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일어나 먼저 죽여라”

“일어나 먼저 죽여라”

이스라엘 언론인 로넨 베르그만, 신저에서 정보기관 모사드의 ‘표적 제거’ 작전과 관련된 실화 폭로해
사진:NEWSIS(10)
스파이를 다룬 소설은 주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이언 플레밍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해군 정보장교로 복무한 경험을 기초로 소설 ‘007 제임스 본드(James Bond)’ 시리즈를 썼다. 존 르 카레(본명 데이비드 콘웰)는 영국 정보기관 MI6에서 일하는 동안 자신의 첫 첩보 스릴러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를 집필했다. 제이슨 매튜스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으로 모스크바에서 옛 소련 정보기관 KGB의 감시팀을 따돌린 경험을 토대로 소설 ‘레드 스패로(Red Sparrow)’ 3부작을 펴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언론인 로넨 베르그만(45)은 그들과는 약간 다른 접근법으로 스파이와 암살이라는 어둔 세계의 실상을 파헤쳤다. 1990년 이스라엘 방위군에 징집된 그는 3년 동안 방위군 범죄수사국에서 정보원을 포섭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동안 그는 군 내부의 부패와 마약 거래, 무기 밀매 등의 범죄를 조사했다. 베르그만은 그곳에서 배운 기술을 활용해 이스라엘의 3대 정보국(해외정보국 모사드, 국내보안국 신베트, 군정보국 아만)의 은밀한 역사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기록했다. 최근 ‘일어나 먼저 죽여라: 이스라엘 표적 암살의 비사(Rise and Kill First: The Secret History of Israel’s Targeted Assassinations)’를 펴낸 그는 출판 홍보행사의 인터뷰에서 “실제 정보원들을 모집하고 관리한 경험과 훈련 덕분에 그들이 처하는 상황과 사고방식을 잘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다수 이스라엘 남자가 그렇듯이 베르그만은 지금도 예비군에 소속돼 있다. 법에 따라 51세까지 의무적으로 복무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 복무와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관한 리포팅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말했다. “난 내가 군에서 맡은 직무에 관해선 쓰지 않는다. 지금 내가 리포팅하는 것과 실제 나의 직무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그의 군 경력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에서 신뢰를 얻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에서 최대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 예디오트 아로노트의 선임 정치·군사 분석가로 일하는 그는 칼럼과 책(지금까지 9권을 써냈다)을 통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내부 상황을 자주 폭로한다. 그러면서 베르그만은 전 세계 국가안보 전문가들의 필독서 작가로 부상했다. 그는 ‘일어나 먼저 죽여라’를 쓰기 위해 이스라엘의 전·현직 관리 1000여 명을 인터뷰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적을 대상으로 한 정보기관들의 ‘표적 암살’(그들의 은어로 ‘부정적인 취급’이라고 표현된다) 60년 약사를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적은 처음엔 나치 독일의 전범 도망자와 로켓 과학자였지만 그 후로 아랍 지도자들, 이라크 핵프로그램 관리들(사담 후세인 시절), 이란 핵프로그램 소속 과학자들까지 다양하게 변해왔다. 물론 늘 그렇듯이 팔레스타인 지도자들과 레바논의 친이란 무장 정파 헤즈볼라의 지도부도 그들의 ‘제거 대상’이었다.‘일어나 먼저 죽여라’는 제목은 유대인의 지혜를 담은 ‘탈무드’에 나오는 ‘누군가 너를 죽이러 오면 일어나 그를 먼저 죽여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의 책이 ‘이스라엘의 주요 암살작전이 끝없이 이어져 마치 경찰 사건기록부처럼 읽힌다’는 서평도 있다. 그러나 이 책(약 750쪽 분량으로 주석이 많이 달렸다)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수장들이 고백하는 도덕적인 거리낌과 실수, 실책을 담았다는 점에서 특히 의미가 크다. 잘못된 표적이나 무고한 제3자를 실수로 암살하거나 평화협상에서 좋은 파트너가 됐을 법한 팔레스타인 지도자를 제거한 일 등이 그런 사례다.

1995년 모사드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알려진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이슬람 지하드’ 지도자 파티 알-시카키의 16주기를 맞아 무력 시위를 벌이는 대원들(2011년). / 사진:XINHUA-NEWSIS
집필하면서 진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는지 기자가 묻자 그는 “물론이다”라고 말했다. “하루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텔아비브 북부의 한 카페에서 공군 장교 출신과 만나 다양한 주제를 두고 얘기를 나눴다. 도중에 그는 내게 ‘오랫동안 비밀로 간직했지만 이제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말했다.”

1982년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던 아리엘 샤론의 지시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이 민간 항공기를 격추시킬 뻔했다는 일화였다. 모사드가 그 여객기에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수반이었던 야세르 아라파트가 탑승했다고 잘못 판단한 결과였다.

모사드가 마지막 순간 착오를 발견해 공군에 통보함으로써 수많은 탑승객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다. 그중엔 아라파트와 빼닮은 동생 파티, 팔레스타인 적십자사를 설립한 소아과 의사, 또 그가 이집트 카이로로 데려가 치료 받도록 하려던 부상한 팔레스타인 어린이 30명이 포함돼 있었다.

또 책에서 베르그만은 아라파트의 2004년 사망이 샤론 장관(오랫동안 아라파트 암살에 집착했다)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을지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군검열관이 그 문제에 관한 언급을 금지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밝힐 순 없다고 적었다(그러나 프랑스 검찰은 독살 논란을 일축하고 아라파트의 죽음이 자연사임을 재확인했다).

베르그만은 “지난 20년 동안 난 이스라엘군의 검열과 정부를 상대로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그는 몇 차례 심문을 당했다며 “당국이 나의 취재원을 고발하기도 했다”고 돌이켰다. “2010~2011년 육군 참모총장이 나를 반역 혐의로 조사하라고 이스라엘 법무부에 공식 요구했다. 그들은 나와 내 책을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그런 조사 과정에서 베르그만은 많은 우군을 얻었다. 특히 모사드 내부에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최근의 모사드 간부들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이끄는 우익 정부와 가끔씩 공개적으로 불화를 빚었다). 따라서 타미르 파르도 전 모사드 국장이 그의 책을 호평한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여러 모사드 전 국장이 베르그만의 취재원이었다). 파르도 전 국장은 “이 주제에 관한 책 중 가장 인상적”이라며 “허구적인 소설이 아니라 실제 취재를 통해 쓴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가했다.소설과 영화에선 모사드가 실제보다 과장된 거창한 기관으로 묘사된다. 허구가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2005년 영화 ‘뮌헨’에서 묘사된 것처럼 1972년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 11명과 독일 경찰 1명을 살해한 팔레스타인인 테러단 ‘검은 9월단’ 대원을 모사드 요원들이 한명씩 추적해 암살했다는 것이 가장 터무니없는 허구 중 하나다. 베르그만은 “뮌헨 올림픽 학살 관련자 대다수는 잡히거나 암살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물론 모사드는 누구든 가능하다면 암살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거한 표적 대다수는 뮌헨 사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는 암살단 팀장이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인이 쓴 책을 바탕으로 제작됐지만 그 저자는 사실은 텔아비브 공항의 ‘수하물 조사관’이었다고 베르그만이 설명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고 발표하자 서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이 반대시위를 하며 이스라엘군과 대치했다. / 사진:AP-NEWSIS
그러나 실제로 모사드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인 표적 수십 명을 ‘제거’했다. 또 헤즈볼라를 상대로도 무자비한 작전을 펼쳤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사건에서 2008년 모사드는 CIA의 협조를 받아 헤즈볼라 사령관이던 이마드 무그니예를 자동차 폭탄으로 암살했다.

베르그만에 따르면 모사드의 암살 작전은 총리의 승인이 있어야 했다. 모사드는 ‘독자적인 기관’이 아니다. 총리의 승인이 떨어져야 암살팀을 파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보기관이 반드시 총리와 뜻이 맞는 건 아니다. 네타냐후 총리는 2015년 총선을 앞두고 이란의 핵폭탄에 대한 국민의 두려움을 부추기며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프로그램을 표적으로 선제공격할 수 있다고 시사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자신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군사훈련도 실시했다. 그러자 일부 전직 정보기관 책임자들이 과잉 대응을 경고하고 나섰다. 모사드에서 무자비하기로 악명 높았던 메이어 다간 전 국장은 “정신차려라!”며 경종을 울렸다. 네타냐후 총리의 노선에 반대하는 그는 “이스라엘 국민이 두려움과 불안의 인질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우리 국민은 그런 공포에 밤낮으로 시달린다”고 말했다.

과거엔 그런 위엄 있는 이스라엘인의 발언이 ‘신성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베르그만은 책에서 지적했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는 “옛 엘리트층의 힘이 거의 다 빠져버렸다”고 설명했다. “아랍 땅에 사는 유대인, 유대교 정통파, 우익 등의 새로운 엘리트층이 부상하고 있다.” 온건 노선이 무시되고 극단주의가 유행한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서안 점령지와 예루살렘 전체의 절대적인 영유권을 주장한다. 연립정부를 구성한 유대교 정통파 정당들은 이스라엘 민주주의가 아니라 유대인 신정 정치를 주창한다. 이스라엘의 ‘미즈라히 유대인’(그들 중 다수는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아랍 국가들에서 추방됐다)도 그들과 같은 편이다.

‘일어나 먼저 죽여라’ / 로넨 베르그만 지음 / 랜덤하우스 펴냄 / 사진:RONENBERGMAN.COM
지금 이스라엘에선 정보기관들이 외부와 내부의 위협 요인 둘 다를 적극적으로 제거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는다. 문제는 그런 전술적 승리가 평화는커녕 기껏해야 즉각적인 위협을 잠시 완화해주는 효과뿐이라는 사실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의 혼돈 상황, 가자 지구의 로켓 공격, 레바논 남부의 미사일 위협, 이란의 호전성 등을 고려하면 이 지역에서 이제 70년째로 접어든 폭력의 악순환이 가라앉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베르그만의 책에서 두드러지는 아이러니 중 하나는 모사드·신베트·아만의 여러 책임자들이 임기 동안 손에 많은 피를 묻혔으면서도 퇴임 후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친다는 사실이다. 신베트 책임자를 지낸 아미 아얄론은 베르그만에게 “‘악의 평범성’이라고 할 만하다”고 말했다. ‘악의 평범성’이란 악행이 성격파탄자나 정신이상자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조직 내 수긍 잘하고 상부의 명령에 잘 따르는 성실한 일반인에 의해 자행된다는 개념을 가리킨다. 2012년 제작된 다큐멘터리 ‘게이트키퍼(The Gatekeepers)’에서 전직 신베트 수장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작전이 계속되다 보면 암살에 너무나 익숙해진다. 사람의 생명을 대수롭지 않게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이 그런 표적 암살로 무엇을 이뤘을까? 아얄론은 2012년 다큐멘터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린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보장하려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린 더 많은 테러에 시달린다.”

- 제프 스타인 뉴스위크 기자



※ [조나선 브로더 기자가 함께 취재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제1121회 로또 1등 11명...1등 당청금 25억2451만원

2“직구제한 반대”…700명 서울 도심서 집회

3의대교수들 “의대증원 확정은 오보…법원 집행정지 결정 아직 남아있어”

4이재명 “소득대체율 44% 수용…민주당 제안 받아달라”

5 이재명 "여당 제시 '소득대체율 44%' 전적 수용"

6국민의힘, 이재명 연금개혁 주장에 “정치적 꼼수로 삼을 개혁과제 아냐”

7의대 교수들 “정원 늘었지만 교원·시설 모두 제때 확보 어려울 것”

8요미우리, 한중일 공동선언에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 담겨

9올여름 ‘다 가린 시스루’ 뜬다…이효리 하객룩 보니

실시간 뉴스

1제1121회 로또 1등 11명...1등 당청금 25억2451만원

2“직구제한 반대”…700명 서울 도심서 집회

3의대교수들 “의대증원 확정은 오보…법원 집행정지 결정 아직 남아있어”

4이재명 “소득대체율 44% 수용…민주당 제안 받아달라”

5 이재명 "여당 제시 '소득대체율 44%' 전적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