪽으로 돌아와서 리버티스 지역으로 향했다. 이곳은 한때 가죽 가공업과 양모업의 중심지였다. 그곳에서 위스키 업체를 운영하는 잭 틸링을 만났다. 지난해 더블린에서 125년 만에 처음으로 새로운 위스키 증류업체를 설립한 틸링은 이 도시가 지속가능한 경기회복을 이뤄나간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틸링의 집안은 아일랜드에서 대대로 위스키 제조업에 종사해 왔다. 그의 조상 월터 틸링은 1782년 더블린에 가문 최초의 증류주업체를 세웠다. 또 그의 아버지 존은 라우스 카운티에서 ‘쿨리 디스틸러리’를 거의 30년 동안 운영하다 2012년 미국 위스키 회사 짐 빔에 매각했다.
틸링에 따르면 현재 ‘틸링 위스키’는 증류주업체인 동시에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개업 첫해에 방문객 4만 명을 유치했다. 이곳에는 레스토랑과 시음장, 틸링 위스키와 브랜드 T셔츠, 에이프런, 휴대용 술병, 마멀레이드 등을 파는 상점이 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아일랜드 위스키는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증류주였다고 틸링은 알려줬다. “하지만 1916년 부활절봉기(영국에서 독립하기 위한 아앨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무력 항쟁), 1919~1921년 독립전쟁, 1922~1923년 내전으로 내수시장이 약화됐다”고 그는 말했다. “게다가 1920~1933년 미국의 금주령으로 위스키 산업이 심하게 위축됐다. 우린 자동차 충돌 사고를 당해 절벽 아래로 떨어진 거나 다름없었다.”
영국 스카치위스키협회(SWA)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세계 스카치위스키 판매량은 연간 약 9500만 상자이며 그중 4000만 상자는 미국, 2100만 상자는 캐나다에서 생산된 것이다. 아일랜드의 연간 위스키 판매량은 700만 상자를 약간 웃도는 수준이다.
틸링은 “오늘날의 더블린을 대표하는 위스키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더블린은 하이테크가 발달한 국제적이고 세련된 도시다. 우리는 위스키를 만들 때 리피 강의 강물을 끌어다 쓴다. 진짜 더블린 물로 제대로 된 더블린 위스키를 만들고자 한다.”
카니의 말대로 더블린은 ‘싱 스트리트’의 배경이 된 예전의 그곳과는 많이 달라졌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더블린에서의 마지막 저녁 이 도시의 가장 오래된 펍 ‘스완’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시면서 ‘예전의 더블린에 대해서도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레이엄 보인턴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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