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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벳 장갑 끼고 날리는 ‘라이트훅’

벨벳 장갑 끼고 날리는 ‘라이트훅’

영국 작가 마틴 에이미스, 트럼프 대통령 포함해 미국 사회의 문제점 신랄하게 비판한 에세이 모음집 펴내
마틴 에이미스는 통렬한 재치와 맹렬하면서도 우아한 문체로 미국 사회를 비판했다. / 사진:CHRISTOPHER LANE
영국 작가 마틴 에이미스의 에세이 모음집 ‘시간의 마찰(The Rub of Time)’을 보면 무릎을 탁 칠 만한 대목이 많다. “라스베이거스를 형용사 하나로 표현한다면 ‘비(非)이슬람적(un-Islamic)’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같은 기발한 문장이 그 예다.

에이미스가 2006년 포커 월드시리즈에 관해 쓴 ‘라스베이거스를 잃으며(Losing Las Vegas)’가 바로 그 문장으로 시작된다. ‘행운아 짐(Lucky Jim)’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킹슬리 에이미스의 아들인 그가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23년 동안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 45편(에세이·르포·개인적 반추·정치 논평 등) 중 하나다. 주제도 다양하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 전과 후, 자살폭탄테러범, 배우 존 트래볼타의 재기,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 곤조 음란물(배우의 시각으로 촬영한 포르노물) 등.

미국에서 에이미스는 소설로 더 잘 알려졌다[지금까지 14권을 썼으며 그중 ‘시간의 화살(Time’s Arrow)’이 1991년 부커상 소설 부문 최종후보에 올랐다]. 그 모든 글의 공통점은 통렬한 재치와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눈, 맹렬하면서도 우아한 문체다. 벨벳 장갑을 끼고 날리는 ‘라이트훅’이라고 할까?

모음집에 실린 에세이 대부분은 미국을 소재로 했다. 2011년부터 미국에서 살아 온 에이미스는 ‘미국에 사는 영국인’이라는 사실이 유리한 점도 있고 불리한 점도 있다고 본다. 그는 뉴스위크와 가진 인터뷰에서 “곡해할 수밖에 없는 요인은 있지만 낯설어 보이는 만큼 신선함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에세이에서 지적한 문제와 관련해 에이미스의 생각을 들어봤다.



2016년 8월 하퍼스 매거진에 기고한 트럼프 후보의 선거운동에 관한 글에 이런 농담조의 예언이 들어 있었다. ‘백악관에서 며칠 위풍당당하게 지내고 나면 트럼프의 뇌는 테스토스테론으로 흥건하게 젖을 것이다.’ 예언이 적중하는 게 반드시 좋은 건 아닌 것 같다. 대통령으로서 1년이 지나는 동안 트럼프에게서 예상과 다른 점을 발견했는가?


그렇진 않다. 다만 그가 인종 카드, 특히 백인 우월주의 카드를 계속 쓴다는 점이 역겹다. 그가 NBC 방송의 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Apprentice, 각 분야의 직업에서 탁월한 직원을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를 진행하던 시절엔 소수민족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포부를 갖도록 영감을 주고 다양한 방면의 재능을 장려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면서 자신이 합리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디지털화로 일자리를 잃고 좌절한 백인 근로자층을 공략하는 게 쉽다고 판단한 듯하다. 해괴한 발상이지만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미국인의 큰 정서적 상처인 인종 문제를 파워게임에 계속 이용한다.

한 에세이에서 난 그를 ‘텅 빈 그릇’으로 묘사했다. 그는 어떤 것도 진실되게 믿지 않는다. 단 돈은 예외다. 최근 그의 아들 에릭은 그가 피부색을 따지는 사람이 아니라며 “아버지는 색맹이다. 다만 녹색은 예외다”고 항변했다(녹색은 달러 지폐의 색이다). 순전히 아버지를 치켜세우려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들이 나를 두고 그렇게 말한다면 난 부자의 연을 끊겠다.
에이미스는 1994년부터 지난해까지 23년 동안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 45편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 사진:MARTIN AMIS


트럼프의 추종자들을 ‘배리 매닐로 법칙’으로 설명했다. ‘배리 매닐로를 잘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끔찍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은 모두 그가 멋지다고 생각한다’는 얘기 말이다. (미국 팝가수인 매닐로는 지난해 73세의 나이로 동성애자임을 고백했다.)


호주 출신 비평가 클라이브 제임스의 말에서 따왔다. 거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명언이다.



트럼프 대통령을 “멍청한 구경꾼이자 성추행범이며 남의 불행을 고소해하는 사람이지만 호색가는 절대 아니다”고 평했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스토미 대니얼스 이야기가 나왔다. 포르노 스타인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과 섹스를 했다고 주장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두 사람이 2006년 네바다 주 골프 경기에서 처음 만난 뒤 성관계를 했으며, 2016년 대선 직전엔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를 통해 ‘입막음용’으로 그녀에게 13만 달러가 전달됐다고 보도했다.)


그 소식에 약간 혼란스러웠다. 세균 감염을 두려워하고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 어떻게 포르노 스타와 하룻밤이라도 잘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그에게 뭔가를 해준 건 틀림없는 것 같다. 입막음용으로 그녀에게 13만 달러나 줬다니 말이다. 하지만 난 두 사람이 실제로 섹스를 하진 않았다고 본다.



암암리에 만연하던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와 여성혐오주의가 트럼프 대통령 덕분에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는데.


진실은 표면 아래 있다.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정화할 순 없지만 좀 더 바람직하게 행동하도록 가르칠 순 있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인종·성·종교 등과 관련된 잘못된 언어 사용이 초래하는 혐오감과 불이익, 편견을 없애자는 취지의 운동)’이 그 점에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고압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처럼 ‘정치적 올바름’의 족쇄에서 벗어나 악취 가득한 인종차별주의와 여성혐오주의를 드러내는 게 무슨 공로란 말인가? 그런 언행에 고마워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포르노 스타인 스토미 대니얼스는 과거 트럼프 대통령과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 사진:AP-NEWSIS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MeToo)’와 ‘타임스업(Time’s Up)’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뒤늦은 반응이라는 시각도 있는데.


할리우드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이 시작됐을 때 나는 아내(소설가 이사벨 폰세카)와 그 문제를 두고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열세 살짜리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성폭행했지만 나중에 재기했다. 코미디언 빌 코스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피해자의 증언을 믿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런 면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도움을 줬다는 점은 인정한다.



‘타임스업’과 ‘미투’ 운동이 지속될까 아니면 흐지부지될까?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이제 캠페인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본다.



예술가의 작품과 개인적인 삶은 구분돼야 한다고 말했는데 이제 그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케빈 스페이시(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두 번이나 받은 인기 배우로 최근 ‘미투’ 캠페인의 여파로 성추문에 휩싸여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다)와 코스비, 웨인스타인 등 성추문으로 무너진 저명인사들을 보라. 또 지금 영화감독 우디 앨런에게 일어나는 일을 보라(앨런의 입양 딸 딜런 패로우는 최근 그에게 성폭행당했다고 폭로했다).


과거는 공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하지만 계속 과거에 사로잡혀선 안 된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새로워져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책에 실린 에세이 중 3편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10대 소녀에 대한 중년남자의 성적집착을 묘사한 ‘롤리타’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작가)에 할애했다. 그런데 최근 한 여성이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걸린 프랑스 화가 발튀스의 1938년작 ‘꿈꾸는 테레즈’(붉은 치마를 입은 채 한쪽 다리를 의자에 올려 다리와 속옷을 노출한 소녀의 모습을 그린 작품)가 소아성애를 부추긴다며 철수를 주장했다. 그러나 박물관 측은 “관람객에게 창작성과 전문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시대와 문화를 아우르는 중요 예술 작품들을 모으고 연구하고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며 작품 철수를 거부했다. 하지만 지금도 누군가는 ‘롤리타’를 도서관에서 열람 금지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일지 모른다.


나보코프의 문제는 ‘롤리타’나 ‘마법사’ 또는 ‘투명한 물체들’ 같은 그의 주요 작품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건 그가 나중에 쓴 가벼운 작품 3점이다. 물론 ‘마법사’와 ‘롤리타’에서 소녀에게 끌리는 마음을 아주 깊이 다뤘다. 하지만 그가 그런 면을 지지하진 않았다. 반면 그 후 더 가벼운 작품들에선 그가 그런 점을 찬미한 듯하다.



가장 감동적인 에세이 중 하나는 친구인 크리스토퍼 히친스에 관한 글이다(언론인이자 사회비평가인 그는 무신론자로 유명했으며 2011년 사망했다). 그와 당신은 스탈린을 두고 공개적으로 논쟁을 벌였다. 한 독자는 그게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지 질문한 적이 있다. 당신은 ‘지어 낼 필요가 없었으며 우린 성인으로서 아이디어를 교환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 미국에선 그런 ‘성인들의 아이디어 교환’이 불가능한 듯하다. 미국 사회의 메울 수 없는 분열의 골을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가?


사실 영국의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란도 그와 비슷하다. 하지만 미국은 극단적인 분열상이 더 심각하다. 양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서로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너무 극단적이라 매우 걱정스럽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직후 생겨난 ‘티파티’부터 그런 극단적 분열이 시작됐다. 공화당 강경 보수세력인 티파티는 오바마 대통령의 정책을 무조건 반대했다. 미치 매코넬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넌더리 난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며 “오바마를 단임 대통령으로 만들겠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지금 미국의 양극화는 트럼프 시대가 아니라 그때부터 시작됐다.
에이미스는 영국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의 사랑이 정말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사진:AP-NEWSIS


1997년 다이애나 왕세자빈의 죽음에 관한 글을 쓰면서 그녀의 인기를 ‘부수적인 명성’이라고 묘사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유명해진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 후 패리스 힐튼, 카다시안 자매를 거쳐 지금은 소셜미디어 덕분에 유명해진 인물들의 인기가 대부분 부수적인 명성인 듯하다.


사실 50년 전부터 그런 조짐이 있었다. 1970년대 성혁명의 한 요소가 바로 그것이었다.



오는 5월 결혼하는 해리 왕자와 메건 마클에 관심이 있는가?


큰 관심은 없었지만 그들의 결혼을 지지한다.



이유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바람직하다(마클은 흑인 어머니와 백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모습과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도 매우 마음에 든다. 그들을 보면 이 젊은이들의 사랑이 정말 동화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낭만적인 줄 몰랐다.


히친스는 내 생각과 달랐지만 나는 영국에서 군주제가 희한하게도 순기능을 한다고 본다. ‘자애로운 부조리’라고 표현하고 싶다. 아주 보기 드문 기능이다. 보통은 부조리란 폭력적이고 무섭다. 하지만 영국에선 왕실 때문에 국민이 가끔씩 행복하고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영국의 군주제가 계속될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왕실 자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루 24시간 주시당한다는 점이 안타깝다. 거의 아동학대에 해당한다.



소설 속 여주인공에 대한 설정으로 여성혐오자라고 비난 받은 적이 있는데 사실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남성 작가들(솔 벨로, 나보코프, 필립 라킨, 존 업다이크, J.G. 발라드, 필립 로스 등)에 관한 에세이는 15편이나 되지만 여성 작가(아이리스 머독, 제인 오스틴 등)는 2편뿐이다. 그 외 존경하는 다른 여성 작가가 있는가?


[웃음] 의붓어머니 엘리자베스 제인 하워드를 존경한다. 그녀의 5부작 소설 ‘캐절렛 크로니클스(The Cazalet Chronicles)’는 천재적이다. 또 로리 무어, 앨리스 먼로, 뮤리얼 스파크도 아주 좋아한다. 나보코프는 자신의 문학적 취향이 완전히 동성애적이라고 말했지만 난 다르다.



미국을 아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6년 전부터 가족과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는데 미국이 편안하게 느껴지는가?


실제로 미국에서 살다 보니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더 많아졌다.



예를 들자면?


인종 문제다. 영국에 돌아갈 때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런 문제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늘 그렇듯이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다르지만 런던의 많은 구역이 인종 문제에서 탈피한 느낌이 든다. 미국의 건강보험 제도도 형편없다. 소득이 건강을 좌우한다는 게 전형적인 미국 방식인 듯하다. 미국은 언제나 돈이 최고인 나라였지만 직접 겪어보면 충격적일 정도로 물질주의적인 사회다.



그렇다면 미국의 긍정적인 측면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미투’ 운동 같은 사회적 반응이 의식의 혁명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나처럼 점진주의를 좋아하고 혁명을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그게 바람직하다. 행동의 혁명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을 통해 조금씩 진전하는 것을 말한다. 히친스와 나의 큰 차이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물리적인 혁명을 좋아했다. 그가 미국을 그토록 좋아한 것도 독립혁명 때문이었다.

점진적인 변화를 좋아하느냐 아니면 완전히 뒤집어엎고 다시 시작하기를 원하느냐가 사람들 사이의 큰 차이점이다. 난 판을 뒤엎고 새로 시작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혁명은 아주 파괴적이다. 결과가 좋은 혁명은 그리 많지 않다.

- 메리 케이 실링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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