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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4) 장루이민 중국 하이얼그룹 회장

채인택의 혁신을 일군 아시아의 기업인(4) 장루이민 중국 하이얼그룹 회장

하이얼(海爾)그룹의 장루이민(張瑞敏·68) 최고경영자(CEO) 겸 회장은 중국인 특유의 ‘상인 정신’을 시장경제의 ‘자본가 정신’으로 활용해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장루이민 회장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떠오르는 중국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인이다.
중국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시장경제체제로 가장 성공적으로 전환한 나라로 평가 받는다. 중앙 통제 경제체제에서 민간 자유시장경제로 전환한 옛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대부분 상당한 혼란을 겪었다. 상당수 기업은 경쟁을 이기지 못해 문을 닫아야 했다. 시장경제에서 기업의 생사를 결정하는 가격이나 비용, 기업의 수익성과 경쟁력 같은 요소가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선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 가도의 하이얼 그룹 CEO
과거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선 기업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과 공급량을 시장이 아닌 관료가 결정했다. 이에 따라 기업은 수익성이나 경쟁력을 중요한 목표로 여길 필요가 없었다. 기업이 적자를 보면 국가 예산으로 보조금을 지급하거나 세금이나 국가에 바치는 할당금을 줄여주는 ‘연성 경제’ 방식을 적용했기 때문이다. 생산 수단이 국유화됐기 때문에 적자 기업이 나타나면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정부 예산을 투입하면 됐다. 적자 기업은 보조금 지급이나 세금 성격의 할당금 감면 등에 국가 기관과 협상할 수 있었다. 이런 체제에서 수익성이나 경쟁력은 기업의 당면 목표가 될 수 없었다. 관료들과 좋은 관계만 맺으면 만사형통이었다. 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가 생산량과 상품의 품질을 알아서 결정하면 됐다.

이러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선 품질이나 기업혁신이란 개념이 존재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갑자기 중앙에서 시장경제를 한다고 하니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이 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숱한 옛 사회주의권 국가가 체제전환 과정에서 극심한 부작용을 겪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를 비교적 이른 시일 안에 극복할 수 있었다. 중국인 특유의 ‘상인 정신’을 시장경제의 ‘자본가 정신’으로 활용한 인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 중 하나가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에 기반을 둔 하이얼그룹의 장루이민 회장이다. 1984년 설립된 하이얼은 2016년 292억 달러의 매출과 29억40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거둔 중국 최대 가전업체다. 중국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9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의 가전사업 부문을 54억 달러(약 6조5000억 원)에 인수했다. 하이얼은 인수 뒤에도 GE 브랜드는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 합병을 통해 1911년 창업돼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해온 가전브랜드인 핫포인트(Hotpoint Electric Heating Company)의 북미 브랜드 사용권도 확보했다. 유럽 내 브랜드는 미국의 월풀사가 보유하고 있다. 2012년에는 뉴질랜드의 가전업체인 피셔 앤드 페이켈의 지분 90%도 인수했다. 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 세탁기로 유명한 가전업체다. 뉴질랜드는 물론 호주·미국·이탈리아·레바논·홍콩 등에서 영업 중이다.

하이얼은 글로벌 가전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삼성전자·LG전자 등 한국 기업을 맹추격하고 있다. 하이얼은 냉장고 세탁기 등 글로벌 백색가전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0% 이상을 차지하는 글로벌 가전업체다. 하이얼은 저가·저급품의 대명사에서 이젠 저가·고급화 전략으로 급속히 전환하며 글로벌 백색가전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노동 현장에서 근공검학(勤工儉學)
중국에서 ‘경영의 귀재’로 불리는 장루이민 회장과 마윈 알리바바 전 회장.
이런 하이얼은 현재는 사회주의 색채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활기차고 창의적이고 글로벌적인 업체다. 장루이민 회장은 최근 글로벌 시장에서 떠오르는 중국 경제를 상징하는 기업인이다. 그의 이력서는 하이얼의 역사나 다름없다. 중국 경영의 역사이기도 하다. 하이얼의 눈부신 발전은 장 회장의 경영철학과 전략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가 걸어온 길을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장 회장의 나이는 신중국과 같다. 그는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1949년 1월5일 산둥성 옌타이(煙臺) 라이저우(萊州) 시의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지역 의류공장 노동자였다. 학창 시절 문화대혁명까지 겪어 제대로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전국의 모든 학교가 폐교하고 교육이 중단된 시기였다. 그는 또래들과 함께 전국을 다니며 홍위병으로 활동했다. 후난(湖南)성의 마오쩌둥(毛澤東) 생가를 순례하고 베이징까지 도보로 이동하는 대행진에 참가하기도 했다. 시골에 가서 노동하는 하방 대상은 되지 않았지만 대학도 갈 수가 없었다. 대부분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혁세대의 전형이다.

하지만 그가 받지 못한 것은 제도권 교육일 뿐이었다. 그는 노동 현장에서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는’ 생활을 했다. ‘일하면서 배운다’라는 뜻의 중국어인 근공검학(勤工儉學)은 외국에 나가 일을 하면서 공부를 하자는 취지로 20세기 초 중국에서 벌어진 교육운동의 이름이기도 하다. 쓰촨(四川)성 출신의 교육자 우위장(吳玉章)이 1915년 6월 교육자 차이위안페이(蔡元培)와 근공검학학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3월 중국-프랑스 교육회를 만들어 청년들을 프랑스로 유학을 보낼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17일 1차 유학생 89명이, 3월31일에는 2차 유학생 26명이 상하이(上海)를 출발해 프랑스로 떠났다. 주목할 점은 이 근공검학 유학생에 신중국 건국의 주역이 대거 포함됐다는 점이다. 저우언라이(周恩來)와 덩샤오핑(鄧小平)은 근공 검학 유학생으로 프랑스의 공장에서 일하며 공부했며 마오쩌둥(毛澤東)은 본국에 머물렀지만 유학생 친구의 학비를 보탰다. 근공검학 출신의 저우언라이는 합리적인 노선으로 질풍노도 시기의 중국에서 ‘현명한 중재자’로 활동했다. 덩샤오핑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추진해 강대국의 기틀을 닦았다.

장 회장은 1968년 산둥성 칭다오에 있는 국영 건설 업체에서 노동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다른 노동자와 달랐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으며 독서광이었다. 1시간 동안 자전거를 타고 부기 등 상업과 공장 운영을 가르치는 강좌에 참가하는 등 열성적으로 배웠다. 해외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일과 배움을 병행하며 자신을 단련하고 업그레이드했다는 점에서 근공검학 선배들과 일맥상통한다. 해외 근공검학이 혁명으로 신중국을 건설했다면 장 회장은 국내 근공검학으로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힘을 보탰다.
 품질과 경영 혁신의 상징이 되다
중국 청도에 있는 하이얼 본사 공장.
12년 동안 현장 노동자로서 일과 공부를 병행한 그는 조장과 주임을 거치면서 차근차근 공장 조직의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숨어 있어도 남의 눈에 띄게 마련이다. 부지런하고 적극적이었고 의사결정이 빨랐던 그는 조직에서 열정과 리더십까지 함께 발휘했다. 그 결과 1980년 일하던 의류업체의 부공장장으로 승진했다. 그의 열정과 능력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칭다오 시정부의 가사도구 담당 부국장으로 발탁됐다. 이어 시정부에서 가장 화급한 업무에 소방수로 차출됐다. 35세이던 1984년 운영난으로 폐업 위기에 처했던 시영 칭다오 냉장고 제조창의 총 공장장을 맡은 것이다. 이 공장은 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데도 판매는 제자리였다. 전임자 누구도 위기에서 이 업체를 구하지 못했던 것이다.

1978년 12월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제3회 전체회의에서 덩사오핑이 개혁개방 정책을 제안한 것을 신호탄으로 당시 중국에선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개념 아래 경제개혁의 장거리 행군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경제 효율이란 게 도대체 뭔지, 경쟁력이 무슨 의미인지, 혁신이 어떤 건지 미처 감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과거 사회주의 체제에서 시영 공장은 적자가 나면 시 예산으로 메웠다. 총공장장이 시정부에 가서 관료들을 적당히 구워삶으면 그만이었다. 관료들도 책임질 일 없이 예산만 더 배정받으면 됐다. 중앙계획 경제를 통제하는 정부 차원에서는 화폐를 더 찍어 돌리면 그만이었다. 이 때문에 생산성은 떨어지고 기업은 혁신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무사안일주의가 팽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부패는 사회주의의 문화가 돼 독버섯처럼 중국 전역에 퍼졌다.

하지만 개혁·개방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기업은 정부에 적자 보전을 무한정 요청할 수 없게 됐다. 공장이 책임을 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게 됐다. 과거 상부에서 분배해주는 원료를 받아 알아서 생산하면 정부가 나서서 여기저기 배당해서 팔아주던 시대는 끝났다. 그렇게 살아왔던 공장 관리자들은 새로운 시장경제 상황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공장 책임자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몰랐기에 대처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시영 공장 총공장장은 관료의 무덤이었다. 이미 전임자 네 명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질책을 받고 자리에서 쫓겨나거나 겁을 먹고 스스로 물러났다. 폭탄 돌리기 같은 자리 포기가 이어졌다. 장 회장도 전임자가 자리를 떠나면서 긴급 투입됐다. 총공장장 자리는 그때까지 쌓아뒀던 경력까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자리였다.

하지만 장 회장은 달랐다. 자리를 앉자마자 민첩하게 움직였다. 그는 회사를 사실상 재창업하는 과감한 혁신을 시작했다. 회사의 문제점을 살피던 그는 먼저 독일로 날아갔다. 선진 외국에서 답을 찾아보려고 한 것이다. 근공검학 선재들이 걸었던 길과 흡사했다. 애초 그는 자신의 공장에 생산설비를 납품하던 독일 파트너 업체 관계자를 만나 기술 노하우를 전수받으려고 시도했다. 이를 통해 기술 수준만 높이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생각했다. 선진국인 독일과 스위스의 공장을 둘러본 그는 낮은 기술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욱 문제는 다른 데 있다고 판단했다. 그가 판단한 가장 큰 문제점을 지명도와 품질 두 가지였다. 이 회사는 물론 당시 중국의 거의 모든 기업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두 가지이기도 했다.

귀국한 그는 자사 제품의 실상을 직원들의 뼛속까지 알리는 충격 요법을 도입했다. 품질이 얼마나 문제인지를 뼈저리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소비자가 냉장고에 하자가 있다며 물건을 반품하자 장 회장은 기회를 잡았다. 장 회장과 그 소비자는 함께 공장 창고를 돌며 제품 400대를 일일이 살폈다. 그 결과 제품의 20%에 가까운 76대에서 불량을 확인했다. 당시 중국에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달리 대응했다.

장 회장은 공장 복도에 이 76대의 불량품을 전시한 뒤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그는 생산을 맡은 직원들에게 대형 망치를 나눠주고 불량품을 깨부수라고 지시했다. 당시 냉장고 한 대의 가격이 직원 2년치 임금에 가까웠다. 직원들은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부는 눈물까지 흘렸다. 장 회장은 그런 직원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다. “오늘 우리가 불량품을 박살내지 않으면 내일 시장에서 산산이 깨질 것은 바로 우리 기업이 될 것이다.”
 소비자 속으로 들어가 기업 혁신
하이얼이 생산하는 TV. 하이얼은 글로벌 백색가전 시장의 강자로 떠오르고 있다.
그러자 직원들은 일제히 불량품을 조각내기 시작했다. 장 회장 자신도 쇠망치를 들었다. 당시 사용됐던 망치 중 하나는 지금도 본사에 전시돼 역사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 사회주의를 상징하던 망치가 품질과 경영 혁신의 상징으로 변한 것은 아이러니다. 품질과 기업혁신 문제를 솜방망이로 대응하다가는 언젠가 쇠망치를 맞을 수 있음을 가르친 것이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으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변화하게 유도했다.

장 회장의 충격 요법은 즉시 효과를 나타냈다. 직원들에게 ‘품질제일’의 인식을 강력하게 심어줬다. 사소한 실수 정도로 치부되던 불량이 무능의 상징이 됐다. 심지어 죄악시 되기까지 했다. 이는 개혁·개방을 시작한 중국에서 하나의 모범사례로 홍보됐다. 쇠망치 에피소드가 사실이라고 소문이 나고 미디어에 보도되면서 회사의 지명도도 크게 올랐다. 지명도 문제도 자연히 해결됐다. 이에 따라 이듬해부터 판매가 급속히 늘었다. 특히 베이징이나 톈진 같은 수도권에서 인기를 모았다. 당시 국가 주도의 경제체제를 운영하던 중국에서 나라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충격적인 개혁 정책을 숱하게 펼쳤다. 대표적인 것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직원들의 급여를 생산량에 따라 연계하면서 차별화한 것이었다. 직원이 업무상 실수를 했을 경우 직원들 곁에 서서 자신이 어떤 실수를 왜 하게 됐는지를 설명하게 했다. 사회주의 시절의 이데올로기 자아비판이 시장경제에도 적용된 셈이다. 본인은 물론 동료도 같은 실수를 다시는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장 회장은 생산현장의 혁신뿐 아니라 소비자와의 관계에서도 변화를 꾀했다. 소비자 피드백을 강화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선배들이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을 펼쳤다면 장 회장은 소비자 속으로 들어가 기업 혁신의 답을 구한 것이다. 흥미로운 현장 사례가 쓰촨성(四川)에서 나왔다. 그 지역의 세탁기 판매가 줄어 원인을 조사했더니 사용 중 고장이 잦다고 소문이 난 것이 원인의 하나로 파악됐다. 왜 고장이 잦았는지를 현장에서 조사했더니 기가 막힌 내용이 파악됐다. 농민들이 세탁기에 고구마를 넣고 세척하는 바람에 찌꺼기가 배수구를 막아 고장이 잦았던 것이었다. 공장에서 연구만 해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의 답은 역시 현장에 있음을 알려준 에피소드다. 장 회장은 소비자 탓만 하지 않았다. 지역 농민들에게 탓하고 엔지니어들이 정한 사용법을 교육하는 대신 디자인을 지역 농민에 맞췄다. 소비자를 제품에 맞춘 게 아니라 제품을 소비자 중심으로 바꾼 것이다. 세탁기에서 세탁물 말고 고구마 등 농산물도 세척할 수 있도록 특별 설계를 해서 웬만해선 배수구가 막히지 않도록 조치했다. 쓰촨 사건은 소비자가 이겼고, 장 회장이 승리했으며, 하이얼이 혁신의 계기를 추가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런 대대적인 혁신의 결과 이 회사는 1986년 흑자로 돌아섰다. 그 해 매출 성장률은 83%에 이르렀다. 칭다오 시정부는 그에게 시영 기업 중 다른 것도 함께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88년엔 전자레인지를 만들던 칭다오 전자를, 1991년에는 칭다오 에어컨공장과 칭다오 냉동고 공장을 1991년에 각각 인수했다. 냉장고 공장이 종합 백색가전으로 확대된 것이다. 장 회장은 중국에선 드물게 브랜드 전략을 구사했다. 1992년 회사 이름을 하이얼로 바꾸고 이를 브랜드화했다. 스위스의 생산장비업체로 칭다오 냉장고의 파트너였던 리브헤어를 중국인들이 발음하는 리브하이얼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엔 칭다오 하이얼 그룹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이듬해 하이얼그룹으로 간략하게 줄였다. 소비자들이 인식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로도 인수합병을 계속해 1995년엔 칭다오의 홍성전자를, 1997년에는 텔레비전 제조업체인 웅샨전자를 인수했다. 이런 혁신과 인수합병(M&A)을 바탕으로 시장경제 비즈니스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본격적인 수출에 나섰다. 중국 가전제품 세계시장 수출의 문을 연 것이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그는 하이얼이라는 중국 브랜드로 전세계 시장을 열었으며 이 브랜드를 해외에 각인시켰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그는 중국에서 ‘경영의 귀재’로 불린다. 중국 CCTV가 매년 선정하는 ‘감동중국인물’의 수위를 오랫동안 차지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경영을 체계화했다. 경영 현장의 혁신을 이론화해서 전파하는 능력 때문에 그는 ‘학자 기업인’ 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결과 그가 창안한 다양한 경영 원칙은 중국 기업의 글로벌 경영의 교과서로 받아들여졌다. 그는 다양한 경영 학파의 주장을 고루 흡수해 자신만의 독특한 경영전략을 내놨다. 전통적인 중국 문화에 발달한 서양 경영 기업을 결합한 형태였다. 초기에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매일매일의 문제 해결이 매일매일의 개선을 이끈다’, ‘항상 신중하라, 작은 일에도 신경을 쓰라’ 등등 지극히 당연하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실제로 현장에서 혁신과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됐다. 그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영이론을 줄이어 내놓으면서 이를 바탕으로 회사를 이끌었다. 이런 내용을 정리해 1998년 3월25일 하버드대의 요청으로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강연을 했다. 중국 기업인 중 처음으로 하버드대에서 강의한 기록이다. 그가 이끄는 하이얼 그룹은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중국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경영학 사례연구 대상으로 선정됐다.
 중국 기업들의 글로벌 경영 교과서
장 회장의 장기 목표는 하이얼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인만이 아닌 전세계의 인재를 모아 하이얼을 글로벌 기업으로 업그레이드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는 이런 “하이얼은 바다와도 같다”는 말을 자주 한다. 바다는 지구상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강물이 그곳으로 흐른다는 이야기다. 장 회장은 “하이얼은 바다와 같기 때문에 야심찬 목표를 추구하는 전세계의 재주 있는 사람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강조한다. 그는 인재를 까다롭게 뽑는다. “하이얼의 직원은 미래 성장의 등뼈이자 보증서이기 때문에 평범해선 안되며 최고라야 한다”라는 것이 그의 경영철학이기 때문이다. 장 회장이 사회주의 중국을 시장경제 국가로 성공적으로 바꾸는 데 기여한 대표적인 혁신 기업인임이 생생하게 드러나는 발언이다. 장루이민의 야심은 여전히 크다.

채인택 - 중앙일보 피플위크앤 에디터와 국제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역사와 과학기술, 혁신적인 인물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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