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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므두셀라 증후군’

[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므두셀라 증후군’

아사코와의 만남을 추억하는 피천득의 [인연]... 복고 마케팅이 흥행에 성공하는 이유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앞세워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주인공들.
‘그리워하는 데도 한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 구절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국어교과서에 실린 인연으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수필 중 하나가 됐다. 피천득은 영문학자면서 시인이지만 수필로 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올해는 그의 타계 10주기다.

[인연]은 ‘나’와 아사코와의 20여년에 걸친 세 번의 만남을 담고 있다. 17살 되던 해 봄 나는 일본 도쿄에 있는 사회교육가 M선생 댁에 유숙할 때 그의 딸 아사코를 만났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아사코는 나를 오빠 같이 따랐다. 아사코는 성심여학원 소학교 1학년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아사코와 함께 성심여학원까지 산보를 갔다. 도쿄를 떠나던 날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빰에 입을 맞추고, 자기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작은 반지를 이별의 선물로 줬다. 10여년이 지났다. 두 번째 도쿄로 갔던 날도 4월이었다. 성심여학원 영문과 3학년인 아사코는 청순하고 세련돼 보이는 영양이 돼 있었다. 조금 서먹했지만,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을 먹기 전 둘은 산보를 나갔다. 기획하지 않은 발걸음은 다시 성심여학원으로 향했다. 아사코와는 밤늦게까지 문학토론을 하다가 가벼운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또 1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제2차 세계대전이 있었고,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고, 또 한국전쟁이 있었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선생네를 찾았다. 아사코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번역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했다. 아사코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만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가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아직 싱싱해야 할 젊은 나이다. 아사코의 남편은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진주군 장교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는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지만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지나간 것은 아름답다
피천득의 수필 [인연].
피천득이 간직한 아사코와의 추억은 그리움, 그 자체다. 아사코 남편에 대해 공연한 질투심까지 느낄 정도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와 전국토를 폐허로 만든 한국전쟁 같은 엄혹한 시대적 배경 따위는 글에서 드러나지도 않는다.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결코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며 ‘지나간 것은 그리워질 것이니’라고 노래했다. 지나간 것들은 아름답다. 고생과 고난마저도 되돌아보면 즐거운 추억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문제다. 이성적인 판단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거나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기려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므두셀라 증후군 (Methuselah syndrome)’이라고 부른다. 므두셀라는 구성서에 나오는 노아의 할아버지다. 969살까지 살았던 므두셀라는 나이가 들수록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기억을 왜곡하는 도피심리와 관련이 깊다고 본다. 과거를 객관적으로 인지하기보다 좋은 기억만 선별적으로 떠올려 어려운 현실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 자기가 지나온 삶에 정당성과 자긍심을 불어넣기 위한 방어심리이기도 하다. 견디기 힘들었던 군대시절, 학창시절, 가난했던 시절이 유독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도 회상해보면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이런 심리를 마케터들이 피해갈 리 없다.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상품으로 고객을 유혹한다. 1970년대 포장을 한 새우깡이나 초코파이, 라면이 시판된다. 그 시절 교복이나 교련복을 입는 이벤트도 종종 볼 수 있다. 문화상품에서는 더 많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앞세워 흥행에 성공한 케이스다. 최근 들어 7080 가요프로그램이 부쩍 많아졌고, 아예 그 시절 노래를 리메이크해 들고 나오는 신세대 가수도 많다. 과거를 회상시키는 마케팅을 ‘레트로 마케팅(Retro marketing)’이라고 한다. 이른바 복고마케팅이다. 레트로 마케팅은 과거 세대에게는 친근함과 그리움을, 젊은 세대들은 겪어보지 못한 시기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레트로 마케팅은 현실이 어려울 때 더 잘 먹힌다는 특징이 있다. 그때 그 시절이 더 아름답고, 그립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므두셀라 증후군은 최근 한국 사회의 갈등을 푸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6070세대는 어떤 기억보다 맨손으로 이룬 산업화가 자랑스럽다. 청춘을 바쳐 이룬 산물이기에 산업화를 무시하면 참을 수가 없다. 반대로 4050세대는 목숨을 걸고 쟁취한 민주화에 대한 경험이 기억을 지배한다. 돌아보면 아름다운 과거였고, 그 아름다운 과거는 민주화 투쟁이 중심에 있다. ‘나의 과거가 아름답다’는 것, 어쩌면 한국인 모두 지독한 ‘므두셀라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첫사랑 기억을 자극하는 문학작품
피천득은 아사코에 대해 세세한 것까지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다. 심지어 아사코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말이다. 피천득은 아사코와 처음 산보를 가던 날, 아사코가 교실신장을 열고 자신이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줬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두 번째 만난 아사코는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며 신장이 없다고 답한다. 아사코가 들고나온 우산이 연두색이었다는 것과 밤늦도록 애기했던 문학 중에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이 있었다는 것도 피천득은 기억한다. 세 번째 아사코를 만났을 때 아사코의 집이 20여년 전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과 닮았다는 기억도 떠올린다. 그 집은 뾰족 지붕에 뾰족 창문이 있는 집이었다. 10년쯤 미리 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자신이 아사코와 같은 집에 살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는 대목에서는 아사코에 대한 그리움이 절정에 달한다.

수필 [인연]이 공감을 받는 것은 누구나 한번쯤은 첫사랑을 해봤을 것이고, 첫사랑을 해본 사람이면 피천득의 마음이 유별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난 4월 한 여론조사 회사가 ‘첫사랑하면 떠오르는 문학작품은’이라는 설문을 해보니 황순원의 [소나기], 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무렵] 등과 함께 피천득의 [인연]이 손꼽혔다.

피천득의 호는 금아(琴兒)다. 거문고 타고 노는 때묻지 않은 아이라는 뜻이다. 춘원 이광수가 지어줬다. 피천득은 일제강점기 때 좀 더 용감하지 않았던데 대해 생전에 후회하기도 했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 3층 민속기념관 옆에는 단출한 피천득기념관이 있다. 시간을 내 잠시 들른다면 대도심의 한가운데서 문학의 향기를 느끼는 맛이 쏠쏠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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