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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의 동백꽃 “나는 미국 스파이였다”

필리핀의 동백꽃 “나는 미국 스파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마닐라에서 클럽 운영하며 일본군 정보 수집한 미국 여성 클레어 필립스의 유혹과 음모
필립스는 1951년 미국을 순회하며 자신의 삶을 그린 영화 ‘나는 미국 스파이였다(I Was a American Spy)’ 홍보행사를 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의 진주만 미국 해군기지 기습 공격 몇 시간 뒤 일본 제국 공군은 필리핀에도 공격을 개시해 마닐라와 기타 몇몇 도시를 폭격했다. 공격이 시작됐을 때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 출신의 가수 클레어 필립스는 필리핀 수도 마닐라에 갇혔다. 몇 일 안 돼 그녀는 바탄 주의 언덕으로 피신해 병자와 부상자들을 돌봤다. 거기서 1942년 4월 일본군에게 포위된 뒤 투항하지 않고 도피했던 미군, 필리핀 게릴라 전사들을 만났다. 나중에 한 미국인 반군 지휘자로부터 마닐라로 돌아가 보급품을 보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분명 위험이 따랐지만 그녀는 요청에 응했다.

필립스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츠바키 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곧 일본군 장교들 사이에서 최고 인기 나이트 클럽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그녀를 필리핀인 살롱 주인 ‘마담 츠바키’로만 알았다. 실상 그녀는 미국인 스파이였다.
 동백나무의 운명
1943년 1월 1일 필립스는 나이트클럽 플로어로 사뿐사뿐 걸어나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조명이 그녀의 굴곡진 몸매의 실루엣을 크림색 커튼에 드리웠다.



세상에 불을 지르고 싶지 않아요
당신의 가슴에 불꽃을 피우고 싶을 뿐이에요


선탠한 듯한 피부에 검은 머리의 주인·호스테스·연기자인 필립스가 이곳 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지 두 달째. 손님은 주로 일본군 장교와 사업가 외에 그녀에게 관심을 가진 필리핀인도 일부 있었다. 필립스는 노래를 부르면서 흡족한 표정으로 사방을 돌아봤다. 클럽이 만원을 이뤄 손님들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못 하더라도 그녀의 관능적인 눈빛과 허스키한 목소리는 노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도 남았다.

모두가 츠바키의 플로어쇼를 보고 싶어 했다(츠바키는 일본의 귀하고 우아한 꽃인 ‘동백나무’를 뜻했다). 클럽은 낭만적인 도심 공원 근처의 번화한 교차로에 있었다. 공원에선 야자수와 아카시아 잎들이 마닐라만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팔랑거리며 수시로 도시를 숨 막히게 만드는 열기를 가라앉혔다. 가로등이 클럽 입구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클럽은 샌후안 대로에서 안으로 들어간 2층짜리 목조 주택이었다.

초저녁 무렵 필립스는 길게 돌아가는 계단 꼭대기에서 손님들을 맞았다. 그들은 2층으로 걸어 올라가는 동안 그녀를 올려다봤다. 길고 우아한 드레스의 갈라진 틈새가 발목부터 한쪽 허벅지 아랫부분까지 관능적인 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가슴 뛰게 만드는 또 다른 세계를 훔쳐보는 틈바구니였다. 이어 필립스는 그들을 방 안 곳곳에 놓인 10여 개의 작은 테이블이나 가장자리의 라탄 의자로 안내했다. 그들은 그 자리에 느긋하게 앉아 술을 마시며 쇼를 지켜볼 수 있었다.

츠바키 클럽의 플로어쇼는 큰 인기를 모았다. 필립스가 무대에 설 시간이 되면 그들은 모두 그녀의 냄새를 맡고 몸매를 감상할 만큼 바짝 다가앉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미국에서 유행하고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도 많은 인기를 끌었던 미국 애창곡들을 불렀다.

많은 남성이 정신을 빼앗겼다. 그녀뿐 아니라 그녀가 게이샤처럼 행동하도록 훈련시킨 매혹적인 젊은 여성들에게 푹 빠져들었다. 그들은 군인들 곁에 앉아 교태를 부리고 담뱃불을 붙여주고 외롭고 향수에 빠진 남자들에게 술을 잔뜩 퍼먹인 뒤 질문을 던진다. 이슬 같은 눈망울로 일본인 손님들에게 묻는다. 자기, 왜 그렇게 빨리 떠나야 해? 자기를 어디로 보내는 거야? 자기한테 편지 써도 돼? 언제 내게 돌아올 거야?

츠바키 클럽에는 필립스가 언급하지 않는 은밀한 삶이 있었다. 물론 십대가 다수인 젊은 여성들은 클럽에 돈 쓰러 오는 일본군 장교와 민간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나와 있었다. 때로는 한바탕의 유흥으로 끝나지 않았다. 섹스에만 관심을 가진 남성들을 위한 사창가가 마닐라에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필립스는 자신의 클럽을 뭔가 다른, 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브랜드로 인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츠바키 클럽은 여성들이 내부에서 약속을 잡은 뒤 외박 나가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 근처에 호텔방이 많았다.
 ‘더 많은 미국 놈들의 죽음을 위해 건배’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는 클레어 필립스의 이름을 딴 회의실이 있다. 거기에는 젊은 시절 그녀의 모습을 그린 유화가 걸려 있다.
저녁 일이 끝나면 필립스는 탈의실로 물러나 드레스를 벗고 화장을 지운다. 어떤 날은 방까지 따라온 남자들을 쫓아버려야 했다. 하지만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통금시간 전에 귀가하지 않으면 일본군 병사의 검문을 받고 규칙위반으로 따귀를 맞을 위험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조식을 먹고 클럽으로 출근해 모든 여성·호스테스·공연자들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그들은 일본 군인과 부대 이름,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들의 배가 어디로 가는지 정보를 수집했다. 한 주에 수차례씩 언덕의 메신저 또는 클럽 웨이터 중 한 명이 신발의 가짜 밑창 또는 쇼핑 바구니 안감 속에 보고서를 숨긴 뒤 바탄에 있는 미국인 또는 필리핀인 게릴라 접선자들에게 최신 정보를 전달할 수 있었다.

일단 정보를 수집해 몰래 보내고 나면 필립스는 저녁 공연을 준비하며 또 다시 세상에 불을 놓을 채비를 했다.

필립스가 1942년 10월 문을 열자마자 클럽은 금방 만원을 이뤘다. 거물급 손님들은 직접 시중을 들기도 했다. 1942년 후반의 어느 날 밤 그녀는 일본군 파일럿의 자리에 합석했다. 특별대우를 할 만큼 중요한 인물임이 한눈에 드러났다. 밤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술을 마시고 또 마시고 게이샤들에게 팁을 주고 그 뒤 플로어쇼가 이어졌다. 필립스는 애창곡 하나를 불렀다. 때로는 많이 사랑 받던 미국 4중창단 잉크 스팟스의 노래나 또 어떤 때는 미국의 인기곡 ‘Some of These Days’를 불렀다. 그녀는 전쟁 회고록에서 “내 노래는 흉내 내기 어려운 소피 터커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다”고 돌이켰다.

음주가무가 효과를 발휘했다. 취한 파일럿이 서툰 영어로 자랑했다. “미국은 상대가 안돼. 많은 미국인이 죽을 거야.”

밤이 깊어가는 동안 그는 앞으로 닥칠 희생자의 물결에 관해 계속 떠벌렸다. 미국 놈 수십 명의 죽음을 위해 “반자이(만세)!” 파일럿이 잔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필립스는 그와 함께 건배하며 또 한 잔을 들었다. 미국 놈 수백 명의 죽음을 위해. 모든 장교들이 건배를 위해 잔을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죽을 미국 놈들을 위해 건배. “반자이!” 필립스는 한 번 더 잔을 들어올렸다. 그녀는 그날 밤 일기에서 “더 많은 죽음을 위해 건배하며 미소 짓는 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클럽 직원들은 그녀가 그 일본군 장교를 구워삶는 모습을 경이의 눈길로 지켜봤다. 그녀는 ‘직원들은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고 일기에 썼다. ‘영국과 미국의 몰락에 건배하며 그들의 행운을 기원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파일럿과 많은 미국인의 죽음에 건배하면서 그녀는 자신도 직원들에게 내린 지침을 따랐다. 그의 비행기, 부대, 그와 일본의 전쟁 머신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건 무엇이든 정보를 캐냈다.

그러나 때로는 일본군인들과의 그런 대화가 감당하기 너무 힘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때 필립스는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것을 쏟아냈다. 그 뒤 자리로 돌아가 또 다시 미소 지으며 술 마실 준비를 했다.

“반자이!”

필리핀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 점령군에 반감을 갖고 그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와 사귀는 여성들은 근사한 호텔에서 살았지만 그 때문에 조롱당했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적군 편을 든다고 죽임을 당하는 여성도 있었다.

필립스는 일본인을 미워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었다. 그 탓에 필리핀 사람들이 때때로 거리에서 그녀를 외면했다. 가끔씩 속을 태우며 클럽 문을 닫을까도 생각했다. 술과 담배를 너무 많이 했고 항상 긴장 속에 살았다. 그녀에겐 또 다른 스트레스가 있었다. 스파이와 나이트클럽 주인 역할 말고도 아기 때 수양 딸로 들인 세살배기 딸 디안의 엄마 노릇도 해야 했다. 필립스의 유일한 피난처는 잠시 짬을 내 작은 메모장에 몇 줄 끄적이는 순간이었다.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을지 정말 걱정된다. 내 책이 위안거리다. 메모할 때만 마음을 내려 놓을 수 있다.”

많은 일본군 장교가 클럽을 거쳐갔다. 일부는 춤 이상의 것을 원했다. 한번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고 맹세했던 대령이 전투 중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것이 언덕의 게릴라 접선자에게 자신이 보낸 정보 때문이기를 바랐다.

필립스는 몇몇 일본군에게 가끔씩 연민을 느낄 때 자신을 증오했다. 그들은 젊고, 그녀에게 친절한 군인도 있었다. 또는 가족이 그립다며 그냥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전쟁은 전쟁이었다. 그녀는 모든 장교의 이름을 일일이 수집해 언덕으로 보냈다. 이들 대다수는 여자들에게 미움 살 만한 짓을 했다. 그들이 밤 늦게 술에 취해 맨손 또는 채찍이나 칼집으로 여자들을 때릴 때 특히 그랬다. 필리핀인은 비열한 학대를 당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일본군 장교들이 헌병 대장인 나가하마 대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건 분명했다.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며 깊숙이 또는 신속히 머리를 숙이지 않는다거나 명령에 느리게 반응한다는 이유로 따귀를 때리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필립스는 “이렇게 따귀 맞는 일을 얼마나 오래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오늘 밤만 두 번째”라고 썼다. 그녀는 또한 누군가 고무 호스로 자신을 때렸다고도 썼다. 그런 일이 어디서 또는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오늘은 다리가 좋아졌다. 하지만 아직도 부은 상태다. 정말 증오스럽다.”

클럽 개장 초 정보수집과 돈벌이가 잘 되던 몇 달 동안은 끊임없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잡히거나 죽을 수 있다는 지속적인 두려움이었다. 필립스는 몸을 분주히 움직이는 방법으로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달랬다. 게릴라와 포로들에게 보낼 식량과 약품을 비밀리에 조달하고, 낮에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밤에는 클럽을 운영하며 각종 정보를 수집했다.
 적과의 동침
1943년 가을 무렵 마닐라에 식량과 보급품이 떨어져가고 있었다. 물가가 오르고 때로는 맥주 사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보급품을 더 많이 보내는 게 목표였다. 맥주를 비롯한 주류가 부족한 상황에서 매출과 수입 감소는 뻔했다. 그녀는 돈을 아끼기 위해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다코타의 아파트를 포기하고 클럽으로 들어가야 했다. 적어도 통행금지 시간에 맞추려고 집까지 달려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1943년 말이 되자 식료품점에서 설탕·밀가루·맥주 심지어 과일과 채소까지 판매가 중단됐다. 기본 필수품을 배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바가지를 쓰면서도 갈수록 암시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필립스는 고가 식품 그리고 영화·책·외식 같은 취미생활을 줄이면서 허리띠를 더 졸라맸다. 그녀는 ‘지금은 최소한의 필수품만 구입한다’고 일기에 썼다. ‘모든 게 비싸다. 가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다.’

그런 압력에도 불구하고 필립스는 싸움을 계속했다. 그녀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삶을 둘러싼 압력과 거짓이 전쟁에서 미국의 승리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이 곧 끝나리라고,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1942년 재집결하기 위해 퇴각하면서 필리핀 사람들에게 “나는 돌아올 것”이라고 한 약속을 지키리라고 믿고 있었다.

- 피터 아이스너



※ [필자는 언론인이자 저술가다. 이 글은 최근 펴낸 그의 저서 ‘맥아더의 스파이들(MacArthur’s Spies: The Soldier, the Singer and the Spymaster Who Defied the Japanese in World War II)’에서 발췌·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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