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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6) 프랑켄슈타인 경제] 박정희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대마불사 믿다 끝내 파멸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6) 프랑켄슈타인 경제] 박정희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대마불사 믿다 끝내 파멸

재벌 주축된 무분별한 부채·투자로 부실 성장... 3저 호황에 취해 충격에 취약한 경제구조 못 바꿔
1966년 10월 덕수궁에 세워진 경제개발 5개년 종합 전시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내외가 설명을 듣고 있다.
‘프랑켄슈타인 경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1995년 6월 3일자 한국 특집기사 중 한 꼭지의 제목이다. 이 기사는 ‘재벌 체제가 한국 경제의 위험’이라고 경고했다. 기사는 재벌 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과 폐해를 지적한 다음 “그러나 재벌을 둘러싼 가장 큰 걱정거리는 경제적 안정에 대한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또한 “재벌은 막대한 부채를 쌓음으로써 비대해졌는데, 이로 인해 취약해졌다”며 “매출 부진이 닥치면 재벌 그룹들이 부채상환 일정을 맞추지 못하게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재벌 그룹들이 부도가 날 경우 금융시스템이 부실채권에 묻힐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경제성장이 둔해져서 더 많은 부도가 발생할 것”이라는 시나리오를 제기했다.

프랑켄슈타인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이자 위험하게 하는 믿음이 ‘대마불사(大馬不死)’였다. 대마는 바둑에서 많은 점으로 넓게 자리 잡은 말을 가리키고, 대마불사는 대마는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마불사는 경제에서는 정부가 대기업을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였다. 박정희 시대 정부의 지시와 구제에 길들여진 기업은 과중한 부채를 짊어진 무분별한 투자를 주저하지 않았다. 기사는 “투자 프로젝트가 잘못될 경우 구제해준다는 정부의 암묵적인 약속이 확장 성향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몸집을 불려놓을수록 잘못될 경우 금융지원 등 정부의 구제를 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충격에 취약했다. 한국 경제는 대기업 위주로 성장했고, 대기업은 대마불사를 믿고 경쟁적으로 덩치를 키웠다. 외형 성장에 반비례해 대기업의 체력은 떨어졌다. 그 결과 다른 나라는 감기로 넘길 충격을 한국은 폐렴으로 앓기 십상이었다.

재벌 시스템 지적한 영국 이코노미스트:
해당 기사는 외환위기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한국 경제의 가장 큰 위험요소를 정확히 짚었다. 당시 호황에 기고만장하던 한국 경제는 불과 2년 뒤에 안팎의 충격을 맞고 국가부도 지경에 처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이다. 외환위기를 복기하는 일련의 작업에서 이 기사를 참고자료로 검토해야 하는 까닭이다.

1970년 4월 김학렬 경제부총리(오른쪽)와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과 함께 포철 기공식 버튼을 누르는 박정희 대통령(가운데). / 사진:중앙포토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는 그 무렵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단선적이고 기계적인 주장이 비중 있게 소개되고 논의된 데 비춰서도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크루그먼은 1994년 11월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아시아 기적이라는 신화’에서 노동과 자본 등 요소투입 증대에 의존하는 아시아식 성장모델에는 한계가 있으며 기술력이나 생산효율 향상이 없이는 그런 성장을 지속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한국이 아시아 여러 국가에 이어 외환위기에 빠지자 그의 전망이 적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크루그먼의 분석과 전망은 외환위기 이후 경제 상황 전개에 비춰볼 때,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아시아의 성장이 구조적인 한계에 봉착해 외환위기에 좌초했다면, 한국과 대만은 이후 기술 혁신과 생산효율 향상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할 짧은 기간엔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과 대만은 위기 이후 곧바로 성장 경로로 복귀했다. 한국 경제는 1999년에 11.3% 성장했다. 이 성장률은 1998년 극심하게 위축된 상태와 비교한 결과이기 때문에 큰 의미를 두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2000년 8.9%, 2001년 4.5%에 이어 2002년 7.4%를 기록했다.

크루그먼의 주장이 맞다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빠른 성장률 회복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한국 경제는 외환위기 전에는 기술혁신과 생산효율 향상을 하지 못하다가 이후 단기에 두 가지 중 하나 또는 두 가지 모두에서 확실한 성과를 냈고, 그 결과 2000년 이후 높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하게 됐다.’ 그러나 환란 이후 한국 경제의 단기 회복은 이들 요인 덕분이라기보다는 구조조정과 재정투입에 의해 기업·금융 부문의 부실을 제거한 결과였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으로 돌아오자. 기사의 제목으로 미루어 짐작하면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통제 불가능하고 위험스러운 재벌이 주축이 된 한국 경제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렇다면 프랑켄슈타인은 누구를 빗댄 말일까.

영국 작가 M.W. 셸리가 19세기 초에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다(이 이름은 이후엔 괴물을 지칭하는 데에도 쓰이게 됐다). 프랑켄슈타인은 인조인간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비극은 거구의 인조인간이 자신을 추하게 창조한 프랑켄슈타인을 증오하면서 싹튼다. 인조인간은 프랑켄슈타인의 동생을 죽이고 신부마저 살해한다.

기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 같은 역할을 했다고 비유했다. 박 대통령은 수출 대기업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재벌 그룹들은 정부가 통제하지도 못하고 내버려둘 수도 없는 규모로 성장했다. 재벌 그룹들은 또 부도가 나도록 방치될 경우 한국 경제에 미치는 타격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게 됐다.

프랑켄슈타인의 운명:
소설에서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의 피조물로 인해 파멸에 이르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도, 궁정동에서 저격 되지 않았더라도, 그런 운명을 맞이하게 됐을까? 재벌 그룹의 도미노 부도로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경제개발의 신화에 큰 손상을 입게 됐을까?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이 그런 파국을 예고했다면, 그 예언은 박정희 사후 15년이 지난 시점에야 적중했다. 따라서 우리는 추가로 다음 의문을 갖고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을 읽어야 한다. 둘째, 한국 경제는 박 대통령이 타계한 1979년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프랑켄슈타인적인 구조를 답습하고 있었나? 셋째, 프랑켄슈타인 경제가 짧지 않은 시일이 흐른 뒤인 1997년에 무너진 까닭은 무엇인가?

1996년 10월 한승수 부총리와 전경련 회장단이 오찬 회동을 하고 있다.
먼저 이코노미스트는 역사에 가정법을 적용해, 박정희 대통령이 창조한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그대로 폭주했을 경우 붕괴됐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코노미스트는 “박 대통령이 몇 년 더 살았다면 한국의 경제 기적을 스스로 모두 파괴했을지 모른다”고 봤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박정희가 역사로 퇴장하고 나서 경제운영의 기조가 바뀐 덕분이었다고 이 매체는 분석했다. 이 매체는 1980년대 들어 경제정책을 담당한 관료들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고 긴축정책을 단행함으로써 1979년 닥친 제2차 오일쇼크 위기를 넘겼다고 설명했다.

3저호황에 위기 유예:
이후 한국 경제는 국제 변수가 유리하게 돌아가면서 이른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는 3저 호황을 누리게 된다. 저달러·저유가·저금리에 크게 힘입은 1986~88년의 3저 호황은 프랑켄슈타인 경제의 수명을 연장해줬다. 경제 성장률은 3년 동안 11.2%, 12.5%, 11.9%에 달했다.

외환위기로 기업들이 줄줄이 부도나고, 정리해고가 잇따르면서 거리엔 실업자가 넘쳐났다. / 사진:중앙포토
3저 호황의 가장 큰 계기는 1985년 플라자합의였다. 재정과 무역수지에서 쌍둥이 적자에 시달리던 미국이 주도한 플라자 합의에 따라 일본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에 대한 달러화의 약세가 추진된다. 이 과정에서 원화는 주요국 통화에 비해 덜 절상됐고 이 덕분에 생긴 가격경쟁력으로 한국 수출은 1986년 이후 연평균 30% 이상 급증했다.

세계 주요국은 오일쇼크에 대응해 금리를 인하하고 있었다. 한국은 국제금리 하락으로 외채상환 부담이 줄었고 경상수지가 호전됐다. 더욱이 산유국들이 1985년 12월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산유량을 늘리면서 유가가 하락했다. 유가가 떨어지자 국제수지가 개선됐다.

3저 호황이 아니었다면 한국 경제는 1980년대에 외채 위기에 빠졌을지 모른다. 양우진 한신대 교수는 책 [다시 읽는 한국 현대사]에서 “(1970년대에)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며 설비와 원자재 수입 수요가 늘어나 경상수지 적자의 폭이 더욱 커졌었다”며 “결국 1980년대 초반 누적 외채가 급증하여 ‘외채망국론’이 한동안 유행되기도 하였다”고 전했다. 국제수지가 3저 호황으로 대규모 흑자로 돌아서자 외채망국론은 잦아들었다. 외채를 경계하는 마음도 함께 사라졌다. 정부는 재벌의 재무구조 개선을 압박하기 위해 여신관리제도를 1984년 본격 시행했고 시중은행 민영화를 통한 대출심사 기능 강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와 법으로는 재벌의 행동 양태를 변화시킬 수 없었다”고 양 교수는 분석했다. 프랑켄슈타인 경제의 속성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1980년대 성장에서 중화학공업은 외형과 내실을 함께 키웠다. 중화학공업에서 정부는 중복 투자를 조정하는 강제 구조조정을 실시했고, 중소기업과 외국자본이 참여해 분업관계 및 수직적 통합생산체계를 구축했다. 양 교수는 “중화학공업 특히 중공업 가공조립산업에서 조립 부문과 소재 부품 부문간 통합생산체제가 형성된다”며 “이것은 1980년대 초를 지나 중화학공업이 중심이 되어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다시 달성하는 바탕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대마불사’에 무모함 결합:
1990년대가 들어서고 김영삼 정부가 1993년에 출범하면서 한국 경제의 프랑켄슈타인적인 속성은 더 악화됐다. 재벌 그룹 경영자들은 실력보다 훨씬 큰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대마불사의 믿음에 더해 과도한 자신감에 부푼 그들은 국내외 부채를 무분별하게 동원한 무모한 사업 확장으로 내달렸다. 희망과 의욕에 넘치는 시절이었고 위험을 키우는 시기였다.

당시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내놓은 해법은 무엇이었을까. 이코노미스트는 “해법 가운데 하나는 금융시스템을 개혁하는 데 있다”며 “정부가 기업의 투자위험을 감시하는 일을 금융회사에 넘겨, 재벌의 폭주하는 투자계획이 은행에 의해 걸러지도록 하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이 금융시스템을 너무 취약하게 만들어 놓아 현재 금융부문은 그렇게 할 역량이 아직 안 된다”고 평가하고 따라서 “금융시스템 개혁을 포함한 재벌 개혁을 정부가 맡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가 금융시스템을 고치는 동시에 금융부문을 통한 재벌 그룹의 재무구조 개선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시스템 개혁은 너무 늦게 착수됐다. 게다가 대기업 재무구조 개선은 추진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는 대기업이 주도권을 쥔 시기였다. 박정희의 유산인 대마불사의 프랑켄슈타인 경제는 1997년 한국 경제가 파탄에 이른 뒤에야 종식됐다. 정부의 구제가 아니라 시장 원리에 따른 구조조정이 자리를 잡았다. 생사의 기로를 거쳐 살아남은 대기업은 재무건전성을 최우선적으로 관리하게 됐다.
 [박스기사] 박정희 정치에 대한 시대착오적 향수 - 환상과 검증 부실이 빚은 박근혜 당선···이번엔 전철 피해야
박근혜 전 대통령이 1977년 MBC TV의 신년 특집 프로그램에 출연해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청와대 생활에 대해 얘기하던 모습.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임기에는 물론이고 박정희 정치에 대한 향수에도 마침표를 찍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자 중 일부는 그가 부친으로부터 배운 정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취임 직후부터 한계를 드러냈다. 그로써 박정희 정치에 대한 일부 시민들의 환상도 차츰 걷히게 됐다. 그의 리더십이 실패한 큰 이유는 정치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이 시대착오적이었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정치에 대한 그의 관념은 박정희 시대의 것이었다. 민주주의 사회와 맞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관념이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실행하는 정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통할 수 없었고 알력과 마찰, 불만을 빚을 뿐이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생각의 ‘원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취임사다. 잠시 여기서 ‘원형’이라는 단어를 택한 배경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그는 정치 이슈를 놓고 자주 정반대로 말을 바꿨다. 그래서 어느 한자리의 발언으로는 그의 정치관을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이 된 다음 선거과정의 경쟁에서 벗어나 백지에 국정 구상을 펼쳐놓은 취임사에는 그의 생각이 많이 반영됐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취임사에서 ‘막중한 시대적 소명’으로 경제부흥, 국민행복, 문화융성을 제시하고 설명했지만,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과정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정치와 관련된 발언을 굳이 찾아보면,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 대해 “저는 깨끗하고 투명하고 유능한 정부”를 만들 테니 “국민 여러분께서도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 같이 힘을 모아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한 대목뿐이다.

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임사는 물론이거니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취임사와도 판이한 부분이다. 두 대통령은 정치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당리당략보다 국리민복을 우선하는 정치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결과 갈등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으로 문제를 푸는 정치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한다”며 “저부터 야당과 대화하고 타협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실용정치를 내걸고 정치권에 “소모적인 정치관행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국민의 뜻을 받들고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생산적인 일을 챙겨 하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여와 야를 넘어 대화의 문을 활짝 열고 국회와 협력하고, 사법부의 뜻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다.

박정희 독재의 경험이 각인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행정부가 민주절차에 의해 의견을 수렴하고 정책을 수립해 입법하고 시행하는 과정이 자리 잡지 않았다고 나는 짐작한다. 그래서 그는 민의를 듣지도 않았고 민의의 대의기구인 국회를 상대로 자신의 생각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의 정치 리더십이 지지자들의 기대는 물론 일정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취임 후 시일이 지나면서 드러났다. 그는 민주주의 정치에 대한 관념이 없었을 뿐더러, 정치 지도자의 기본조건을 어느 하나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 정치 지도자의 기본조건은 통찰력과 설득력, 공감능력과 도덕성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번 대선 후보는 적어도 이 네 가지 기준에서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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