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16) 산업정책 오류] ‘경쟁을 위한 경쟁’에 지나치게 집착
[1997년을 기억하는 스무 가지 방식(16) 산업정책 오류] ‘경쟁을 위한 경쟁’에 지나치게 집착
김영삼 정부의 삼성 자동차 승인은 공급 과잉 간과...SK텔레콤-CJ헬로비전 합병 금지는 해외 업체와의 경쟁 경시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심각한 불황이 닥치면 정부는 시장에 맡기고 기다리기보다는 재정정책을 적극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케인스적인 접근은 경쟁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경쟁은 이론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국내 시장의 규모와 같은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경쟁을 위한 경쟁’을 도입할 경우 경쟁에 따른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해당 산업의 참가자들 모두의 손실만 키우는 과정만 길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국내 시장이 과점 상태이더라도 신규 참여를 허용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신규 참여 허용 외에 점진적인 시장 개방과 같은 대안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김영삼 정부의 삼성 자동차 승인은 실책이었다.
경쟁 원칙을 경직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산업정책의 오류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에는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합병을 금지한 결정이 내려졌다. 현재 국내 시장은 과점 상태이지만 시장이 개방돼 글로벌 업체와의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다. 이 결정은 더구나 관련 산업 간 장벽이 무너지는 글로벌 추세도 반영하지 않았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입에 대한 찬반 논란은 ‘경쟁’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삼성의 자동차 진출이 경쟁을 촉진해 국내 자동차산업에 도움이 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이 쟁점을 놓고 ‘자유경쟁론’은 삼성의 자동차 사업을 찬성했고 ‘적정경쟁론’은 반대했다. 적정경쟁론은 산업에 따라 적정한 수준의 경쟁 정도가 있고 경쟁이 그 단계를 넘어서면 경쟁의 비용이 편익보다 크게 된다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당시 상황에서 추가 경쟁은사회적 낭비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경쟁론자는 경쟁은 치열할수록 바람직하므로 신규 진입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경제주체 간에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지면 시장기구를 통해 자원배분이 가장 효율적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교과서적인 경쟁주의자들: 유경쟁론을 대표한 인물 중 하나가 유승민 현재 바른정당 의원이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던 그는 1994년 8월 열린 한 세미나에서 “삼성의 진입과 관련한 주요 쟁점을 검토한 결과 효율적 산업조직 개편이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역행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부설 산업경영연구소가 개최한 ‘21세기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산업정책방향’ 세미나에서였다. 그의 논리를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 21세기 성장과 수출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한데도 진입 규제가 계속돼 독과점 체제가 굳어졌다.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입할 경우 나중에 경쟁의 승자가 누구이든 비효율적 사업자가 도태하고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의 과점기업을 대체할 능력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상호 세종대 교수는 “그러한 시각은 정부의 능력과 정책성과 등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기업의 자율적 환경변화 적응 능력은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적인 논의의 주류를 형성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삼성의 자동차시장 신규 진입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재벌기업의 폐해는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허용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공병호 연구위원은 진입장벽을 철폐해 독점기업의 초과이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경제학자들도 비효율적인 사업자를 도태시켜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경쟁이 치열할수록 바람직하므로 신규 진입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신규 진입으로 산업의 평균 가동률이 떨어져도 설비과잉이 아니라는 희한한 논리도 나왔다. ‘기업은 설비투자 규모를 결정할 때 이미 과잉설비가 생겨날 가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궤변이었다. ‘과잉설비가 고려된 한계기대수익이 한계기대비용과 일치하는 수준에서 설비투자 규모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삼성의 프레임에 갇힌 논의: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찬반은 삼성이 짠 프레임 안에서 맴돌았고, 이는 정답 도출을 어렵게 했다. 즉, 당시 논의는 ‘삼성이 새로 들어온다는데, 자동차산업 발전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묶여 있었다. 올바른 물음은 ‘한국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였다.
이와 관련해 1997년 무렵 세계 자동차시장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세계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능력 과잉에 허덕이고 있었다. 선진국의 자동차 판매는 정체 상태였다. 다른 지역 수요는 늘고 있었지만, 공급 능력이 그보다 더 빨리 확충됐다. 그 결과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최대 생산능력은 픽업과 스포츠카를 포함해 연간 6800만대였다. 1996년 실제 생산량은 5000만대로 생산능력의 73%였다. 자동차 제조업체는 생산능력의 80% 이상을 생산해야 괜찮은 수익을 냈다. 생산능력과 수요의 격차가 커지면서 이익률이 하락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아시아의 자동차공장은 1990년대 말에 생산능력의 4분의 3을 돌릴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그렇게 만들 큰 요인으로 삼성의 진출을 꼽았다. 이 매체는 삼성은 내수시장의 포화와 이 지역 내 경쟁 업체들의 공장 신설에도 자동차산업에 진입을 감행했다고 지적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산업연구원(KIET)가 내놓은 답이었다. 그러나 채택되지 않았다. KIET는 1994년 4월 한국자동차공업협회의 용역을 받아 ‘21세기를 향한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 방향’ 최종보고서를 냈다. KIET는 “한국 자동차산업은 보호된 내수시장 덕분에 급성장했지만 시장개방을 앞두고 있으며 국내의 수요가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공급과잉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며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가격경쟁력으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이어 삼성의 신규 참여가 “어느 정도 과잉투자를 유발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또 “규모의 경제를 고려할 때 2개 업체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신규 진입으로 해외 시장을 뚫기는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당시 상공자원부는 이 보고서를 인용해 삼성의 승용차 진출 불가 방침을 정리했다. 삼성은 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짓겠다며 지역 여론을 등에 업는 전략을 쓴다. 1994년 10월 경제팀이 경질되자 삼성은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설득했다. 삼성은 자동차 사업 진출을 공식으로 표명한 지 8개월 만인 1994년 12월에 이를 관철했다. 최종 절차는 외자도입법 23조의 외국 기술 도입 신고에 대한 승인이었다. 삼성은 4년 만인 1998년 12월에 자동차 사업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2월 SM5 시리즈를 처음 출시했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유승민 의원의 논리와 시나리오에 비춰보자. 삼성자동차가 기존 독과점 체제를 깨고 경쟁을 도입했나? 삼성자동차는 본격 경쟁에 돌입하기 전에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한국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올바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선택들의 조합이었다. 아시아시장 진출이라는 목표 아래 한국을 교두보로 삼고자 하는 선진 자동차회사와의 제휴, 국내 업체 간 인수합병을 통한 규모 달성, 국내 업체들 사이의 협조적인 경쟁, 기술 개발 등과 관련한 정부의 노력, 단계적인 시장 개방을 통한 경쟁 촉진…. 정답의 목록에 ‘삼성의 신규 진입 허용 외에는 해법이 없다’는 결론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성자동차의 초기 생존 기반은 국내 시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이미 공급초과 상태였다. 공급과잉 시장에 진입한 신규 참여자는 자신을 비롯한 업체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대신 시장점유율을 둘러싼 제로섬 경쟁을 촉발한다. 그 결과 업체들의 이익이 줄어들고 이는 세계 시장을 둘러싼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기술 개발 투자의 여력이 줄어드는 제약 요인이 된다. 한편 한계에 몰린 기업은 쓰러진다. 무너진 업체는 다른 기업으로 인수된다. 경제 전체적으로 인수된 부분에 해당하는 자원의 장비와 금융 부실이 발생한다.
한국 자동차시장의 독과점으로 인한 산업 경쟁력 저하와 소비자후생 감소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자동차시장 개방이었다. 국내 시장에 제조 업체를 하나 추가하는 대신 시장을 개방해 많은 외국 업체를 불러 국내 시장을 과점한 업체들이 이들과 경쟁하도록 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왕 세계화의 깃발을 든 만큼 시장개방을 통한 경쟁정책을 폈어야 했다. 삼성자동차 사례의 교훈은 경쟁 촉진을 위한 산업정책은 시장개방을 주요 정책 변수로 놓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수입이 완전히 개방된 분야에서는 독과점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기업 결합을 가로막을 일이 아니라는 지침이 나온다.
전철 밟은 SK텔레콤 - CJ헬로비전 합병 금지: 경쟁 촉진 정책을 경직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을 공정거래위원회가 금지한 일이다. 삼성자동차 진입 승인은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 신규 참여자를 받아들인 것이었고,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기업결합에 대한 공정위의 금지는 경쟁 저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기업결합에 대한 금지는 국경으로 갈리는 시장의 경계가 사라지는 가운데 방송시장과 통신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 비추어 시대착오적이다. 공정위는 두 회사가 합쳐질 경우 국내 일부 지역에서 점유율이 너무 높아진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두 회사가 결합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글로벌 회사가 국내 시장 전역을 공략해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나아가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열린 상황에서, 좁은 국내 시장 중 일부 지역에서의 점유율을 문제 삼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SK텔레콤은 2015년 11월 2일 CJ헬로비전에 대한 M&A를 추진한다고 발표하고 12월 1일 이에 대한 인가신청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경쟁 업체들은 이동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과 케이블방송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이 결합하면 국내 방송·통신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공정위는 심사를 7개월 이상 끈 끝에 2016년 7월 4일 두 회사에 합병금지 명령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이어 7월 15일 전원회의를 열고 합병금지를 최종 결정하고 이를 18일 발표했다.
공정위는 두 업체가 결합해 CJ헬로비전과 SK브로드밴드 가입자를 합하면 CJ헬로비전의 23개 방송권역 중 21개 권역에서 1위 사업자(점유율 기준)가 돼 시장경쟁을 제한해 유료방송 요금 인상 압력이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은 이미 각각 이동통신시장과 알뜰폰시장의 1위 사업자여서 이번 기업결합이 승인될 경우 해당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공정위의 이 결정이 통신시장과 방송시장을 넘어 영화계까지 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는 글로벌 추세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에서는 방송·통신·미디어·엔터테인먼트 업체 간 인수합병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2014년에 통신업체 AT&T가 디렉TV를 인수했고 케이블 업체 컴캐스트는 NBC유니버설을 사들였다. 2015년에는 통신업체 버라이즌이 AOL을 아울렀고 2016년엔 컴캐스트가 드림웍스를 인수했고 케이블업체 차터커뮤니케이션은 타임워너케이블을 사들였다. 또 AT&T는 타임워너 인수를 추진 중이다. 유럽에서는 2014년 스페인 통신업체 텔레포니카가 위성방송사 카날플러스를 인수했다. 영국 이동통신사 보다폰은 앞서 2013년에 독일 최대 케이블TV 업체 카벨도이칠란트 등을 합병했다. 스페인 이통사 텔레포니카는 네덜란드 이통사 KPN의 독일법인인 E-플러스를 사들였다. 또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로 지난해 국내에 진출한 넷플릭스는 자체 콘텐트 제작을 늘리면서 할리우드와 경쟁하고 있다. 애플과 페이스북도 콘텐트 자체 제작에 뛰어들었다. 애플은 지난 6월 프로듀서들을 영입해 최근 영상·TV 프로그램 제작팀을 구성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페이스북이 내년에 자체 콘텐트 제작에 1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개방된 분야는 대규모 합병 승인”: 개방된 시장에서의 경제 정책에서 공정위는 과거에 비해 뒷걸음질쳤다. 전윤철 공정위원장은 2000년 3월 “수입이 자유롭고 완전 개방된 분야에서는 대규모 합병을 승인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겠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앞서 1999년에는 경쟁제한 외에 산업합리화와 해당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고려해 기업결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두 업체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95%에 이르게 되는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를 허용한 것이다. 조건은 두 업체가 생산하는 1~5t 트럭의 국내 판매가격 인상률을 수출 가격 인상률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쟁정책은 통상정책과 다로 떼어 결정할 일이 아니다. 특히 글로벌 시장의 변화와 국내 업체의 대응이라는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20여년 전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우고서도 활용하지 않는 교훈이다. 만약 김영삼 정부가 삼성그룹의 자동차 사업 진출을 끝까지 막았다면 어땠을까? 기아자동차 처리에 덜 애를 먹고 시일도 덜 걸리지 않았을까? 그래서 한국의 문제해결 능력에 대한 외부의 부정적인 평가가 회복 불가능할 지경으로 악화되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기아는 다른 재벌들처럼 방만하게 몸집을 불렸다가 자금난에 처했다. 계열사 가운데 기산이 먼저 1997년 4월에 부도위기에 처했고 5월에는 아시아자동차, 6월에는 기아자동차의 자금이 말랐다. 기아자동차는 7월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됐다.
기아의 김선홍 회장과 노조는 반(反) 삼성 정서를 부추기면서 일부 언론매체와 시민단체를 움직여 생존을 모색했다.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기아에 대해 그릇된 정보를 퍼뜨려 기아의 부실화를 부추겨왔다”며 여론을 오도했다. 기아 노조는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 등과 함께 삼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는 등 ‘투쟁’에 돌입했다. 일부 언론은 ‘정부가 삼성과 공모해 기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퍼뜨렸다.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등 20여개 시민단체는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을 결성하고 “모범적 국민기업인 기아는 국민들이 함께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아사태는 자금 부족으로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1997년 7월 15일 이후 약 100일을 끈 끝에 10월 22일 법정관리로 결론이 났다. 부도유예협약이 9월 29일 종료된 후 곧장 법정관리로 간 경우와 비교하면 23일이 더 걸렸다.
기아차 처리 지연은 삼성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기아가 시장원리에 따라 처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빌미가 됐다. 삼성의 자동차 진출은 그 자체로도 패착이었고, 기아차 처리에도 악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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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과 정부의 역할에 대한 케인스적인 접근은 경쟁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다. 경쟁은 이론적으로 바람직하다. 그러나 국내 시장의 규모와 같은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채 ‘경쟁을 위한 경쟁’을 도입할 경우 경쟁에 따른 바람직한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 해당 산업의 참가자들 모두의 손실만 키우는 과정만 길어질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국내 시장이 과점 상태이더라도 신규 참여를 허용하는 데에는 신중해야 한다. 신규 참여 허용 외에 점진적인 시장 개방과 같은 대안이 있다. 이런 측면에서 김영삼 정부의 삼성 자동차 승인은 실책이었다.
경쟁 원칙을 경직적으로 지키고자 하는 산업정책의 오류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최근에는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합병을 금지한 결정이 내려졌다. 현재 국내 시장은 과점 상태이지만 시장이 개방돼 글로벌 업체와의 경쟁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오판이다. 이 결정은 더구나 관련 산업 간 장벽이 무너지는 글로벌 추세도 반영하지 않았다.
삼성의 자동차산업 진입에 대한 찬반 논란은 ‘경쟁’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삼성의 자동차 진출이 경쟁을 촉진해 국내 자동차산업에 도움이 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이 쟁점을 놓고 ‘자유경쟁론’은 삼성의 자동차 사업을 찬성했고 ‘적정경쟁론’은 반대했다. 적정경쟁론은 산업에 따라 적정한 수준의 경쟁 정도가 있고 경쟁이 그 단계를 넘어서면 경쟁의 비용이 편익보다 크게 된다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당시 상황에서 추가 경쟁은사회적 낭비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유경쟁론자는 경쟁은 치열할수록 바람직하므로 신규 진입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경제주체 간에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지면 시장기구를 통해 자원배분이 가장 효율적으로 된다고 주장했다.
교과서적인 경쟁주의자들: 유경쟁론을 대표한 인물 중 하나가 유승민 현재 바른정당 의원이다. 당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던 그는 1994년 8월 열린 한 세미나에서 “삼성의 진입과 관련한 주요 쟁점을 검토한 결과 효율적 산업조직 개편이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역행할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부설 산업경영연구소가 개최한 ‘21세기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산업정책방향’ 세미나에서였다. 그의 논리를 더 들어보자.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이 21세기 성장과 수출을 주도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한데도 진입 규제가 계속돼 독과점 체제가 굳어졌다. 삼성이 자동차산업에 진입할 경우 나중에 경쟁의 승자가 누구이든 비효율적 사업자가 도태하고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의 과점기업을 대체할 능력을 배양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대해 이상호 세종대 교수는 “그러한 시각은 정부의 능력과 정책성과 등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기업의 자율적 환경변화 적응 능력은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제적인 논의의 주류를 형성한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삼성의 자동차시장 신규 진입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는 재벌기업의 폐해는 새로운 기업의 진입을 허용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공병호 연구위원은 진입장벽을 철폐해 독점기업의 초과이윤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경제학자들도 비효율적인 사업자를 도태시켜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경쟁이 치열할수록 바람직하므로 신규 진입을 막을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신규 진입으로 산업의 평균 가동률이 떨어져도 설비과잉이 아니라는 희한한 논리도 나왔다. ‘기업은 설비투자 규모를 결정할 때 이미 과잉설비가 생겨날 가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라는 궤변이었다. ‘과잉설비가 고려된 한계기대수익이 한계기대비용과 일치하는 수준에서 설비투자 규모가 결정된다’는 것이었다.
삼성의 프레임에 갇힌 논의: 삼성의 자동차 사업에 대한 찬반은 삼성이 짠 프레임 안에서 맴돌았고, 이는 정답 도출을 어렵게 했다. 즉, 당시 논의는 ‘삼성이 새로 들어온다는데, 자동차산업 발전과 관련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묶여 있었다. 올바른 물음은 ‘한국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해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였다.
이와 관련해 1997년 무렵 세계 자동차시장의 상황을 살펴보자. 당시 세계 자동차 업체들은 생산능력 과잉에 허덕이고 있었다. 선진국의 자동차 판매는 정체 상태였다. 다른 지역 수요는 늘고 있었지만, 공급 능력이 그보다 더 빨리 확충됐다. 그 결과 세계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최대 생산능력은 픽업과 스포츠카를 포함해 연간 6800만대였다. 1996년 실제 생산량은 5000만대로 생산능력의 73%였다. 자동차 제조업체는 생산능력의 80% 이상을 생산해야 괜찮은 수익을 냈다. 생산능력과 수요의 격차가 커지면서 이익률이 하락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전문가들을 인용해 “아시아의 자동차공장은 1990년대 말에 생산능력의 4분의 3을 돌릴 수 있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그렇게 만들 큰 요인으로 삼성의 진출을 꼽았다. 이 매체는 삼성은 내수시장의 포화와 이 지역 내 경쟁 업체들의 공장 신설에도 자동차산업에 진입을 감행했다고 지적했다.
정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산업연구원(KIET)가 내놓은 답이었다. 그러나 채택되지 않았다. KIET는 1994년 4월 한국자동차공업협회의 용역을 받아 ‘21세기를 향한 한국 자동차산업의 발전 방향’ 최종보고서를 냈다. KIET는 “한국 자동차산업은 보호된 내수시장 덕분에 급성장했지만 시장개방을 앞두고 있으며 국내의 수요가 둔화되고 있는 가운데 공급과잉이 점점 심화되고 있다”며 “기술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가격경쟁력으로는 버티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이어 삼성의 신규 참여가 “어느 정도 과잉투자를 유발할 것인지는 예측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또 “규모의 경제를 고려할 때 2개 업체로 재편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이라며 “신규 진입으로 해외 시장을 뚫기는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
당시 상공자원부는 이 보고서를 인용해 삼성의 승용차 진출 불가 방침을 정리했다. 삼성은 부산에 승용차 공장을 짓겠다며 지역 여론을 등에 업는 전략을 쓴다. 1994년 10월 경제팀이 경질되자 삼성은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 등을 설득했다. 삼성은 자동차 사업 진출을 공식으로 표명한 지 8개월 만인 1994년 12월에 이를 관철했다. 최종 절차는 외자도입법 23조의 외국 기술 도입 신고에 대한 승인이었다. 삼성은 4년 만인 1998년 12월에 자동차 사업을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2월 SM5 시리즈를 처음 출시했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주문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를 유승민 의원의 논리와 시나리오에 비춰보자. 삼성자동차가 기존 독과점 체제를 깨고 경쟁을 도입했나? 삼성자동차는 본격 경쟁에 돌입하기 전에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한국 자동차산업 발전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올바른 물음에 대한 답은 다음 선택들의 조합이었다. 아시아시장 진출이라는 목표 아래 한국을 교두보로 삼고자 하는 선진 자동차회사와의 제휴, 국내 업체 간 인수합병을 통한 규모 달성, 국내 업체들 사이의 협조적인 경쟁, 기술 개발 등과 관련한 정부의 노력, 단계적인 시장 개방을 통한 경쟁 촉진…. 정답의 목록에 ‘삼성의 신규 진입 허용 외에는 해법이 없다’는 결론은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삼성자동차의 초기 생존 기반은 국내 시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국내 시장은 이미 공급초과 상태였다. 공급과잉 시장에 진입한 신규 참여자는 자신을 비롯한 업체들의 경쟁력을 키우는 대신 시장점유율을 둘러싼 제로섬 경쟁을 촉발한다. 그 결과 업체들의 이익이 줄어들고 이는 세계 시장을 둘러싼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기술 개발 투자의 여력이 줄어드는 제약 요인이 된다. 한편 한계에 몰린 기업은 쓰러진다. 무너진 업체는 다른 기업으로 인수된다. 경제 전체적으로 인수된 부분에 해당하는 자원의 장비와 금융 부실이 발생한다.
한국 자동차시장의 독과점으로 인한 산업 경쟁력 저하와 소비자후생 감소에 대처하는 효과적인 방법은 자동차시장 개방이었다. 국내 시장에 제조 업체를 하나 추가하는 대신 시장을 개방해 많은 외국 업체를 불러 국내 시장을 과점한 업체들이 이들과 경쟁하도록 해야 했다. 김영삼 정부는 이왕 세계화의 깃발을 든 만큼 시장개방을 통한 경쟁정책을 폈어야 했다. 삼성자동차 사례의 교훈은 경쟁 촉진을 위한 산업정책은 시장개방을 주요 정책 변수로 놓고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수입이 완전히 개방된 분야에서는 독과점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기업 결합을 가로막을 일이 아니라는 지침이 나온다.
전철 밟은 SK텔레콤 - CJ헬로비전 합병 금지: 경쟁 촉진 정책을 경직적으로 적용하는 모습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최근의 대표적인 사례는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합병(M&A)을 공정거래위원회가 금지한 일이다. 삼성자동차 진입 승인은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 신규 참여자를 받아들인 것이었고,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기업결합에 대한 공정위의 금지는 경쟁 저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의 기업결합에 대한 금지는 국경으로 갈리는 시장의 경계가 사라지는 가운데 방송시장과 통신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는 상황에 비추어 시대착오적이다. 공정위는 두 회사가 합쳐질 경우 국내 일부 지역에서 점유율이 너무 높아진다는 점을 우려했다. 그러나 두 회사가 결합한 것보다 훨씬 더 규모가 큰 글로벌 회사가 국내 시장 전역을 공략해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나아가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이 열린 상황에서, 좁은 국내 시장 중 일부 지역에서의 점유율을 문제 삼은 것은 현실적이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다.
SK텔레콤은 2015년 11월 2일 CJ헬로비전에 대한 M&A를 추진한다고 발표하고 12월 1일 이에 대한 인가신청서를 정부에 제출했다. 경쟁 업체들은 이동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과 케이블방송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이 결합하면 국내 방송·통신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것이라며 반발했다. 공정위는 심사를 7개월 이상 끈 끝에 2016년 7월 4일 두 회사에 합병금지 명령을 담은 심사보고서를 발송했다. 이어 7월 15일 전원회의를 열고 합병금지를 최종 결정하고 이를 18일 발표했다.
공정위는 두 업체가 결합해 CJ헬로비전과 SK브로드밴드 가입자를 합하면 CJ헬로비전의 23개 방송권역 중 21개 권역에서 1위 사업자(점유율 기준)가 돼 시장경쟁을 제한해 유료방송 요금 인상 압력이 생길 수 있다고 내다봤다. 또 SK텔레콤과 CJ헬로비전은 이미 각각 이동통신시장과 알뜰폰시장의 1위 사업자여서 이번 기업결합이 승인될 경우 해당 시장의 경쟁을 저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업계와 전문가들은 공정위의 이 결정이 통신시장과 방송시장을 넘어 영화계까지 시장의 경계가 무너지는 글로벌 추세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에서는 방송·통신·미디어·엔터테인먼트 업체 간 인수합병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2014년에 통신업체 AT&T가 디렉TV를 인수했고 케이블 업체 컴캐스트는 NBC유니버설을 사들였다. 2015년에는 통신업체 버라이즌이 AOL을 아울렀고 2016년엔 컴캐스트가 드림웍스를 인수했고 케이블업체 차터커뮤니케이션은 타임워너케이블을 사들였다. 또 AT&T는 타임워너 인수를 추진 중이다. 유럽에서는 2014년 스페인 통신업체 텔레포니카가 위성방송사 카날플러스를 인수했다. 영국 이동통신사 보다폰은 앞서 2013년에 독일 최대 케이블TV 업체 카벨도이칠란트 등을 합병했다. 스페인 이통사 텔레포니카는 네덜란드 이통사 KPN의 독일법인인 E-플러스를 사들였다. 또 세계 최대 유료 동영상 스트리밍 업체로 지난해 국내에 진출한 넷플릭스는 자체 콘텐트 제작을 늘리면서 할리우드와 경쟁하고 있다. 애플과 페이스북도 콘텐트 자체 제작에 뛰어들었다. 애플은 지난 6월 프로듀서들을 영입해 최근 영상·TV 프로그램 제작팀을 구성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페이스북이 내년에 자체 콘텐트 제작에 10억 달러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개방된 분야는 대규모 합병 승인”: 개방된 시장에서의 경제 정책에서 공정위는 과거에 비해 뒷걸음질쳤다. 전윤철 공정위원장은 2000년 3월 “수입이 자유롭고 완전 개방된 분야에서는 대규모 합병을 승인하는 쪽으로 정책을 펴겠다”고 말했다. 공정위는 앞서 1999년에는 경쟁제한 외에 산업합리화와 해당 산업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고려해 기업결합을 조건부로 승인했다. 두 업체의 시장점유율 합계가 95%에 이르게 되는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를 허용한 것이다. 조건은 두 업체가 생산하는 1~5t 트럭의 국내 판매가격 인상률을 수출 가격 인상률 이하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경쟁정책은 통상정책과 다로 떼어 결정할 일이 아니다. 특히 글로벌 시장의 변화와 국내 업체의 대응이라는 산업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20여년 전 비싼 수업료를 치르고 배우고서도 활용하지 않는 교훈이다.
[박스기사] 만약 삼성차가 없었다면 기아차 해법은?
기아의 김선홍 회장과 노조는 반(反) 삼성 정서를 부추기면서 일부 언론매체와 시민단체를 움직여 생존을 모색했다. 김선홍 회장은 “삼성이 기아에 대해 그릇된 정보를 퍼뜨려 기아의 부실화를 부추겨왔다”며 여론을 오도했다. 기아 노조는 전국자동차산업노동조합연맹 등과 함께 삼성을 규탄하는 집회를 갖는 등 ‘투쟁’에 돌입했다. 일부 언론은 ‘정부가 삼성과 공모해 기아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하고 퍼뜨렸다. 공동체의식개혁국민운동협의회 등 20여개 시민단체는 ‘기아 살리기 범국민운동연합’을 결성하고 “모범적 국민기업인 기아는 국민들이 함께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아사태는 자금 부족으로 기아가 부도유예협약 대상이 된 1997년 7월 15일 이후 약 100일을 끈 끝에 10월 22일 법정관리로 결론이 났다. 부도유예협약이 9월 29일 종료된 후 곧장 법정관리로 간 경우와 비교하면 23일이 더 걸렸다.
기아차 처리 지연은 삼성의 탓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성자동차는 기아가 시장원리에 따라 처리되는 것을 반대하는 빌미가 됐다. 삼성의 자동차 진출은 그 자체로도 패착이었고, 기아차 처리에도 악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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