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3) IMF 구제금융 협상]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김영삼 대통령)” 안이했던 위기 대응 리더십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3) IMF 구제금융 협상]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김영삼 대통령)” 안이했던 위기 대응 리더십
YS, 국가 경각인 상황에서 분위기 쇄신 명분으로 경제팀 경질... 후임 임창열, IMF와의 합의 번복하다 뒤늦게 백기 들어 김영삼 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공통점은?
첫째, 둘 다 명문대를 졸업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부시 대통령은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둘째, 명문대 출신인데도 모두 지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인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예일대를 우수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퇴임 후, 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선 “C학점을 받고 졸업하는 이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자신의 신체적 건강에 비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짐을 인정하는 동시에 만회하고자 했다. 셋째, 두 대통령 모두 임기 막바지에 이르러 경제위기를 맞았다. 김 대통령 임기 말에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에 빠졌고, 부시 대통령 임기 말에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에 처했다.
두 대통령의 경제위기 대응은 크게 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에 좌초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악화시켰다. 김 대통령은 구조적인 요인으로 자금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기업조차 부도를 내지 말라고 지시했고, 기아자동차 노사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언론매체와 함께 기아 문제 해결을 오랫동안 방해했다. 외환위기에 대한 김 대통령의 몰이해와 임기응변은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경질로 마침표를 찍었다. 김 대통령의 해임의 변은 “분위기 쇄신”이었다. 외환위기를 분위기를 바꿔서 해결하거나 완화하겠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을 드러낸 인사였다. 강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후임으로는 각각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과 김영섭 관세청장이 임명됐다. 후임 임창열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합의를 번복했고, 이로 인해 바닥난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더욱 실추됐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경제 현안을 이해했고 미국 경제가 금융위기에 봉착하자 경제정책 책임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2005~06)으로 활동한 뒤 2006년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된 벤 버냉키는 “부시 대통령은 빠르게 이해하고 좋은 질문을 많이 했다”고 평가했다.
YS, 진화 중인 소방수를 끌어내리다: 1997년 11월 19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김용태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는 오전 8시 15분에 시작됐다. 강 부총리는 먼저 전날 폐회된 국회에서 금융개혁법이 처리되지 않은 것과 1998년도 예산안 심의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 그날 오후 5시에 발표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보고했다. IMF 구제금융 합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표를 미룰 이유가 없고, 외환시장과 환율의 안정을 위해서도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했다. IMF 건은 김 경제수석이 며칠 전에 이미 보고한 사안이었다. 강 부총리는 “다만 종합대책 발표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김 대통령은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개 보고가 끝나면 몇 마디 당부하거나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날은 아무 말 없이 1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 이어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라고 혼잣말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강 부총리는 ‘무언가 기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나를) 경질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모른 척하고 그냥 일어섰다. 이 장면은 [강경식의 환란 일기]에서 인용했고, 다음 이야기도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대통령 집무실 건너편에는 대기실이 있다. 강 부총리는 보고를 마친 뒤 대기실에서 정책과 현안에 대해 김 수석과 의견을 나누고 협의하곤 했다. 그날 두 사람은 대통령의 태도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김용태 실장이 대기실에 들렀고, 강 부총리는 그에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도 동감을 표했다. 강 부총리는 더 이상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김 실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 실장은 “대통령의 의중을 알아보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돌아온 김 실장은 “각하께서는 개각을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부시, 침착하게 경제정책 뒷받침: 2008년 9월 18일 오후 3시 반 미국 백악관 루스벨트룸. 벤 버냉키 의장과 헨리 폴슨 재무부장관, 크리스 콕스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백악관 비서진 등이 배석했다. 버냉키 의장과 두 사람은 긴 테이블에서 대통령의 맞은편에 앉아 금융위기의 심각함과 대응 방안을 보고했다.
이들은 경제가 더 큰 손상을 입기 전에 위기를 시급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머니마켓펀드(MMF)에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시장의 불안에 휩쓸린 금융회사들은 공매도로 인한 주가 하락으로 더 코너에 몰렸다. MMF로부터의 자금유출은 금융시장의 패닉을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우량 대기업조차 운영자금 조달을 어렵게 했다. 이들은 재무부의 외환안정자금을 통한 MMF 지급보증과 금융주에 대한 공매도 금지 계획을 보고했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부실채권매입 프로그램(TARP)이었다. 버냉키 의장은 폴슨 장관이 요청한 대로 TARP의 중요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융시스템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금회수의 물결을 중단시키기 위해 연준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이미 바닥나고 있습니다. 의회의 승인 하에 자금을 동원해 위기를 종합적으로 공략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방법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시장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는 공화당원이었다. 그런 부시 대통령에게 시장에 개입하고 더구나 정부 자금으로 금융회사를 돕는다는 정책은 달가울 리가 없었다. 버냉키 의장은 회고록 [행동하는 용기]에서 “부시 대통령은 (TARP에 대해) 공화당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80년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에 따라서, 장기적으로 자유시장을 보호하려면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철저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버냉키 의장과 폴슨 장관은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앞서 며칠 전 리만브러더스가 파산을 신청한 뒤 AIG에 대한 구제금융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바 있다. 부시 대통령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자신은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IMF를 당황하게 한 임창열 부총리: 후임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취임 당일인 11월 19일 오후 6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이 강 전 부총리가 마련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과 다른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크지 않은 수정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중대한 변경이었다. 하나는 일일 환율 변동폭 15%를 10%로 축소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IMF 자금요청을 빼놓은 것이었다. 임 부총리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거나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간 협조융자를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임 부총리는 “이번에 발표한 안정대책으로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국제금융계가 협력하면 IMF 자금 지원 없이도 외환위기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11대 교역국인 한국이 잘못되면 미국과 일본도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부총리가 자금 지원 요청에 대한 합의를 번복하자 IMF와 미국은 황당해 했다.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와 미국 재무부의 티모시 가이트너 부차관보는 미리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한국이 19일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임 부총리가 판을 깬 것이었다. 이경식 한은 총재도 애를 태웠다. 이 총재는 19일 김용태 실장과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에게 IMF 건의 긴급성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지시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김 수석은 다음날 오전 강만수 재경원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서 채근하니 IMF와 합의한 대로 자금 요청을 빨리 발표하라”고 말했다. 이 지시를 전하자 임 부총리는 “한번 더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그날 저녁 임 부총리는 이경식 총재와 함께 롯데호텔에서 피셔 부총재, 가이트너 부차관보를 만났다. IMF와 미국은 합의한 대로 가자고 했다. 임 부총리는 또 결정을 미뤘다.
21일 오후 강 차관은 일본 대장성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IMF가 자금을 지원하기 전 일본이 중앙은행 간 스왑으로 연결차관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카키바라 차관은 “정당한 과정을 통해 IMF의 틀에 따라 지원한다”며 “미국과의 합의가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임 부총리는 미쓰즈카 히로시 대장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단독으로 한국을 돕지 않고 IMF 및 미국과 공조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몇 차례 계기와 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임 부총리는 이날 밤 10시 15분에 이르러서야 IMF 구제금융 요청을 발표했다.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는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임 부총리는 협상 기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1월 28일 일본에서 미쓰즈카 대장상을 만나 연결차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니 임 부총리가 나선 IMF와의 협상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1998년 3월 3일자 기사에서 임창열 부총리를 “IMF에 맞선 강한 국수주의자”로 평가했고 “한국 관료들은 ‘한국이 더 잘 안다’는 학파의 사고로 아시아의 경제태풍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비꼬았다.
추가 자금지원 등을 둘러싼 협상에서도 갈등이 불거졌다. 워싱턴포스트는 12월 28일자 기사에서 “미국 정부와 국제 금융계는 한국 정부가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한 후 금융개혁 등 IMF 요구사항은 미룬 채 자금 지원 일정을 앞당겨줄 것만을 요구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임 부총리는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를 ‘하위’에서 ‘바닥’으로 실추시켰다. 그는 구제금융에 합의한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임창열 부총리는 위기 상황의 리더십 및 권한 위임, 대응과 관련해 반면교사의 사례를 남겼다. 김영삼(YS) 대통령은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된 외환위기에 대해 책임이 있다. 그러나 YS를 주로 비판하는 것은 사안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YS가 무능해 한국이 초유의 국난을 겪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지 않는 일이다.
한국의 IMF 외환위기는 이 시리즈의 첫 회와 둘째 회에서 복기한 것처럼 우리 사회 여러 부문의 잘못이 어우러져서 빚어졌다. 기아자동차 처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야합해 서로 이익을 챙겨준 CEO와 노조 지도부였다. 여기에 일부 언론사 리더들이 나서서 진실을 호도하고 여론을 오도하면서 정부의 대응을 방해했다.
금융개혁법안에 대해 언론은 우호적이었지만 야당이 애초 긍정적인 태도에서 표변해 등을 돌리는 바람에 처리가 무산됐다. 야당의 비 협조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대선을 앞두고 몸을 사린 데에서 비롯됐다. DJ는 왜 금융개혁법 처리를 외면했나. 한국은행 구성원들이 집회를 갖고 시위에 나서면서 반대하자 표를 의식했으리라고 본다. 이 사안에서는 한국은행 노조 지도부가 책임이 있다.
강경식 부총리는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중앙은행 직원들이 머리띠를 둘러매고 거리로 몰려나와 데모를 하고 단식농성을 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이외에 또 있는지 궁금했다”며 개탄했다.
한보를 시작으로 한 대기업의 연쇄 부도 이후 대통령 선거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각 부문이 저마다 이익을 좇아가면서 구심력을 잃고 원심 분리됐다. 그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국가의 리더십은 대통령뿐 아니라 다수 부문의 리더들이 공동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시계를 더 앞으로 돌리면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 경제의 리더십은 대기업이 쥐고 있었다. 대기업 총수들은 ‘세계 일류’가 됐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모한 투자를 벌였다. 당시 화두는 ‘세계화’였고, 김영삼 정부도 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기업은 재무건전성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부채를 한껏 끌어다 외형 확장을 꾀했다.
세계화의 깃발을 내건 김영삼 정부는 규제를 풀었고 외채가 국경을 넘어 밀물처럼 몰려왔다. 세계화의 허상을 추구한 끝에 이른 파국은 누구의 잘못인가. 대기업 총수들과 세계화의 비전을 설파하고 전파한 학계와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한 개헌이 논의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우리 사회 다른 부문의 리더들과 함께 리더십을 공동 행사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헌법의 국가지배구조를 바람직하게 개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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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둘 다 명문대를 졸업했다. 김 대통령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고 부시 대통령은 예일대에서 역사를 전공했다. 둘째, 명문대 출신인데도 모두 지적 능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고 이를 인정했다. 부시 대통령은 자신이 예일대를 우수하지 않은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공공연히 밝혔다. 퇴임 후, 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선 “C학점을 받고 졸업하는 이들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 대통령은 “머리는 빌릴 수 있어도 건강은 빌릴 수 없다”며 자신의 신체적 건강에 비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짐을 인정하는 동시에 만회하고자 했다. 셋째, 두 대통령 모두 임기 막바지에 이르러 경제위기를 맞았다. 김 대통령 임기 말에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에 빠졌고, 부시 대통령 임기 말에 미국 경제는 금융위기에 처했다.
두 대통령의 경제위기 대응은 크게 달랐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국 경제가 외환위기에 좌초하는 과정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히려 악화시켰다. 김 대통령은 구조적인 요인으로 자금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대기업조차 부도를 내지 말라고 지시했고, 기아자동차 노사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언론매체와 함께 기아 문제 해결을 오랫동안 방해했다. 외환위기에 대한 김 대통령의 몰이해와 임기응변은 강경식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경질로 마침표를 찍었다. 김 대통령의 해임의 변은 “분위기 쇄신”이었다. 외환위기를 분위기를 바꿔서 해결하거나 완화하겠다는 비현실적인 발상을 드러낸 인사였다. 강 부총리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의 후임으로는 각각 임창열 통상산업부 장관과 김영섭 관세청장이 임명됐다. 후임 임창열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합의를 번복했고, 이로 인해 바닥난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는 더욱 실추됐다.
반면 부시 대통령은 경제 현안을 이해했고 미국 경제가 금융위기에 봉착하자 경제정책 책임자에게 힘을 실어줬다.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2005~06)으로 활동한 뒤 2006년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된 벤 버냉키는 “부시 대통령은 빠르게 이해하고 좋은 질문을 많이 했다”고 평가했다.
YS, 진화 중인 소방수를 끌어내리다: 1997년 11월 19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김용태 대통령 비서실장과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이 배석한 가운데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는 오전 8시 15분에 시작됐다. 강 부총리는 먼저 전날 폐회된 국회에서 금융개혁법이 처리되지 않은 것과 1998년도 예산안 심의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 그날 오후 5시에 발표할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보고했다. IMF 구제금융 합의에 대해서는 더 이상 발표를 미룰 이유가 없고, 외환시장과 환율의 안정을 위해서도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했다. IMF 건은 김 경제수석이 며칠 전에 이미 보고한 사안이었다. 강 부총리는 “다만 종합대책 발표 때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발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김 대통령은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대개 보고가 끝나면 몇 마디 당부하거나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날은 아무 말 없이 1분 가까이 침묵을 지켰다. 이어 “분위기 쇄신이 필요한데”라고 혼잣말을 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강 부총리는 ‘무언가 기미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나를) 경질하더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모른 척하고 그냥 일어섰다. 이 장면은 [강경식의 환란 일기]에서 인용했고, 다음 이야기도 이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대통령 집무실 건너편에는 대기실이 있다. 강 부총리는 보고를 마친 뒤 대기실에서 정책과 현안에 대해 김 수석과 의견을 나누고 협의하곤 했다. 그날 두 사람은 대통령의 태도가 여느 때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김용태 실장이 대기실에 들렀고, 강 부총리는 그에게 “무언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김 실장도 동감을 표했다. 강 부총리는 더 이상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 김 실장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김 실장은 “대통령의 의중을 알아보고 올 테니 잠시 기다리라”고 말했다. 돌아온 김 실장은 “각하께서는 개각을 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부시, 침착하게 경제정책 뒷받침: 2008년 9월 18일 오후 3시 반 미국 백악관 루스벨트룸. 벤 버냉키 의장과 헨리 폴슨 재무부장관, 크리스 콕스 증권거래위원회(SEC) 위원장은 부시 대통령을 만났다. 백악관 비서진 등이 배석했다. 버냉키 의장과 두 사람은 긴 테이블에서 대통령의 맞은편에 앉아 금융위기의 심각함과 대응 방안을 보고했다.
이들은 경제가 더 큰 손상을 입기 전에 위기를 시급하게 관리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머니마켓펀드(MMF)에서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렇지 않아도 시장의 불안에 휩쓸린 금융회사들은 공매도로 인한 주가 하락으로 더 코너에 몰렸다. MMF로부터의 자금유출은 금융시장의 패닉을 가중시켰을 뿐 아니라 우량 대기업조차 운영자금 조달을 어렵게 했다. 이들은 재무부의 외환안정자금을 통한 MMF 지급보증과 금융주에 대한 공매도 금지 계획을 보고했다.
이날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안건은 부실채권매입 프로그램(TARP)이었다. 버냉키 의장은 폴슨 장관이 요청한 대로 TARP의 중요성을 부시 대통령에게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융시스템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금회수의 물결을 중단시키기 위해 연준이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이미 바닥나고 있습니다. 의회의 승인 하에 자금을 동원해 위기를 종합적으로 공략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실행 가능한 방법입니다.”
부시 대통령은 시장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을 아주 좋아하는 공화당원이었다. 그런 부시 대통령에게 시장에 개입하고 더구나 정부 자금으로 금융회사를 돕는다는 정책은 달가울 리가 없었다. 버냉키 의장은 회고록 [행동하는 용기]에서 “부시 대통령은 (TARP에 대해) 공화당의 지지를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80년 전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택한 방법에 따라서, 장기적으로 자유시장을 보호하려면 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철저한 개입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했다”고 전했다.
부시 대통령은 다시 한번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버냉키 의장과 폴슨 장관은 부시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앞서 며칠 전 리만브러더스가 파산을 신청한 뒤 AIG에 대한 구제금융을 보고하는 자리에서도 부시 대통령은 이들에게 힘을 실어준 바 있다. 부시 대통령은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며 자신은 정치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IMF를 당황하게 한 임창열 부총리: 후임 임창열 경제부총리는 취임 당일인 11월 19일 오후 6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금융시장 안정 및 금융산업 구조조정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이 대책이 강 전 부총리가 마련한 ‘금융시장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과 다른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크지 않은 수정이었지만 다른 하나는 중대한 변경이었다. 하나는 일일 환율 변동폭 15%를 10%로 축소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IMF 자금요청을 빼놓은 것이었다. 임 부총리는 정부가 국채를 발행하거나 한국은행이 중앙은행 간 협조융자를 추진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임 부총리는 “이번에 발표한 안정대책으로 국제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국제금융계가 협력하면 IMF 자금 지원 없이도 외환위기 해결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세계 11대 교역국인 한국이 잘못되면 미국과 일본도 문제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임 부총리가 자금 지원 요청에 대한 합의를 번복하자 IMF와 미국은 황당해 했다. 스탠리 피셔 IMF 수석부총재와 미국 재무부의 티모시 가이트너 부차관보는 미리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한국이 19일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하기에 앞서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임 부총리가 판을 깬 것이었다. 이경식 한은 총재도 애를 태웠다. 이 총재는 19일 김용태 실장과 김영섭 신임 경제수석에게 IMF 건의 긴급성을 대통령에게 보고해 지시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김 수석은 다음날 오전 강만수 재경원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께서 채근하니 IMF와 합의한 대로 자금 요청을 빨리 발표하라”고 말했다. 이 지시를 전하자 임 부총리는 “한번 더 생각해보자”고 말했다. 그날 저녁 임 부총리는 이경식 총재와 함께 롯데호텔에서 피셔 부총재, 가이트너 부차관보를 만났다. IMF와 미국은 합의한 대로 가자고 했다. 임 부총리는 또 결정을 미뤘다.
21일 오후 강 차관은 일본 대장성의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IMF가 자금을 지원하기 전 일본이 중앙은행 간 스왑으로 연결차관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했다. 사카키바라 차관은 “정당한 과정을 통해 IMF의 틀에 따라 지원한다”며 “미국과의 합의가 중요하다”며 거절했다. 임 부총리는 미쓰즈카 히로시 대장상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일본이 단독으로 한국을 돕지 않고 IMF 및 미국과 공조하기로 했다는 사실은 몇 차례 계기와 보도를 통해 이미 알려진 상태였다.) 임 부총리는 이날 밤 10시 15분에 이르러서야 IMF 구제금융 요청을 발표했다.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는 구제금융에 합의했다. 임 부총리는 협상 기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1월 28일 일본에서 미쓰즈카 대장상을 만나 연결차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러니 임 부총리가 나선 IMF와의 협상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은 1998년 3월 3일자 기사에서 임창열 부총리를 “IMF에 맞선 강한 국수주의자”로 평가했고 “한국 관료들은 ‘한국이 더 잘 안다’는 학파의 사고로 아시아의 경제태풍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었다”고 비꼬았다.
추가 자금지원 등을 둘러싼 협상에서도 갈등이 불거졌다. 워싱턴포스트는 12월 28일자 기사에서 “미국 정부와 국제 금융계는 한국 정부가 IMF 자금 지원을 요청한 후 금융개혁 등 IMF 요구사항은 미룬 채 자금 지원 일정을 앞당겨줄 것만을 요구하는 데 대해 강한 불만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임 부총리는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도를 ‘하위’에서 ‘바닥’으로 실추시켰다. 그는 구제금융에 합의한 사실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변명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임창열 부총리는 위기 상황의 리더십 및 권한 위임, 대응과 관련해 반면교사의 사례를 남겼다.
[박스기사] 외환위기 주범은 YS? - 국가의 실패는 여러 부문 리더의 실패
한국의 IMF 외환위기는 이 시리즈의 첫 회와 둘째 회에서 복기한 것처럼 우리 사회 여러 부문의 잘못이 어우러져서 빚어졌다. 기아자동차 처리의 발목을 잡은 것은 야합해 서로 이익을 챙겨준 CEO와 노조 지도부였다. 여기에 일부 언론사 리더들이 나서서 진실을 호도하고 여론을 오도하면서 정부의 대응을 방해했다.
금융개혁법안에 대해 언론은 우호적이었지만 야당이 애초 긍정적인 태도에서 표변해 등을 돌리는 바람에 처리가 무산됐다. 야당의 비 협조는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대선을 앞두고 몸을 사린 데에서 비롯됐다. DJ는 왜 금융개혁법 처리를 외면했나. 한국은행 구성원들이 집회를 갖고 시위에 나서면서 반대하자 표를 의식했으리라고 본다. 이 사안에서는 한국은행 노조 지도부가 책임이 있다.
강경식 부총리는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중앙은행 직원들이 머리띠를 둘러매고 거리로 몰려나와 데모를 하고 단식농성을 하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우리나라 이외에 또 있는지 궁금했다”며 개탄했다.
한보를 시작으로 한 대기업의 연쇄 부도 이후 대통령 선거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는 각 부문이 저마다 이익을 좇아가면서 구심력을 잃고 원심 분리됐다. 그런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국가의 리더십은 대통령뿐 아니라 다수 부문의 리더들이 공동으로 행사하는 것이다.
시계를 더 앞으로 돌리면 김영삼 정부 시절 한국 경제의 리더십은 대기업이 쥐고 있었다. 대기업 총수들은 ‘세계 일류’가 됐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무모한 투자를 벌였다. 당시 화두는 ‘세계화’였고, 김영삼 정부도 이를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다. 기업은 재무건전성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부채를 한껏 끌어다 외형 확장을 꾀했다.
세계화의 깃발을 내건 김영삼 정부는 규제를 풀었고 외채가 국경을 넘어 밀물처럼 몰려왔다. 세계화의 허상을 추구한 끝에 이른 파국은 누구의 잘못인가. 대기업 총수들과 세계화의 비전을 설파하고 전파한 학계와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정치의 계절을 맞아 ‘제왕적 대통령’에 대한 비판과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으로 인한 폐해를 줄이기 위한 개헌이 논의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 우리 사회 다른 부문의 리더들과 함께 리더십을 공동 행사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헌법의 국가지배구조를 바람직하게 개선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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