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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 (5) 한국경제 펀더멘털론]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 (5) 한국경제 펀더멘털론]

경제 수장들 “한국경제 기초여건 튼튼” 반복...펀더멘털은 리더들의 역량, 정치·사회 변수도 포함해서 판단해야



한보그룹 부도가 신호탄이 된 금융·외환위기가 1997년 내내 악화일로를 내달은 것은 아니었다. 한국 경제는 그해 2분기 들어 정상궤도로 돌아오는 듯했다. 2분기 주요 지표만 보면 한국 경제는 회복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었다. 이후 안팎에서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상태가 더욱 악화된 것이지, 한국 경제는 파탄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일까. 당시 거시정책을 맡고 있던 강경식·김인호 경제팀은 그렇다고 강조했다.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이 1997년 3월에 열린 한보특위청문회에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우리 경제의 기초여건, 즉 펀더멘털은 뚜렷한 개선 추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주가는 이 같은 경제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상승할 수밖에 없다.”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1997년 10월 10일 기자들과 만나서)

“한국 경제는 기초여건(펀더멘털)이 건실해 동남아 국가와 같은 외환·금융시장의 위기상황으로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다.” (강경식 경제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 1997년 10월 27일 확대경제장관회의 발언)

1997년 강경식 부총리와 김인호 수석을 비롯해 여러 경제관료가 한국 경제의 상황을 진단하면서 꺼내곤 한 단어가 ‘펀더멘털’이다. 펀더멘털은 주식시장에서 만들어진 용어로, 주가를 결정하는 기초여건을 가리킨다. 주가는 펀더멘털에 따라 결정되는 내재가치에서 벗어나 움직이다가도 결국 내재가치로 가까워진다.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이 건실하다는 말은 기초여건이 탄탄한 만큼 외환·금융시장 불안도 머지않아 잦아들고 주가와 원화 가치가 한국 경제의 내재가치를 반영할 것이라는 맥락에서 쓰였다. 한국 경제관료뿐 아니라 국제통화기금(IMF) 역시 11월까지 한국은 거시경제의 기초여건이 건실하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그때 한국 경제의 기초여건이 비교적 튼튼했다고 볼 수 있을까. 한보그룹 부도로 한 차례 폭풍이 몰아친 이후 소강 국면을 보인 2분기 금융·외환시장과 거시지표를 1분기와 비교해 살펴보면서 이에 대해 생각해보자.
 1997년 2분기에 한숨 돌렸으나
1997년 8월 26일 국회 재경위에 참석한 강경식 경제부총리가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1분기 3년 만기 회사채 수익률은 1996년 평균 11.87%에서 3월에는 12.69%로 뛰었다. 콜금리는 1월 11.36%에서 3월 12.91%로 상승했다. 1분기 코스피는 연초 610대로 하락했다가 710대를 회복하더니 다시 3월 말에 610대로 떨어지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외국인은 2월에 871억 원, 3월에 2154억 원어치 주식을 순매도했다. 경상수지 적자는 1996년에 230억 달러에 이어 1997년 1분기에도 74억 달러를 기록했다. 자본수지도 순유입 규모가 1996년 1분기에 약 53억 달러에서 1997년 1분기에는 40억 달러에 그쳤다.

일부 은행들은 외화결제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었다. 여기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우선 신용평가회사 무디스가 한보에 대한 거액대출로 부실을 떠안게 된 조흥·제일·외환은행의 장기 신용등급을 한 단계씩 하향조정했고 이에 따라 해외자본이 이들 은행과 종합금융회사들에 대해 자금 제공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또 3월은 일본 금융회사들이 결산기를 앞두고 해외에 대출한 자금을 회수하는 시기다. 일본 금융회사들로부터의 차입에 크게 의존하는 한국 금융회사들이 3월에 해외차입에 어려움을 겪은 배경이다. 한국은행은 이를 해소해주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풀었고, 외환보유액은 1997년 3월 말 292억 달러로, 1996년 말보다 41억 달러 줄었다. 달러가 부족해지자 원·달러 환율이 뛰었다. 환율은 1996년 말 844.20원에서 1997년 3월 말에는 897.10원으로 상승했다.

2분기 지표는 두루 안정됐다. 3년 만기 회사채 수익률과 콜금리는 6월 각각 11.17%와 11.65%로 하락했다. 코스피는 4월 700선을 회복한 뒤 6월 중순에는 790대까지 상승했다. 외국인은 주식 순매도를 이어가 4월에도 1341억원어치를 팔아치웠으나 5월에는 1조 9000억원 순매수로 돌아섰고 6월에도 6332억원 순매수했다.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4월 한보그룹의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의 장·단기 신용등급을 한 단계 떨어뜨렸다. 그러나 외환시장은 안정세를 보였다. 2분기 수출이 증가세로 돌아서고 수입증가율이 낮아지면서 경상수지 적자는 27억 달러로 축소됐다. 정부는 일정을 앞당겨 자본시장 개방 조치를 시행했고 자본수지 흑자가 1분기 40억 달러에서 2분기 66억 달러로 증가했다. 국내은행의 해외차입 여건도 개선됐다. 외환 보유액은 333억 달러로 늘었다. 원·달러 환율은 점차 낮아져 6월 말에는 888.10원으로 안정됐다.

강 부총리는 7월 2일 일기에 “6월 무역수지가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나타냈다”고 적었다. 이어 “내가 경제를 맡은 다음 불안감 없이 경제가 풀려가고 있다”고 자평했다. 5일 일기에서는 “부총리에 취임한 지 4개월이 되었다”며 “취임 당시와 비교할 때에는 금융도 안정을 되찾았고, 주가도 610 수준까지 가던 것이 800을 내다보게 되었다”고 썼다. 그는 “경제가 4개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되었다”며 “취임 당시 고생길에 들어섰다고 위로(?)를 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운이 좋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책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인용)
 외형만 번지르르, 속은 곯아
1998년 1월 13일 서울지법 로비에는 한신공영 삼미특수강 등 법정관리중인 부도회사 채권자들이 정리채권 마감일이 임박하자 길게 줄을 서있다.
그러나 한국 경제는 외화내빈 상태가 심해지고 있었다. 겉을 번지르르하게 치장하면서 외형을 불리는 가운데 안은 부실해지고 있었다. 거시경제와 기업·금융부문 모두 그랬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높았지만 내실이 없었다. 높아진 대외신뢰도를 바탕으로 외채를 최대한 끌어왔는데, 경상수지 적자로 외화가 빠져나가면서 외환보유액이 감소했다. ‘(정부가) 망하지(망하게 두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믿음에 더해 세계 일류가 됐다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을 갖게 된 대기업은 국내외 부채를 한껏 끌어들여 무모하게 외형을 불렸다. 기업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이 동시에 저하되고 있었다. 리스크 관리에 소홀했고 완충자본을 쌓지 않은 금융부문은 기업 부도로 인한 부실의 충격을 고스란히 받게 됐다.

한국 경제는 1994년과 95년 9%대의 빠른 성장률을 기록했다. S&P는 95년 한국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상향조정했다.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며 정부는 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성장률은 96년에는 7%대로 낮아졌지만, 세계 경제성장률이 3%대였음에 비춰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96년 성장률은 재고 증가로 높아진 부분이 크고, 이를 제외하면 3%대로 낮아진다고 분석됐다. 경기가 꺾이는 중에도 씀씀이는 여전했고, 96년 경상수지는 238억 달러로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세계은행(WB) 기준 외채는 92년 말 428억 달러에서 96년 말에는 1126억 달러로 급증했다. 특히 단기외채 비중은 같은 기간에 43%에서 58%로 큰 폭 높아졌다. 국내 금융회사는 단기외채를 장기로 운용했고, 이로 인한 만기 불일치는 외환이 부족해진 요인 중 하나가 됐다. 96년 말에 단기외채는 외환보유액의 239%에 달했다.

몸집을 급하게 키운 기업은 체력이 떨어졌다. 부채비율이 높아 외부 충격에 매우 취약한 상태였다. 한국 제조업의 자기자본비율은 원래 낮았는데, 96년에는 더욱 낮아졌다. 자기자본비율은 95년 26%에서 24%로 하락했다. 제조업의 매출액 대비 경상이익률은 같은 기간 3.6%에서 1%로 급락했다. 외부감사 대상 기업의 평균 이자보상배율이 95년 1.53에서 96년 1.2로, 97년에는 0.87로 낮아졌다. 기업의 태반이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게 된 것이다.

한보에 이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기아, 쌍방울, 해태,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줄줄이 부도를 맞거나 부도유예·화의에 들어갔다. 30대 그룹 중 3분의 1 이상이 쓰러진 현상의 원인은 대기업 전반에 걸쳐 ‘과도한 차입에 의존한 방만 경영’이 누적됐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강경식 전 부총리가 간과한 펀더멘털은 바로 이 부분, 역량이 떨어지는 경영자에 의해 부실해진 기업 부문이었다. 한국 기업이 97년에 도미노처럼 쓰러진 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인 결과였다. 이는 금융부문 시스템 리스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고, 외화투자자금 유출과 외화대출 회수, 그리고 이로 인한 외환위기를 촉발할 가능성이 컸다.
 외신 오보와 악의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정부
외환위기 당시 30대 기업 중 3분의 1이 쓰러졌다. 왼쪽부터 김현철 삼미그룹, 장진호 진로그룹, 박영일 대농그룹, 김선홍 기아그룹, 김태형 한신공영 회장. / 사진:중앙포토
또 강 전 부총리는 경제에서 정치적인 여건과 야당, 국내외 언론, 노조가 큰 역할을 한다는 점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런 변수를 고려할 때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은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앞선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야당은 물론 여당도 기아자동차 처리를 지연시켰다. 일부 언론은 기아자동차 경영자·노조와 연대해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대외 신뢰를 회복할 마지막 기회였던 금융개혁법안 처리에서는 여당이 몸을 사리는 가운데 야당이 등을 돌렸다.

한국 정부는 특히 해외로부터 받은 신뢰를 유지하지 못했다. 자본시장을 개방해 외국인이 국내에 투자하고 해외에서 부채를 들여온 상황에서는 내부적으로 금융감독을 꼼꼼하게 하는 것 외에 대외적으로는 투명한 정보공개를 바탕으로 신뢰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외에서 적어도 한국의 실정을 곡해하지는 않게끔 해야 한다. (물론 한국은 금융감독 체계가 금융업종에 따라 흩어져 있었고, 금융감독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상황이 악화되자 외신은 한국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을 기사로 표출했다. 한국 정부는 외신의 오보와 악의적인 보도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10월 기아차 법정관리 발표를 국유화로 왜곡해 보도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이런 관점에서 한국 정부가 국책은행을 동원해 부실기업을 구제하는 구태를 답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아시안 월스트리트저널은 11월 3일 한국의 외환보유액 중 최대 200억 달러가 선물환 개입에 사용됐기 때문에 가용 재원이 아니라고 보도했다. 실제 선물환 계약 금액은 60억 달러 정도였고 1년에 걸쳐 분산 결제되는 것이어서 무시해도 좋을 규모였다. 블룸버그통신은 11월 5일 한국의 외환보유액이 150억 달러까지 줄었고 외채 1100억 달러 중 800억 달러가 연내에 만기가 돌아온다며 한국의 위기는 태국보다 심각하다고 주장했다. 이 또한 사실과 크게 달랐다.

이런 보도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됐다. 전에 90% 이상이던 단기외채의 만기갱신비율이 60% 이하로 떨어지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격히 말라갔다. 오보는 언론의 책임이지만, 이와 관련해 한국 정부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경제의 펀더멘털은 지표로만 판단할 게 아니다. 경제활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부문 리더들의 판단과 의사결정력, 여러 부문의 관계, 정치·사회적인 문제해결 능력 등도 펀더멘털에 포함된다. 2017년과 앞으로의 한국 경제와 관련해서도 이 점을 궁리해야 한다.
 [박스기사] 실패한 통화정책 - 환율 정책을 대외균형이 아닌 물가에 허비
‘1995~96년 중 자본수지가 대폭 흑자를 나타낸 데다 환율의 변동성을 완화하고 물가에의 파급효과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운용된 결과 원화의 대미 달러 환율이 6.6% 절하되는 데 그쳐 환율조정을 통한 경상수지 개선 메커니즘이 작동되지 않았음.’

이는 한국은행이 1999년 1월 작성해 국회 청문회에 제출한 ‘1997 외환위기의 상황과 경과’ 자료의 한 부분이다. 이 내용을 간단히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대규모 경상수지 적자가 나는 상황에서는 원·달러 환율을 높여 대외 균형을 회복하는 쪽으로 정책을 운용해야 한다. 환율이 올라가면 수출이 증가하는 가운데 수입 물가가 상승하고 해외여행 경비가 증가해 경상수지가 개선된다. 그런데 물가 안정에 정책의 주안점을 둬 원화가치를 높게 유지했다. 그래서 원화가치가 소폭 하락했고 경상수지는 사상 최대 적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엔화의 대미 달러 환율은 13.9% 절하됐다. 이규성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한국의 외환위기]에서 “1996년에 환율을 실세에 맞게 조정하지 않고 물가안정과 경쟁력 10% 높이기 정책으로 대응한 것은 적절한 정책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이 전 장관은 자본거래 자유화로 인한 자본수지 흑자도 원화가치 하락을 저지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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