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10) 앤드루 멜런
채인택의 역사를 만든 부자들(10) 앤드루 멜런
미국에서 억만장자가 공직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일한 기록은 금융인·기업인· 투자가·자선사업가인 앤드루 멜런(1855~1937)이다. 멜런의 이력은 미국에서는 물론 전 세계 억만장자 중에서도 가장 독특할 것이다. 미국 트럼프 그룹의 회장 도널드 트럼프(70)가 2016년 11월7일 미국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하면서 기업인 출신 억만장자의 공직 참여가 많은 관심을 모은다. 미국에서는 대부호 록펠러 가문 출신으로 스탠더드 오일의 창업주인 존 록펠러의 손자인 넬슨 록펠러(1908~1979년)가 제럴드 포드 대통령 시절인 1974~1977년 부통령을 지낸 것이 트럼프 이전까지 억만장자가 가장 높은 공직에 오른 기록이다. 연방상원의원을 지낸 넬슨 올드리치의 외손자이기도 한 록펠러는 여러 차례 대선후보전에 뛰어들었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에서 억만장자가 공직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일한 기록은 앤드루 멜런(1855~1937)으로 1921년 3월 연방 재무장관 자리에 올라 1932년 2월까지 자리를 맡았다. 미국 최장수 재무장관 기록(11년 재임)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부자다. CNN머니가 2014년 발표한 ‘미국의 역사상 20대 부자’ 순위에서 현 시가 기준으로 632억 달러의 재산으로 15위에 올랐다. 그의 동생이자 그가 공직에 들어간 뒤 뒤를 이어 가업인 멜런은행을 맡았던 리처드 멜런(1858~1933)은 1030억 달러의 재산으로 역대 미국 부자 순위 5위에 올랐다.
멜런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이민자인 토머스 멜런(1813~1908)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부친 토머스는 할아버지를 따라 어려서 미국에 이민했다.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뒤 1869년 멜런은행을 창업해 멜런 가문을 상류층으로 끌어올렸다. 멜런은행은 대를 이어 멜런 가문의 부흥의 원천이 됐다. 이 은행은 2007년 뉴욕은행과 합병해 뉴욕멜런은행으로 재탄생했다.
멜런 가문은 선대가 투자했던 여러 기업의 대주주로서 지금도 여전히 막강한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 셰브론텍사코다. 1901년 설립한 걸프오일은 1985년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과 합병을 거쳐 셰브론텍사코의 일부가 됐다. 1886년부터 세계 최대 알루미늄 업체인 알코아, 1912년부터는 화학과 재료업체인 코퍼스의 대주주다. 웨스팅하우스, 하인즈, US스틸, 크레디스 위스퍼스트보스턴, GM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이 가문의 이름이 더욱 빛나는 것은 기부행위다. 멜런 가문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 수많은 걸작을 수집했다. 교육사업에도 거액을 쏟아왔다.
멜런 가문을 빛낸 이 많은 업적은 대부분 앤드루 멜런의 업적이다. 그는 1855년 3월24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웨스트펜실베이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1872년 임산물 사업을 시작해 재산을 모았다. 이듬해 대학을 마치고 부친이 창업해 운영하던 멜런은행에 들어갔으며 1882년 소유권을 이어 받았다. 1889년 유니온신탁을 설립했으며 은행경영을 넘어 석유, 철강, 조선, 건설 등 다각도로 투자 사업을 전개했다. 한결같이 당시 확장 일로에 있던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기반업종이었다. 그가 투자한 산업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 그 결과 1890년에 이르자 그는 존 록펠러, 헨리 포드와 함께 미국의 3대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부친인 토머스가 작은 은행을 창업했으면 그는 이를 미국 굴지의 거대한 대기업으로 키워 미국의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멜런은 억만장자가 된 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미국이 참전하자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벌였다. 적십자사에서도 일하며 군인과 가족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YMCA의 전국 전쟁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펜실베이니아주 국토방위위원회와 워싱턴의 전국 연구위원회에서도 일했다. 가장 두드러진 경력은 공직자로 봉사한 것이다. 바로 1921년 워런 하딩(1865~1923, 1921~23 재임) 대통령 내각에서 재무장관을 맡은 일이다. 오하이오주 하원의원을 지내다 오하이오주 부지사와 연방상원의원을 지낸 하딩은 재정과 경제 문제에는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는 산적한 경제 문제가 놓여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참전에 따른 심각한 연방정부 부채였다. 1차대전을 치른 이상주의자 우드로 윌슨(1856~1924, 1913~21 재임) 대통령에 이어 자리에 오른 하딩 대통령에게는 이 부채를 정리해야 할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게다가 1919년 금주법 시대가 열리면서 주세 수입이 완전히 끊겼다. 일부 공업용과 의료용 알코올 생산만 가능해지고 술을 양조하거나 이동, 판매하는 일이 완전히 금지되면서 이로 인한 세입마저 사라진 것이다. 주요 세원이 사라진 미국은 이를 벌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골치 아픈 재정 문제를 안고 고민하던 하딩은 기업인 출신의 멜런에게 눈을 돌렸다. 멜런은 은행가로서 오랜 경험을 국정을 위해 봉사하기로 하고 하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멜런은행을 비롯한 기업의 운영은 동생인 리처드에게 완전히 넘겼다. 자신은 이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기업가 정신과 공직자 윤리의 철저한 분리다. 트럼프가 배워야 할 점이다.
멜런은 재무장관으로서 국가가 당면한 재정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멜런은 위기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재정시스템을 바로잡기로 하고 세제 개혁부터 추진했다. 먼저 물가가 높아지는 원인이 높은 세금이라고 판단하고 물가상승을 억제하는 대안으로 감세 조치를 취했다. 멜런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자 금융인으로서 당시 정부의 예산관리 방식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미국연방정부의 재정은 정부 지출이 늘어나면 세금을 추가로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세입이 세출을 따라간 셈이다. 그 결과 정부 재정상황이 악화되기 쉬웠다.
멜런은 ‘멜런 계획’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재정 개혁 정책을 펼쳤다. 첫째, 소득세율을 최고 77%에서 24%로 낮췄다. 이를 통해 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둘째, 조세 부담자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담세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금액이라도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대신 최소 소득세율을 4%에서 0.5%로 낮췄다. 셋째, 연방 부동산세를 낮췄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재산을 다른 은밀한 영역으로 돌리는 것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넷째, 효율적인 정부 재정제도를 확립한다. 낮은 세율은 세금 공제도 줄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공무원 숫자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멜런의 아이디어였다. 정부 문서의 크기도 지갑에 들어갈 정도로 줄여 공문서 작성에 들어가는 종이와 잉크도 줄였다.
연방정부의 고정비용을 삭감하고 남은 예산을 정부 부채를 갚는 데 사용했다. 이를 통해 연방정부의 세출은 줄이고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 예산회계법을 만들어 오늘날과 같이 예산을 미리 심사하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는 미국의 예산심의 시스템이 멜런의 재무장관 시대에 확립됐다. 국내 산업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수입 상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소득세 누진률을 약화해 실질적으로 부유층에 대해 대규모 감세를 실시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내세우지만 미국 산업발전의 역사은 이런 보호무역주의가 바탕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은 특정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왔다갔다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금주법 등으로 줄어든 세수를 충족하려면 소득세를 올려야 할 텐데 멜런은 이를 낮췄다. 세금을 줄이면 저축과 투자가 늘고 이는 대기업이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 대중에게 돈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한다는 멜런의 지론 때문이었다.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대기업에 대해서는 세제우대조치까지 취했다. 이는 멜런이 신봉한 ‘낙수 이론’이 바탕이 됐다. 그는 이를 국가 경제정책에 직접 활용한 첫 인물로 통한다. 낙수 효과는 정부가 세제혜택 등으로 대기업의 성장을 지원하면 이를 통해 창출된 고용과 매출 증대 효과가 중소기업과 소비자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 중장기적으로 경기가 활기를 띠게 된다는 이론이다. 대기업이나 부유층이 기업지출이나 소비를 통해 돈을 쓰면 돈이 중소기업이나 서민층까지 넘쳐 흘러간다는 의미다. 이 정책은 공화당의 경제정책 철학으로 굳어졌다. 로널드 레이건이나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의 감세정책도 이런 논리에서 기인한다.
멜런은 이런 일련의 정책으로 미국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그가 장관이 취임할 당시 미 연방정부의 재정지출은 1920년 기준으로 65억 달러였다. 게다가 향후 2년 반 동안의 고정비용은 75억 달러로 전망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멜런은 취임 이후 3년간 고정비용을 35억 달러를 줄였다. 이를 통해 연방부채를 28억 달러나 줄였다. 이를 통해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멜런의 재정개혁은 1920년대 미국경제 황금기의 바탕이 됐다.
멜런은 1921년 3월 워런 하딩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재무장관에 오른 뒤 캘빈 쿨리지(1872~1933, 1923~1928 재임) 대통령과 허버트 후버(1874~1964, 1929~1922 재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명의 대통령 내각에서 자리를 계속 지켰다. 특히 처음 공직자로 처음 참여한 하딩의 내각에서 멜런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오하이오주 출신인 하딩 대통령은 공직 경험이나 자질이 부족한 여러 고향 친구를 워싱턴에 데려와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과거의 ‘비선 실세’를 양지에 데려와 공직에 임명한 셈이다. ‘오하이오 갱’으로 불린 이들은 부패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하딩은 포커친구였던 앨버트 폴을 불러 내무장관에 임명했으며 후원자이자 정치 브로커인 해리 도허티에게 법무장관을 맡겼다.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고위직에 발탁된 인물이 득실거린 하딩 내각에서는 부패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기금과 관련한 비리로 하딩과 친분이 있는 기금 운용인이 감옥에 가고 감사가 자살하는 스캔들이 터지는 등 하딩의 통치기는 스캔들로 얼룩졌다. 능력이 아닌 대통령과의 친분이 곧 권력이 되는 잘못된 방식의 통치가 빚어낸 결과였다. 하딩 대통령 자신도 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알코올의 개인적 소유와 소비를 금하는 금주법 시대(1919~1933)였음에도 가끔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 없이 금융재정과 관련된 능력, 자질, 경험을 바탕으로 뽑힌 멜런은 업적을 남겼다.
하딩 대통령은 1923년 8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부 지역을 돌던 중 시애틀에서 식중독을 일으켜 샌프란시스코에서 숨졌다. 부통령인 캘빈 쿨리지(1872~1933, 1923~29 재임)가 즉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멜런은 그대로 재무장관 자리를 지켰다. 변호사 출신인 쿨리지도 경제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법조인 출신답게 쿨리지는 취임하자마자 부정부패와의 전쟁에 나섰다. 전임자인 하딩과의 친분으로 자리를 차지한 내각 인사가 최우선 정리 대상이었다. 대통령의 과도한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딩의 포커친구로 내무장관을 맡았던 ‘오하이오 갱’ 앨버트 폴은 정부 소유의 석유 예비금을 민간 기업에 빌려주고 뇌물과 불법적인 특혜 융자를 받았다가 체포돼 재판 끝에 193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 수감된 최초의 미국 각료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정치 브로커 출신으로 하딩의 정치적 후원자인 법무장관 해리 도허티도 정부 재산관리와 관련된 비리로 재판을 받았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도허티는 법무장관직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더 이상 워싱턴에서 버틸 수 없었다. 법무장관 보좌관이던 제스 스미스는 증거문서를 몰래 파기한 혐의가 발각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찰스 호프스 재향군인국장은 재향군인 연금을 관리하면서 리베이트를 받은 것은 물론 금주법 시대 밀주를 만들고 마약까지 복용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의 보좌관인 찰스 그래머는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토마스 미라 체류외국인자산관리국장도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쿨리지는 이런 사정정국으로 전임 하딩 대통령이 땅에 떨어뜨린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일부 회복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멜런은 든든하게 국가 재정을 관리했다. 쿨리지에 이어 1929년 3월 대통령에 취임한 허버트 후버는 멜런 계획이 성공적이라고 보고 그를 계속 장관 자리에 유임시켰다. 하지만 그해 11월 블랙프라이데이를 시장으로 세계공황이 발생하면서 멜런은 비난에 직면했다. 멜런은 “이런 불황을 통해 낡은 체제의 부패를 일소하고 부동산 가격과 임금 등을 적정한 수준으로 재조정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가 여론의 비난역풍을 맞았다. 이 말은 대공황에 대해 후버 정권이 보여준 무책임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불황기에 부패를 청산하고 호황기의 부채를 청산한다는 그의 인식은 나중에 ‘청산주의’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멜런은 묵묵히 재정을 관리하다 1932년 2월 자리를 떠났다. 사임 뒤 그는 후버에 의해 주영국 대사로 임명돼 1년간 일한 뒤 공직에서 떠났다. 주영대사는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다.
멜런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45세이던 1900년 21세이던 노라 멕멀런(1879~1973)과 결혼했다. 영국 태생으로 유명한 기네스 양조장의 대주주인 알렉산더 멕멀런의 딸이다. 두 사람은 딸 앨리사와 아들 폴을 얻었지만 12년 만에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냈다. 노라가 영국 군인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멜런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노라는 1923년 14년 연하의 골동품 거래상인 하비 리와 재혼하면서 멜런이라는 성도 버렸지만 1928년 다시 이혼했다. 2년 뒤 노라는 아들 폴의 건의를 받아들여 멜런이라는 성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멜런은 평정을 잃지 않고 경영자로서, 공직자로서, 기부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하나의 모범이 됐다. 멜런이 투자자로서 뛰어난 점은 평생에 걸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신산업과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인 투자와 인큐베이팅에 나섰다는 점이다. 선견지명으로 가치를 알아본 산업에 미리 투자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보인 것은 이를 키워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교육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멜런은 1913년 자신의 동생인 리처드 멜런과 함께 1908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토마스를 기리는 ‘멜런 산업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와 교육을 함께 담당하는 이 연구소는 자신의 모교인 피츠버그대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1965년 이 연구소는 카네기 기술연구소와 합병해 카네기 멜런 대학이 됐다.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의 하나다. 자신의 모교인 피츠버그대에도 4300만 달러를 기부하고 동창회장과 대학발전위원장을 지냈다. 멜런은 가능성이 있는 과학기술자 양성과 함께 신종 산업의 발굴에도 신경을 쏟았다. 대표적인 것이 알루미늄 산업이다. 그는 알루미늄 제조업체인 알코아를 지속적으로 지원해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우기도 했다. 보크사이트를 전기분해해서 얻는 알루미늄은 가볍고 튼튼하며 산화에 강해 철을 대신할 수 있는 재료로 각광받고 있다. 20세기 초 독일 알루미늄 회사의 기사이던 프레드 빌름이 알루미늄에 구리 4%, 마그네슘 0.5%를 넣어 합금해서 얻은 두랄루민은 알루미늄의 가볍운 특성은 유지하면서 약점인 강도를 보완한 물질로 각광 받았다. 미국에서는 멜런의 지원으로 1931년 두랄루민 속 마그네슘을 1.5%로 보강해 더욱 강력한 초두랄루민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실리콘에도 많은 관심을 보여 대규모 투자를 하기도 했다. 초기 마모재와 미끄럼 방지제 정도로 사용됐던 실리콘은 나중에 전자 시대가 열리면서 최고의 반도체 재료로 각광받게 된다.
공직 은퇴 뒤 그는 적극적인 기부 활동에 나섰다. 특히 문화예술과 연구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에 몰두한 것이다. 멜런의 업적 중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워싱턴DC에 우뚝 서 있는 내셔널갤러리다. 그는 1937년 현금 1000만 달러를 내셔널갤러리의 건설비로 내놓은 것은 물론 자신이 모아온 미술품까지 기증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은 구입비로만 2500만 달러를 들인 것으로 기증 당시 가격이 40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 시가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것 외에는 추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는 1937년 8월27일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손들을 그를 기리는 앤드루 멜런 재단을 설립해 미래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앤드루 멜런은 기업가 정신과 공직자 윤리의 조화라는 면에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의 모범이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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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억만장자가 공직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일한 기록은 앤드루 멜런(1855~1937)으로 1921년 3월 연방 재무장관 자리에 올라 1932년 2월까지 자리를 맡았다. 미국 최장수 재무장관 기록(11년 재임)을 보유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엄청난 부자다. CNN머니가 2014년 발표한 ‘미국의 역사상 20대 부자’ 순위에서 현 시가 기준으로 632억 달러의 재산으로 15위에 올랐다. 그의 동생이자 그가 공직에 들어간 뒤 뒤를 이어 가업인 멜런은행을 맡았던 리처드 멜런(1858~1933)은 1030억 달러의 재산으로 역대 미국 부자 순위 5위에 올랐다.
멜런은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이민자인 토머스 멜런(1813~1908)의 아들로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부친 토머스는 할아버지를 따라 어려서 미국에 이민했다.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뒤 1869년 멜런은행을 창업해 멜런 가문을 상류층으로 끌어올렸다. 멜런은행은 대를 이어 멜런 가문의 부흥의 원천이 됐다. 이 은행은 2007년 뉴욕은행과 합병해 뉴욕멜런은행으로 재탄생했다.
멜런 가문은 선대가 투자했던 여러 기업의 대주주로서 지금도 여전히 막강한 경제적·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업이 세계 최대의 석유회사인 셰브론텍사코다. 1901년 설립한 걸프오일은 1985년 캘리포니아스탠더드오일과 합병을 거쳐 셰브론텍사코의 일부가 됐다. 1886년부터 세계 최대 알루미늄 업체인 알코아, 1912년부터는 화학과 재료업체인 코퍼스의 대주주다. 웨스팅하우스, 하인즈, US스틸, 크레디스 위스퍼스트보스턴, GM의 대주주이기도 하다. 이 가문의 이름이 더욱 빛나는 것은 기부행위다. 멜런 가문은 미술에 조예가 깊어 수많은 걸작을 수집했다. 교육사업에도 거액을 쏟아왔다.
멜런 가문을 빛낸 이 많은 업적은 대부분 앤드루 멜런의 업적이다. 그는 1855년 3월24일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웨스트펜실베이니아대에 재학 중이던 1872년 임산물 사업을 시작해 재산을 모았다. 이듬해 대학을 마치고 부친이 창업해 운영하던 멜런은행에 들어갔으며 1882년 소유권을 이어 받았다. 1889년 유니온신탁을 설립했으며 은행경영을 넘어 석유, 철강, 조선, 건설 등 다각도로 투자 사업을 전개했다. 한결같이 당시 확장 일로에 있던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기반업종이었다. 그가 투자한 산업 분야는 급속한 성장을 이뤘다. 그 결과 1890년에 이르자 그는 존 록펠러, 헨리 포드와 함께 미국의 3대 부자에 이름을 올렸다. 부친인 토머스가 작은 은행을 창업했으면 그는 이를 미국 굴지의 거대한 대기업으로 키워 미국의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멜런은 억만장자가 된 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미국이 참전하자 활발하게 사회활동을 벌였다. 적십자사에서도 일하며 군인과 가족을 돕는 일에 몰두했다. YMCA의 전국 전쟁위원회에서도 활동했다. 펜실베이니아주 국토방위위원회와 워싱턴의 전국 연구위원회에서도 일했다.
기업가 정신과 공직자 윤리의 철저한 분리
골치 아픈 재정 문제를 안고 고민하던 하딩은 기업인 출신의 멜런에게 눈을 돌렸다. 멜런은 은행가로서 오랜 경험을 국정을 위해 봉사하기로 하고 하딩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멜런은행을 비롯한 기업의 운영은 동생인 리처드에게 완전히 넘겼다. 자신은 이후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기업가 정신과 공직자 윤리의 철저한 분리다. 트럼프가 배워야 할 점이다.
멜런은 재무장관으로서 국가가 당면한 재정 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멜런은 위기적인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재정시스템을 바로잡기로 하고 세제 개혁부터 추진했다. 먼저 물가가 높아지는 원인이 높은 세금이라고 판단하고 물가상승을 억제하는 대안으로 감세 조치를 취했다. 멜런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자 금융인으로서 당시 정부의 예산관리 방식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당시 미국연방정부의 재정은 정부 지출이 늘어나면 세금을 추가로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세입이 세출을 따라간 셈이다. 그 결과 정부 재정상황이 악화되기 쉬웠다.
멜런은 ‘멜런 계획’으로 불리는 대대적인 재정 개혁 정책을 펼쳤다. 첫째, 소득세율을 최고 77%에서 24%로 낮췄다. 이를 통해 투자가 증가할 것으로 기대했다. 둘째, 조세 부담자의 범위를 넓혔다. 그는 ‘담세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은 최소한의 금액이라도 세금을 내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적용했다. 대신 최소 소득세율을 4%에서 0.5%로 낮췄다. 셋째, 연방 부동산세를 낮췄다. 부자들이 세금을 피해 재산을 다른 은밀한 영역으로 돌리는 것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넷째, 효율적인 정부 재정제도를 확립한다. 낮은 세율은 세금 공제도 줄이기 때문에 이를 위한 공무원 숫자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이 멜런의 아이디어였다. 정부 문서의 크기도 지갑에 들어갈 정도로 줄여 공문서 작성에 들어가는 종이와 잉크도 줄였다.
연방정부의 고정비용을 삭감하고 남은 예산을 정부 부채를 갚는 데 사용했다. 이를 통해 연방정부의 세출은 줄이고 세금을 줄일 수 있었다. 예산회계법을 만들어 오늘날과 같이 예산을 미리 심사하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오늘날 글로벌 스탠더드가 되는 미국의 예산심의 시스템이 멜런의 재무장관 시대에 확립됐다. 국내 산업을 지키기 위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해 수입 상품에 대해 고율의 관세를 부과했다. 소득세 누진률을 약화해 실질적으로 부유층에 대해 대규모 감세를 실시했다. 미국은 자유무역을 내세우지만 미국 산업발전의 역사은 이런 보호무역주의가 바탕이 됐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자유무역과 보호무역은 특정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정치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익을 위해 얼마든지 왔다갔다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낙수 이론’을 국가 경제정책에 처음 활용
멜런은 이런 일련의 정책으로 미국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그가 장관이 취임할 당시 미 연방정부의 재정지출은 1920년 기준으로 65억 달러였다. 게다가 향후 2년 반 동안의 고정비용은 75억 달러로 전망되고 있던 상황이었다. 멜런은 취임 이후 3년간 고정비용을 35억 달러를 줄였다. 이를 통해 연방부채를 28억 달러나 줄였다. 이를 통해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은 흑자로 돌아섰다. 멜런의 재정개혁은 1920년대 미국경제 황금기의 바탕이 됐다.
멜런은 1921년 3월 워런 하딩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재무장관에 오른 뒤 캘빈 쿨리지(1872~1933, 1923~1928 재임) 대통령과 허버트 후버(1874~1964, 1929~1922 재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3명의 대통령 내각에서 자리를 계속 지켰다. 특히 처음 공직자로 처음 참여한 하딩의 내각에서 멜런은 독특한 인물이었다. 오하이오주 출신인 하딩 대통령은 공직 경험이나 자질이 부족한 여러 고향 친구를 워싱턴에 데려와 주요 직책에 임명했다. 과거의 ‘비선 실세’를 양지에 데려와 공직에 임명한 셈이다. ‘오하이오 갱’으로 불린 이들은 부패 등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하딩은 포커친구였던 앨버트 폴을 불러 내무장관에 임명했으며 후원자이자 정치 브로커인 해리 도허티에게 법무장관을 맡겼다. 이는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결과를 가져왔다. 대통령과 개인적 친분을 바탕으로 고위직에 발탁된 인물이 득실거린 하딩 내각에서는 부패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기금과 관련한 비리로 하딩과 친분이 있는 기금 운용인이 감옥에 가고 감사가 자살하는 스캔들이 터지는 등 하딩의 통치기는 스캔들로 얼룩졌다. 능력이 아닌 대통령과의 친분이 곧 권력이 되는 잘못된 방식의 통치가 빚어낸 결과였다. 하딩 대통령 자신도 법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알코올의 개인적 소유와 소비를 금하는 금주법 시대(1919~1933)였음에도 가끔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통령과 개인적인 친분 없이 금융재정과 관련된 능력, 자질, 경험을 바탕으로 뽑힌 멜런은 업적을 남겼다.
하딩 대통령은 1923년 8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서부 지역을 돌던 중 시애틀에서 식중독을 일으켜 샌프란시스코에서 숨졌다. 부통령인 캘빈 쿨리지(1872~1933, 1923~29 재임)가 즉시 대통령직을 승계했으나 멜런은 그대로 재무장관 자리를 지켰다. 변호사 출신인 쿨리지도 경제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법조인 출신답게 쿨리지는 취임하자마자 부정부패와의 전쟁에 나섰다. 전임자인 하딩과의 친분으로 자리를 차지한 내각 인사가 최우선 정리 대상이었다. 대통령의 과도한 신임을 등에 업고 권력을 농단하면서 부정부패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하딩의 포커친구로 내무장관을 맡았던 ‘오하이오 갱’ 앨버트 폴은 정부 소유의 석유 예비금을 민간 기업에 빌려주고 뇌물과 불법적인 특혜 융자를 받았다가 체포돼 재판 끝에 1931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감옥에 수감된 최초의 미국 각료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정치 브로커 출신으로 하딩의 정치적 후원자인 법무장관 해리 도허티도 정부 재산관리와 관련된 비리로 재판을 받았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도허티는 법무장관직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더 이상 워싱턴에서 버틸 수 없었다. 법무장관 보좌관이던 제스 스미스는 증거문서를 몰래 파기한 혐의가 발각된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찰스 호프스 재향군인국장은 재향군인 연금을 관리하면서 리베이트를 받은 것은 물론 금주법 시대 밀주를 만들고 마약까지 복용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징역형에 처해졌다. 그의 보좌관인 찰스 그래머는 수사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토마스 미라 체류외국인자산관리국장도 뇌물을 받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쿨리지는 이런 사정정국으로 전임 하딩 대통령이 땅에 떨어뜨린 공직자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일부 회복시켰다. 그러는 동안에도 멜런은 든든하게 국가 재정을 관리했다.
불황기에 부패 일소하고 호황기의 부채도 청산
멜런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45세이던 1900년 21세이던 노라 멕멀런(1879~1973)과 결혼했다. 영국 태생으로 유명한 기네스 양조장의 대주주인 알렉산더 멕멀런의 딸이다. 두 사람은 딸 앨리사와 아들 폴을 얻었지만 12년 만에 이혼으로 결혼생활을 끝냈다. 노라가 영국 군인을 비롯한 여러 남성과 불륜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후 멜런은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노라는 1923년 14년 연하의 골동품 거래상인 하비 리와 재혼하면서 멜런이라는 성도 버렸지만 1928년 다시 이혼했다. 2년 뒤 노라는 아들 폴의 건의를 받아들여 멜런이라는 성을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멜런은 평정을 잃지 않고 경영자로서, 공직자로서, 기부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하나의 모범이 됐다. 멜런이 투자자로서 뛰어난 점은 평생에 걸쳐 새로운 세상을 여는 신산업과 과학기술에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인 투자와 인큐베이팅에 나섰다는 점이다. 선견지명으로 가치를 알아본 산업에 미리 투자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도 좋아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보인 것은 이를 키워 세상을 바꾸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교육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멜런은 1913년 자신의 동생인 리처드 멜런과 함께 1908년 세상을 떠난 아버지 토마스를 기리는 ‘멜런 산업연구소’를 설립했다. 연구와 교육을 함께 담당하는 이 연구소는 자신의 모교인 피츠버그대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1965년 이 연구소는 카네기 기술연구소와 합병해 카네기 멜런 대학이 됐다. 미국을 대표하는 명문 대학의 하나다. 자신의 모교인 피츠버그대에도 4300만 달러를 기부하고 동창회장과 대학발전위원장을 지냈다.
내셔널갤러리 세우고 천문학적인 금액 기증
공직 은퇴 뒤 그는 적극적인 기부 활동에 나섰다. 특히 문화예술과 연구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에 몰두한 것이다. 멜런의 업적 중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워싱턴DC에 우뚝 서 있는 내셔널갤러리다. 그는 1937년 현금 1000만 달러를 내셔널갤러리의 건설비로 내놓은 것은 물론 자신이 모아온 미술품까지 기증했다. 그가 기부한 미술품은 구입비로만 2500만 달러를 들인 것으로 기증 당시 가격이 4000만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 시가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라는 것 외에는 추정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그는 1937년 8월27일 세상을 떠난 뒤 그의 후손들을 그를 기리는 앤드루 멜런 재단을 설립해 미래를 위한 지원을 계속하고 있다. 앤드루 멜런은 기업가 정신과 공직자 윤리의 조화라는 면에서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의 모범이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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