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혁신의 풀뿌리 ‘메이커’의 국내 현실은] 아이디어 좋아도 생산까지 멀고도 험한 길
[제조업 혁신의 풀뿌리 ‘메이커’의 국내 현실은] 아이디어 좋아도 생산까지 멀고도 험한 길
설계비 많이 들고 소품종 소량 생산 맡길 공장 드물어...대·중소 기업과 협업할 가교 역할 필요
메이커는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단체를 말한다. 미국에선 취미로 시작해서 1인 창작자가 되고, 다시 제조 스타트업을 만들어 상장해 돈방석에 앉는 성공 스토리가 많다. 중국에서도 메이커의 작업 공간인 메이커 스페이스 등이 창업의 산실이 되고 있다. 메이커가 제조업 혁신의 풀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메이커의 현실은 척박하다. 설계비가 많이 들고 소품종 소량 주문·생산 맡길 전문 공장 드물어 아이디어가 좋아도 생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메이커 생태계를 가꿀 방안과 메이커 페어의 현주소도 짚어봤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30%가 제조업에서 나오는 제조 중심 국가다. 하지만 2015년 제조업 성장세는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1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2년 연속으로 제조업이 GDP에 기여한 비율이 0%대를 기록했다. 독일을 비롯한 제조 선진국이 4차 산업혁명을 아우르는 신기술을 도입하고, 외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혁신을 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은 2011년 첨단 제조 파트너십 정책을 내세워 해외로 이전한 자국 제조 업체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독일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 할 만한 내용이 모두 포함된 인더스트리4.0을 일찌감치 정립했다. 중국도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로 10년 안에 한국을 추월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능력을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국가는 사물인터넷(IoT), 3D프린터,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스마트공장과 같은 보완 정책 외에도 외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와 협업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DIY족인 ‘메이커’를 제조 기업으로 육성하는 혁신적 방안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 최대 가전 업체 하이얼은 최근 난징 메이커 스페이스의 ‘메이커톤’에서 일반 참가자가 고안한 세탁기 내부를 청소해주는 ‘클린볼’ 아이디어를 자사의 최신 세탁기에 반영해 상품화 했다. 하이얼은 이 참가자가 생산에 참여한 대가를 인정해 거액을 지불했다. 하이얼은 자사 신제품 아이디어를 메이커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미국의 메이커인 파머 럭키는 2012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가상현실(VR) 키트 200개를 만들기 위해 25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 캠페인을 올렸다. 순식간에 10배인 240만 달러가 모였다. 오큘러스는 벤처캐피털로부터 75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이듬해 페이스북은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약 2조 3300억원)에 인수했다. 에릭 미기코프스키는 2012년 스마트 워치 ‘페블’을 킥스타터 모금을 통해 처음 만들었다. 페블은 역대 최대 모금액을 기록했고, 2년 후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 워치를 잇따라 선보였다. 최근 나스닥 상장사 핏빗은 페블을 인수했다. 메이커가 풀뿌리 제조업 역할을 하는 이들과 달리 한국 메이커의 현실은 척박한 수준이다. CB인사이트의 2016년 3월 조사에 따르면 기업가치가 1억 달러 이상인 세계 유니콘 스타트업의 13%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었다. 하지만 1억 달러 이상의 기업가치를 지닌 한국 하드웨어 스타트업은 없다. 스타트업 전문 매체 플래텀이 2016년 투자를 유치한 국내 스타트업 313곳을 조사한 결과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비중은 정보통신기술과 일반 제조업 모두 포함해 고작 9%였다.
유명 메이커들도 아이디어 도용을 우려해 쉽게 창업에 나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자동차를 주요 부품까지 모두 만들어 유명해진 메이커 김진우 작가는 사업화 의사를 묻자 “전혀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을 공개하면 늘 누군가 베낀다. 한 번은 부품을 만들어줬더니 그걸 베껴서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고 다니는 걸 봤다. 메이커로서 화가 났다. 사업화 할 생각은 없다.”
그나마 최근 국내 하드웨어 스타트업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꾸준히 커지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국내 크라우드펀딩 업체 와디즈는 지난해 1월 21개 프로젝트에서 총 1억 3627만원의 테크·디자인 제품을 팔았다. 7월에는 48개 프로젝트에서 14억2159만원이 거래되면서 6개월 만에 10배 이상 성장했다. 메이커스위드카카오 서비스를 운영 중인 카카오메이커스의 경우 지난해 1월 거래액 10억원에서 7월 16억원으로 60%나 늘어났다. 자금도 있고 판로도 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
본지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두 곳이 제품을 양산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한국 제조업계의 민낯을 볼 수 있어서다. 휴대용 미니 수력발전기를 만드는 이노마드의 박혜린(32) 대표는 2016년 9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와 인디고고에 제품 아이디어를 간단한 시제품 사진과 함께 올렸다. 3억원의 선주문이 쏟아졌다. 창업을 하고 2년 만에 발생한 매출이다. 미국의 아웃도어 캠핑 시장을 겨냥해 높이 30cm에 지름 9cm의 텀블러 크기인 미니 수력발전기를 250달러에 팔았다. 제품 배송도 1년 후였다.
전문 제조 업체에 주문을 넣으면 간단히 될 일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노마드가 가장 먼저 지불한 비용은 양산형 설계 외주비 4000만원이었다. 사출기계 등 양산에 맞게 제품 설계도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돈을 들여 새로 받은 설계도 탓에 생산단가가 높아졌다. 이 양산형 설계도 제작 업체는 “최선을 다했다”고만 했다. 돈은 돌려받지 못 했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고 큰 돈을 들여 어렵게 양산형 설계도를 완성했다. 박 대표는 무엇이든 만들고 비용도 가장 저렴할 거라는 생각에 중국 선전의 공장을 찾아갔다. 텀블러 크기의 제품 5000대를 만들어달라고 하자 중국 전문 제조 업체들은 견적도 내주지 않았다. 박 대표는 중국에서 창업한 지 1년도 안 된 한 드론 업체의 첫 주문 물량이 100만 대라는 설명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 대표는 결국 금형공장을 소유한 60대 하드웨어 엔지니어에게 기술이사직을 제안해 영입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노마드는 안산의 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했다.
박 대표가 제조업에 뛰어든 이유는 기존 에너지망이 없는 곳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인도의 산간 지방을 여행하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에 조류 발전 플랜트 업체인 정맥산업개발에 취업한 것도 현장에 답이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현업에서 보니 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늘 기존 에너지망을 활용해 어떻게 하면 싸게 전기를 공급하느냐를 고민했어요. 남인도의 산간마을처럼 ‘오프 그리드(에너지 체계가 없는 곳)’ 지역에 사는 이들은 기술이 발달해도 계속 전기를 쓸 수 없다는 얘기죠.”
그가 2014년 5월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직장 동료와 퇴사해 이노마드를 차린 이유다. 해결하려는 문제가 확실했던 그가 처음부터 미국 아웃도어 시장을 겨냥해 캠핑용 제품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2015년 3월 서울시 하천관리과 공무원을 따라다니면서 청계천에 스마트폰 충전 등을 하는 휴대용 수력발전기 키오스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담당 공무원이 “고작 60와트짜리로 뭘 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이었던 이 키오스크는 현재 청계천의 명물이 됐다. “청계천에서 처음으로 민간기업 제품을 설치해서 성공했으니, 전국 도심 하천에 스테이션 개념으로 설치를 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을 만났지만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데 해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 움직이지를 않더라고요.”
제철소처럼 로를 냉각하는 물이 늘 흐르는 공장을 다음 타깃으로 정했다. LG이노텍·SPC 등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표준화가 불가능해 제작 단가가 높아졌다. 그렇게 돌고 돌아 선택한 게 미국 아웃도어 시장이었다. 제품을 내다팔 시장도 있었고, 자본도 있었다. 그런데도 실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기까지 험난한 고개를 여러 차례 넘어야 했다. 다른 하드웨어 스타트업도 양산 과정에서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다. 도심 폐기물 모니터링 솔루션 업체 이큐브랩의 권순범(29) 대표는 2011년 센서를 통해 쓰레기 수거 시기 등을 알려주는 스마트 쓰레기통 아이디어를 고안해냈다. 한화가 공익형 시범 사업에 쓴다며 1억원어치를 첫 주문했다. 하지만 이큐브랩은 스마트 쓰레기통 ‘클린큐브’ 시제품을 만들기도 전에 이 1억원을 모두 써야 했고, 정작 제품을 생산하는 데 든 비용은 이들이 온갖 창업 공모전에 참가해 받은 상금 4000만원과 중소기업청으로부터 받은 정부 지원 자금 7000만원으로 충당해야 했다. 판매가격이 200만원대인 스마트 쓰레기통 50대 남짓을 납품하는 데 왜 매출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돈이 들었을까?
권 대표 역시 양산을 위한 설계 비용에 1000만원가량을 썼다. 하지만 쓰레기를 압축하는 힘이 어느 정도 이상 나올 것 같은 순간에 모터가 뒤로 밀린다든지 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해 설계를 계속해서 바꿔야 했다. 쓰레기 중량이 500kg 이상이 돼 전류값이 올라가면 압축을 멈추고 돌아오도록 하려면 전자제어 설계를 또 다른 곳에 맡겨야 했다. 판매할 수 있는 물건이 나오기까지 설계도를 7~8번 수정했다. 양산용 설계에만 1억원이 들어갔다.
이큐브랩은 해외에서 꾸준히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철공소 수준인 시흥의 한 공장에서 수출용 압축 쓰레기통 클린큐브를 대당 200만원에 생산했다. 제품 판매가격이 200만원대 후반이니 만들수록 사실상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권 대표는 본사를 구로디지털단지 아파트형 공장으로 옮겨 자체 생산을 해가며 버텼고,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서부터는 김포에 직접 공장을 차렸다. 300평짜리 김포 공장에선 한 달에 200~300대를 생산할 수 있다. 500대 이상 주문이 들어오면 알맹이만 김포에서 만들어 중국 상하이 조립공장에 보내 곧장 수출한다.
이큐브랩은 한국에서 그나마 잘나가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다. 2015년 매출 5억원에서, 2016년 선적 기준으로만 15억원을 팔았다. 2017년 매출은 35억원 정도를 예상한다. 밀려있는 주문을 다 처리한다면 70억원 이상도 가능하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에서 대형 공급계약을 맺었다. 권 대표는 한국 대부분의 외주 공장, 설계 업체가 대기업에 종속돼 있는 것은 물량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주문하는 물량이 적기 때문에 외주 공장에서는 당연히 생산해주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권 대표는 “해외 크라우드펀딩 업체인 인디고고나 킥스타터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제품이라도 컨셉트만 보고 주문을 한다”며 “생산은 저절로 해결되고 오히려 제조 업체를 골라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두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수난사에서 보듯 한국은 대기업 제조 업체가 자체 공장, 하청 구조를 갖추면서 전문 제조 업체가 설 곳을 잃은 상황이다.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고전하는 것도 소품종 소량 주문·생산을 맡길 전문 공장이 없기 때문이다. 생산시설을 갖춘 전문 제조 업체들은 어느 정도의 물량을 확보하지 않고는 공장을 돌리기 어렵다. 물량이 많다고 해도 언제 다시 생산한다는 기약이 없으면 곤란하다.
양민양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는 이처럼 양산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선별 지원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양 교수는 “정부가 국가연구소나 지역센터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양산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창업자들을 통해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다시 만들려면 양산용 설계 전문가를 스타트업에 연결해주고 서로 이익을 공유하게 해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등의 구체적인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성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소장은 공장 없는 기업인 하드웨어 스타트업에게 유연한 생산체계를 갖춘 ‘온디맨드 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전문 제조 업체는 결국 자연스럽게 스마트 공장으로 연결될 것이며, 스타트업이 스마트공장에서 얻은 빅데이터를 활용해 수요를 예측하고 협업 생산하는 식으로 새로운 제조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성호 소장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대기업 하청구조에서 시제품은 만들 수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양산까지 하긴 쉽지 않다”며 “고난이도 하이테크 생산체계를 가진 전문 제조기업이 새로 나오거나 기존 중소·중견 제조기업이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기술연구원은 2014년 메이커, 하드웨어 스타트업과 전문 제조 업체의 협업을 지원해주는 ‘제조 소프트파워 강화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미국·중국에서처럼 제조업 혁신의 한 축으로 역할을 하려면 대기업과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협업을 할 수 있는 가교도 필요하다. 한성호 인천경제산업 정보테크노파크 책임연구원은 한·중 두 나라의 차이를 아래로부터의 협업이냐 위로부터의 혁신이냐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은 위에서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니까 오히려 결과가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며 “메이커를 결집시키고 이들의 아이디어가 실제로 기업에 응용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 부분이 느슨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메이커들이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시제품으로 쉽게 만들어 기업과 이어지는 것이 제조업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의 시제품을 생산하고, 양산 서비스를 지원하는 또 다른 스타트업 N15의 허제 대표는 “N15이 최근 두 대기업과 진행한 프로젝트가 오픈 이노베이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인텔 대만법인은 N15에 2016년 10월 반도체 관련 기술 제휴를 제안했다. N15이 국내 스타트업을 발굴해 이곳에 인텔의 반도체 소프트웨어 개발 과제를 맡기고, N15은 초도물량 양산·판매를 담당하기로 했다. 기술특허도 공동 소유하기로 협의했다. 이세윤 N15 팀장은 “계약 내용은 영상처리기술 향상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LG전자 CTO실도 N15에 LG전자 이동형 스마트 냉장고와 관련된 협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LG전자 임원들이 중국 선전을 방문했는데 이곳에서 N15를 소개해 이뤄진 프로젝트다. 허제 대표는 “냉장고가 음성 인식이나 무선 컨트롤러 명령으로 동작이 가능하게 하는 양산형 시제품이었는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며 “앞으로도 LG전자와 다양한 형태의 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메이커에서 하드웨어 스타트업으로, 제조업 혁신에서 새로운 가치 창출이라는 새로운 제조 생태계로 가기 위해서 메이커 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려는 움직임도 나오고 있다. 문공주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교수는 “기본적인 공구나 기기를 다루는 법과 다양한 자원·재료를 사용하는 법 등을 숙지하는 데 노력이 많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메이커들이 활발히 활동할 수 있으려면 설계·제작 과정에서 메이커를 도울 수 있는 전문가(테크니션)들이 많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는 “메이커가 제조 업체로 발전하는 것을 막는 진입장벽은 하드웨어, 한국, 여성, 표준화된 입시교육 등”이라며 이공계의 여성 소외 현상도 메이커 저변 확대의 걸림돌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걸스로봇은 여성을 위한 메이커 스페이스 ‘핑크랩’을 준비 중이다.
※ 메이커 :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단체를 말한다. 최근엔 3D 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상상력을 바탕으로 제품이나 서비스 등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공예가·창작자 등도 포함한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서서 정보를 교류하며, 제품을 팔아 수익을 남기기도 한다. 메이커는 미국이나 중국에선 취미 수준의 창작자에 머물지 않고 창업으로 연계되는 1인 제조업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오픈 이노베이션 :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편 내부 자원을 외부와 공유하면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버클리대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2003년에 제시했다. 기업 내부의 R&D 활동을 중시하는 것이 ‘폐쇄형 혁신’이었고 아웃소싱이 한쪽 방향으로 역량을 이동시키는 것이라면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기업 안팎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업의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지식재산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 개방형 기술 혁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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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커는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단체를 말한다. 미국에선 취미로 시작해서 1인 창작자가 되고, 다시 제조 스타트업을 만들어 상장해 돈방석에 앉는 성공 스토리가 많다. 중국에서도 메이커의 작업 공간인 메이커 스페이스 등이 창업의 산실이 되고 있다. 메이커가 제조업 혁신의 풀뿌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메이커의 현실은 척박하다. 설계비가 많이 들고 소품종 소량 주문·생산 맡길 전문 공장 드물어 아이디어가 좋아도 생산까지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한다. 메이커 생태계를 가꿀 방안과 메이커 페어의 현주소도 짚어봤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의 30%가 제조업에서 나오는 제조 중심 국가다. 하지만 2015년 제조업 성장세는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한 1961년 이래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2년 연속으로 제조업이 GDP에 기여한 비율이 0%대를 기록했다. 독일을 비롯한 제조 선진국이 4차 산업혁명을 아우르는 신기술을 도입하고, 외부 아이디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혁신을 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은 2011년 첨단 제조 파트너십 정책을 내세워 해외로 이전한 자국 제조 업체를 다시 불러들이고 있다. 독일은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라 할 만한 내용이 모두 포함된 인더스트리4.0을 일찌감치 정립했다. 중국도 중국제조 2025 프로젝트로 10년 안에 한국을 추월해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 능력을 갖추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국가는 사물인터넷(IoT), 3D프린터, 빅데이터 등을 활용한 스마트공장과 같은 보완 정책 외에도 외부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와 협업하는 오픈 이노베이션, DIY족인 ‘메이커’를 제조 기업으로 육성하는 혁신적 방안을 시도하고 있다.
중국 최대 가전 업체 하이얼은 최근 난징 메이커 스페이스의 ‘메이커톤’에서 일반 참가자가 고안한 세탁기 내부를 청소해주는 ‘클린볼’ 아이디어를 자사의 최신 세탁기에 반영해 상품화 했다. 하이얼은 이 참가자가 생산에 참여한 대가를 인정해 거액을 지불했다. 하이얼은 자사 신제품 아이디어를 메이커들과 함께 주기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예정이다. 미국의 메이커인 파머 럭키는 2012년 크라우드펀딩 사이트 킥스타터에 가상현실(VR) 키트 200개를 만들기 위해 25만 달러를 목표로 모금 캠페인을 올렸다. 순식간에 10배인 240만 달러가 모였다. 오큘러스는 벤처캐피털로부터 7500만 달러를 유치했다. 이듬해 페이스북은 오큘러스를 20억 달러(약 2조 3300억원)에 인수했다. 에릭 미기코프스키는 2012년 스마트 워치 ‘페블’을 킥스타터 모금을 통해 처음 만들었다. 페블은 역대 최대 모금액을 기록했고, 2년 후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 워치를 잇따라 선보였다. 최근 나스닥 상장사 핏빗은 페블을 인수했다.
국내 스타트업 중 제조 업체는 9%에 불과
유명 메이커들도 아이디어 도용을 우려해 쉽게 창업에 나서지 못하는 실정이다. 자동차를 주요 부품까지 모두 만들어 유명해진 메이커 김진우 작가는 사업화 의사를 묻자 “전혀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만든 것을 공개하면 늘 누군가 베낀다. 한 번은 부품을 만들어줬더니 그걸 베껴서 자기가 만들었다고 하고 다니는 걸 봤다. 메이커로서 화가 났다. 사업화 할 생각은 없다.”
그나마 최근 국내 하드웨어 스타트업 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꾸준히 커지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다. 국내 크라우드펀딩 업체 와디즈는 지난해 1월 21개 프로젝트에서 총 1억 3627만원의 테크·디자인 제품을 팔았다. 7월에는 48개 프로젝트에서 14억2159만원이 거래되면서 6개월 만에 10배 이상 성장했다. 메이커스위드카카오 서비스를 운영 중인 카카오메이커스의 경우 지난해 1월 거래액 10억원에서 7월 16억원으로 60%나 늘어났다. 자금도 있고 판로도 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
본지는 하드웨어 스타트업 두 곳이 제품을 양산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한국 제조업계의 민낯을 볼 수 있어서다. 휴대용 미니 수력발전기를 만드는 이노마드의 박혜린(32) 대표는 2016년 9월 크라우드펀딩 사이트인 킥스타터와 인디고고에 제품 아이디어를 간단한 시제품 사진과 함께 올렸다. 3억원의 선주문이 쏟아졌다. 창업을 하고 2년 만에 발생한 매출이다. 미국의 아웃도어 캠핑 시장을 겨냥해 높이 30cm에 지름 9cm의 텀블러 크기인 미니 수력발전기를 250달러에 팔았다. 제품 배송도 1년 후였다.
전문 제조 업체에 주문을 넣으면 간단히 될 일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이노마드가 가장 먼저 지불한 비용은 양산형 설계 외주비 4000만원이었다. 사출기계 등 양산에 맞게 제품 설계도를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큰 돈을 들여 새로 받은 설계도 탓에 생산단가가 높아졌다. 이 양산형 설계도 제작 업체는 “최선을 다했다”고만 했다. 돈은 돌려받지 못 했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고 큰 돈을 들여 어렵게 양산형 설계도를 완성했다. 박 대표는 무엇이든 만들고 비용도 가장 저렴할 거라는 생각에 중국 선전의 공장을 찾아갔다. 텀블러 크기의 제품 5000대를 만들어달라고 하자 중국 전문 제조 업체들은 견적도 내주지 않았다. 박 대표는 중국에서 창업한 지 1년도 안 된 한 드론 업체의 첫 주문 물량이 100만 대라는 설명을 듣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박 대표는 결국 금형공장을 소유한 60대 하드웨어 엔지니어에게 기술이사직을 제안해 영입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노마드는 안산의 한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했다.
박 대표가 제조업에 뛰어든 이유는 기존 에너지망이 없는 곳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인도의 산간 지방을 여행하면서 알게 됐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 후에 조류 발전 플랜트 업체인 정맥산업개발에 취업한 것도 현장에 답이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현업에서 보니 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다른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우리는 늘 기존 에너지망을 활용해 어떻게 하면 싸게 전기를 공급하느냐를 고민했어요. 남인도의 산간마을처럼 ‘오프 그리드(에너지 체계가 없는 곳)’ 지역에 사는 이들은 기술이 발달해도 계속 전기를 쓸 수 없다는 얘기죠.”
그가 2014년 5월 하드웨어 엔지니어인 직장 동료와 퇴사해 이노마드를 차린 이유다. 해결하려는 문제가 확실했던 그가 처음부터 미국 아웃도어 시장을 겨냥해 캠핑용 제품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2015년 3월 서울시 하천관리과 공무원을 따라다니면서 청계천에 스마트폰 충전 등을 하는 휴대용 수력발전기 키오스크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담당 공무원이 “고작 60와트짜리로 뭘 할 수 있겠느냐”며 회의적이었던 이 키오스크는 현재 청계천의 명물이 됐다. “청계천에서 처음으로 민간기업 제품을 설치해서 성공했으니, 전국 도심 하천에 스테이션 개념으로 설치를 하려고 했어요. 너무 힘들었습니다. 각 지방자치단체 공무원을 만났지만 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는데 해서 문제를 만들 필요가 없으니 움직이지를 않더라고요.”
제철소처럼 로를 냉각하는 물이 늘 흐르는 공장을 다음 타깃으로 정했다. LG이노텍·SPC 등에서 관심을 보였지만 표준화가 불가능해 제작 단가가 높아졌다. 그렇게 돌고 돌아 선택한 게 미국 아웃도어 시장이었다. 제품을 내다팔 시장도 있었고, 자본도 있었다. 그런데도 실제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기까지 험난한 고개를 여러 차례 넘어야 했다. 다른 하드웨어 스타트업도 양산 과정에서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다.
자본·시장 있어도 물건 만들 곳 찾기 어려워
권 대표 역시 양산을 위한 설계 비용에 1000만원가량을 썼다. 하지만 쓰레기를 압축하는 힘이 어느 정도 이상 나올 것 같은 순간에 모터가 뒤로 밀린다든지 하는 구조적 문제가 발생해 설계를 계속해서 바꿔야 했다. 쓰레기 중량이 500kg 이상이 돼 전류값이 올라가면 압축을 멈추고 돌아오도록 하려면 전자제어 설계를 또 다른 곳에 맡겨야 했다. 판매할 수 있는 물건이 나오기까지 설계도를 7~8번 수정했다. 양산용 설계에만 1억원이 들어갔다.
이큐브랩은 해외에서 꾸준히 주문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철공소 수준인 시흥의 한 공장에서 수출용 압축 쓰레기통 클린큐브를 대당 200만원에 생산했다. 제품 판매가격이 200만원대 후반이니 만들수록 사실상 손해를 보는 구조였다. 권 대표는 본사를 구로디지털단지 아파트형 공장으로 옮겨 자체 생산을 해가며 버텼고, 대량 주문이 들어오면서부터는 김포에 직접 공장을 차렸다. 300평짜리 김포 공장에선 한 달에 200~300대를 생산할 수 있다. 500대 이상 주문이 들어오면 알맹이만 김포에서 만들어 중국 상하이 조립공장에 보내 곧장 수출한다.
이큐브랩은 한국에서 그나마 잘나가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이다. 2015년 매출 5억원에서, 2016년 선적 기준으로만 15억원을 팔았다. 2017년 매출은 35억원 정도를 예상한다. 밀려있는 주문을 다 처리한다면 70억원 이상도 가능하다. 이 회사는 최근 미국에서 대형 공급계약을 맺었다. 권 대표는 한국 대부분의 외주 공장, 설계 업체가 대기업에 종속돼 있는 것은 물량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주문하는 물량이 적기 때문에 외주 공장에서는 당연히 생산해주지 않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권 대표는 “해외 크라우드펀딩 업체인 인디고고나 킥스타터에서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제품이라도 컨셉트만 보고 주문을 한다”며 “생산은 저절로 해결되고 오히려 제조 업체를 골라서 생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스타트업과 전문 제조 업체 연결할 고리 만들어야
양민양 카이스트 기계공학과 교수는 이처럼 양산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하드웨어 스타트업을 선별 지원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라고 주장한다. 양 교수는 “정부가 국가연구소나 지역센터 등을 통해 체계적으로 (하드웨어 스타트업의 양산을)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며 “창업자들을 통해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다시 만들려면 양산용 설계 전문가를 스타트업에 연결해주고 서로 이익을 공유하게 해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등의 구체적인 지원책이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성호 한국생산기술연구원 소장은 공장 없는 기업인 하드웨어 스타트업에게 유연한 생산체계를 갖춘 ‘온디맨드 공장’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런 전문 제조 업체는 결국 자연스럽게 스마트 공장으로 연결될 것이며, 스타트업이 스마트공장에서 얻은 빅데이터를 활용해 수요를 예측하고 협업 생산하는 식으로 새로운 제조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성호 소장은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대기업 하청구조에서 시제품은 만들 수 있어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양산까지 하긴 쉽지 않다”며 “고난이도 하이테크 생산체계를 가진 전문 제조기업이 새로 나오거나 기존 중소·중견 제조기업이 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기술연구원은 2014년 메이커, 하드웨어 스타트업과 전문 제조 업체의 협업을 지원해주는 ‘제조 소프트파워 강화 사업’을 시작했다.
한국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미국·중국에서처럼 제조업 혁신의 한 축으로 역할을 하려면 대기업과 하드웨어 스타트업이 협업을 할 수 있는 가교도 필요하다. 한성호 인천경제산업 정보테크노파크 책임연구원은 한·중 두 나라의 차이를 아래로부터의 협업이냐 위로부터의 혁신이냐에서 찾았다. 그는 “한국은 위에서 주도적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니까 오히려 결과가 혁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며 “메이커를 결집시키고 이들의 아이디어가 실제로 기업에 응용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고리가 필요한데 이 부분이 느슨하다”고 진단했다. 그는 “메이커들이 새로운 제품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시제품으로 쉽게 만들어 기업과 이어지는 것이 제조업 혁신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스타트업의 시제품을 생산하고, 양산 서비스를 지원하는 또 다른 스타트업 N15의 허제 대표는 “N15이 최근 두 대기업과 진행한 프로젝트가 오픈 이노베이션의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인텔 대만법인은 N15에 2016년 10월 반도체 관련 기술 제휴를 제안했다. N15이 국내 스타트업을 발굴해 이곳에 인텔의 반도체 소프트웨어 개발 과제를 맡기고, N15은 초도물량 양산·판매를 담당하기로 했다. 기술특허도 공동 소유하기로 협의했다. 이세윤 N15 팀장은 “계약 내용은 영상처리기술 향상에 대한 것”이라고 밝혔다. LG전자 CTO실도 N15에 LG전자 이동형 스마트 냉장고와 관련된 협업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LG전자 임원들이 중국 선전을 방문했는데 이곳에서 N15를 소개해 이뤄진 프로젝트다. 허제 대표는 “냉장고가 음성 인식이나 무선 컨트롤러 명령으로 동작이 가능하게 하는 양산형 시제품이었는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며 “앞으로도 LG전자와 다양한 형태의 협업을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메이커 운동의 저변 확대 움직임
※ 메이커 :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 또는 단체를 말한다. 최근엔 3D 프린터 등 디지털 기기와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상상력을 바탕으로 제품이나 서비스 등을 만들어 내는 발명가·공예가·창작자 등도 포함한다.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서서 정보를 교류하며, 제품을 팔아 수익을 남기기도 한다. 메이커는 미국이나 중국에선 취미 수준의 창작자에 머물지 않고 창업으로 연계되는 1인 제조업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 오픈 이노베이션 :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과 아이디어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한편 내부 자원을 외부와 공유하면서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개념이다. 버클리대 헨리 체스브로 교수가 2003년에 제시했다. 기업 내부의 R&D 활동을 중시하는 것이 ‘폐쇄형 혁신’이었고 아웃소싱이 한쪽 방향으로 역량을 이동시키는 것이라면 오픈 이노베이션은 기술이나 아이디어가 기업 안팎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업의 혁신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지식재산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 개방형 기술 혁신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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