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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난민 논란으로 본 난민의 역사] 망명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길다

[제주도 난민 논란으로 본 난민의 역사] 망명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길다

유대인의 디아스포라, 베트남 보트피플 등 유명…프랑스 위그노는 정착 국가의 경제 발전에 기여
6월 30일 오후 서울 도심에서 난민을 둘러싼 찬반 집회가 열리고 있다. 종로구 동화면세점 앞에서는 난민법과 무사증(무비자) 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집회(왼쪽)가, 세종로파출소 앞에서는 난민 반대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다. / 사진:연합뉴스
중동국가 예멘의 난민 약 500명이 무비자 입국이 가능한 제주도로 입국해 난민 신청을 하면서 한국 사회에 ‘난민 문제’라는 판도라 상자가 열렸다. 법무부 발표에 따르면 난민 자격을 신청한 예멘인은 486명이다. 정부는 난민 자격 심사를 늦어도 10월까지 마치고 난민심판원을 신설해 이의제기 절차도 축소해 예멘 난민과 관련한 문제를 조기에 정리할 방침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난민 자격 심사를 신청한 외국인은 예멘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더구나 그 숫자는 빠르게 늘고 있다. 실제로 올해 들어 한국에서 난민 자격 심사를 신청한 외국인은 1~5월에만 7737명이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3337명의 두 배 수준을 넘는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지금까지 839명으로 전체 누적 신청자 2만여 명의 4.1% 수준이다.
 한국에서 난민 지위 인정받은 사람 839명
예멘은 내전이 한창인 중동·이슬람 국가다. 아라비아 반도 서남부에 있는 이 나라는 한반도의 약 2.4배인 52만7968㎢의 면적에 인구는 2750만(2016년 추정치)에 이른다. 중동 지역에선 작은 나라가 아니다. 이웃 사우디 아라비아와 비교하면 면적은 4분의 1 수준이지만 인구에선 3230만 명인 사우디와 비교해 그리 적지 않다. 인구 구성에선 아랍인이 98%에 이르며, 아프리카계 아랍인, 인도계, 유럽계가 나머지 소수를 이룬다. 종교는 무슬림(이슬람 신자)이 99.1%인 이슬람 국가다. 교리와 정서상 사우디와 가까운 수니파가 53%, 이란과 밀접한 시아파가 30~45%로 조사된다. 이 밖에 기독교도 3000명, 유대교도 400명 정도가 거주한다. 언어는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비즈니스와 교육 등에선 영어 사용도 활발하다. 예멘인은 내전이 아니라도 해외 이주가 활발하다. 전략 요충지인 아덴 항구 등 남부지역을 150년 정도 지배한 영국으로 70만~80만의 예멘인이 이주해 거주한다. 이스라엘에도 약 35만 명의 예멘계 유대인이 산다. 미국에도 20만이 이주했다. 이 밖에 이탈리아 약 2800명, 그리고 사우디·아랍에미리트·카타르·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에도 예멘인이 상당수 머물고 있다.

이는 세계 난민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그친다. 유엔난민기구(UNHCR) 추정에 따르면 세계 난민은 약 2130만 명에 이른다. 여러 사정으로 생활 근거지에서 떠난 6539만 명 가운데 친척집 등 지역·국가의 다른 곳에서 거주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갈 곳 없는 사람만 따진 숫자다. 팔레스타인 난민을 담당하는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 사업기구(UNRWA)가 약 520만을 담당하며 UNHCR이 약 1610만을 나눠 맡는다. 지역별로는 아프리카 441만, 유럽 439만, 아태지역 380만, 중동북아프리카 274만, 미주 75만의 난민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현재 세계 난민 수 약 2130만 명
난민은 인류 역사와 궤를 함께했다. 유사 이래 여러 이유로 바다를 건너거나 육지를 걸어 이동했다. 역사적으로 고대 유대인이 가장 유명하다. 로마에 대항해 봉기했다 추방령으로 ‘디아스포라’의 길을 걸었다. 한국인의 기억에 가장 생생한 난민은 한국전쟁 피란민이다. 비교적 최근의 외국 사례로는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재 호치민)이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공산당 게릴라 조직인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비엣콩·베트콩으로도 알려짐)에 함락되면서 보트를 구해 나라를 떠난 베트남 보트피플이 있다. 남베트남이 무너진 후 100만 명에 가까운 주민이 해로로 탈출했다. 대개 남베트남에서 정치인·군인·관료·교사를 한 지도층 또는 지식층, 그리고 프랑스령-인도차이나 시절에 프랑스 정부 밑에서 일을 했던 친프랑스파, 부르주아 계층으로 분류되는 부유층이 초기 보트피플의 주류였다. 1978년부터는 화교들이 탄압을 받으면서 대거 보트피플이 됐다. 나중에 캄보디아와 라오스가 공산화되면서 이들 나라 출신도 상당수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섰다. 라오스는 내륙국가인데도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거쳐 배를 타고 나왔다.

보트피플의 목적지는 호치민 기준 약 1500km 떨어진 홍콩이나 2000km 이상 떨어진 호주였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미국에 82만, 호주에 10만, 프랑스에 9만6000, 독일에 4만, 캐나다에 3만, 영국에 1만9000명이 정착했다. 한국에도 1975년 부산 서대신동 옛 부산여고 자리에 임시 난민촌이 생겨 베트남 보트피플을 수용했다 나중에 해운대구 재송동으로 옮겼다. 또 다른 보트피플 난민도 있다. 1990년대 이후 호주 불법 이민을 노리고 바다를 건너는 미얀마 등의 경제 난민이 있었다. 호주는 이들을 받지 않으려고 이웃 인도네시아 등에 수백억원을 주고 난민 관리와 수용을 맡겼다는 보도도 나왔다.

19세기 유럽에서 미국을 비롯한 미주대륙으로 건너간 수많은 이민자도 당시에는 보트피플로 불렀다. 떠돌이 배가 아니라 여객선을 타고 왔는데도 용어는 그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한 ‘보트피플’의 후손이다. 흥남철수로 배를 타고 거제도로 피란한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문재인 대통령과 비슷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집안 이력 때문에 정치적 난민과 경제적 난민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교황의 부친인 호세 베르고를리오는 1929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집권하자 아르헨티나로 이민했다. 그런데 배가 해안이 도착하기 직전에 난파돼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어려서 이런 일화를 자주 들었던 교황은 난민이나 난파사고, 해난사고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왔다. 2015년 리비아를 출발한 아프리카 난민선이 침몰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자 성 베드로 광장 미사에서 “희생자들은 우리처럼 단지 더 나은 삶을 찾고 있었을 뿐”이라며 “국제사회가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탈리아 보트피플의 후손
사실 보트피플은 성서에도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이미 청동기 시대에 ‘바다 민족(Sea People)’이나 ‘바다의 사람들(People of the Sea)’로 불리던 집단이 있었다. 배를 만들어 타고 바다를 넘나들었다. 기원이 분명치 않은 이들은 배에 돼지 같은 가축과 식량, 작물 종자를 싣고 바다를 건너 지중해 연안 여러 지역으로 옮겨 다녔다. 이들의 이주 방향은 아프리카나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하는 지금과는 반대였다. 이들은 남유럽에서 출발해 에게해와 지중해를 건너 지금의 터키·시리아·가나안·키프로스·이집트로 옮겨 다녔다. 성서에 나오는 블레셋인이 이 민족이다. 더 이상 이주를 하고 않고 필리스틴으로 불리던 지역에 정착한 경우다. 유대인 양치기 소년 다윗의 돌팔매에 이마를 맞아 쓰러진 거인 골리앗이 바로 블레셋인이다. 블레셋인은 난민보다 이주 민족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이 둘을 구분하기도 쉽지 않다. 마치 현대에 경제 난민과 정치 난민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초기 난민 역사의 핵심은 고대에 신바빌로니아에 정복당하고 민족이 바빌론으로 강제 이주 당한 고대 유대인이다. 당시 이들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지금도 논란과 분쟁이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수난의 성지다. 유대 민족에겐 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난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디아스포라’ 상황에서도 종교와 규범을 잃지 않고 그리워했던 ‘영원한 마음의 고향’이다. 지금도 세계 1600만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신성한 도시로 여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다윗 왕이 기원전 1000년 무렵 유대 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을 통일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았기 때문이다. 특히 성전산에는 약 3000년 전 솔로몬왕이 건립해 기원전 967~기원전 586년 서있던 제1 성전과 약 2500년 전 세워져 기원전 515~기원 70년 존재했던 제2 성전이 있었다. 유대인들은 미래에 메시아가 나타나 이곳에 제3 성전을 세울 것으로 믿는다. 제1 성전 안에는 모세의 십계명 석판을 담은 언약궤(言約櫃)를 보관했다고 한다.

제 1 성전은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네부카드네자르 왕(구약성서에 ‘바벨론왕 느부갓네살’로 기록)의 침공으로 유대민족이 나라를 잃으면서 파괴됐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 ‘바빌론 유수’를 겪었다. 고대 세계의 강제 난민 생활이다. 유대인들이 비로소 귀향할 수 있게 된 것은 페르시아 덕분이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왕(구약성서에 ‘바사왕 고레스’로 기록)이 바빌로니아를 정복하면서 유대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일부는 이라크와 이란 지역에 남아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키루스는 피정복민의 종교에 관대해 기원전 535년 유대인들이 신성한 제2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구약성서에 ‘바사왕 다리오’로 기록)도 신전 재건의 조서를 내렸다고 구약성서 다니엘서에 기록됐다. 기원전 490년 그리스를 침공했다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한 그 군주다. 제2 성전은 다리우스가 이곳을 통치하던 기원전 516년 완공됐다. 유대 난민들의 성공적인 귀환이다. 하지만 귀환은 영원하지 못했다. 그 뒤 이곳을 점령한 로마가 문제였다. 로마는 간접 지배를 위해 헤로데 1세를 유대의 왕으로 임명했다. 헤로데 1세는 기원전 20년 무렵 유대인의 환심을 사려고 제2 성전을 보수했다. 그 덕분에 제2 성전은 ‘헤로데 성전’으로도 불렸다.

하지만 제2 성전으로 상징되는 유대 난민의 귀환 시대는 기원 70년 끝났다. 서기 66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을 속국으로 지배하던 로마 제국에 맞서 독립 봉기를 일으켜 70년까지 싸우다 패배했기 때문이다. 제1차 유대-로마 전쟁이다. 무장봉기는 열심(熱心)당원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주전파다. 항복은 물론 협상이나 타협에도 반대했다. 이스라엘 매파의 원조 격이다. 이들의 봉기는 실패했다. 로마의 보복은 잔혹했다. 로마군은 유대인 봉기 진압 후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제2 성전을 파괴하고 서쪽 벽과 돌무더기만 남겼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곳에서 통곡하며 기도했다고 해서 ‘통곡의 벽’으로 불린다. 유대 민족의 수난을 상징한다. 로마는 이 자리에 주피터 신전을 세웠다. 로마는 유대인의 예루살렘 출입도 금지했다. 유대인은 고향에서 쫓겨나 다시 세계로 흩어져 난민 생활을 해야 했다.

로마군에 붙잡힌 열심당원은 십자가에 매달리거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와 맨손으로 싸우다 죽어갔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고향을 잃었다. 세계를 방랑하는 디아스포라는 이렇게 다시 시작됐다. 살아남은 일부 열심당원은 험준한 바위산 꼭대기에 있는 넓은 땅인 마사다를 기지로 삼고 계속 저항했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동남부, 사해 서쪽에 있는 거대한 바위산 꼭대기다. 밖에선 잘 보이지도 않지만 안은 넓다. 구불구불한 샛길을 따라 한참 동안 산을 올라야 나타난다. 천혜의 요새다. 마지막 열심당원들은 이곳에서 서기 72~73년 로마군에 저항했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민족 전설을 만들었다.

서기 73년 간신히 마사다 진입에 성공한 로마군이 발견한 것은 집단 자결한 남녀 950여 명의 시신이었다. 함락 위기에 처하자 이들은 두 명의 여성과 다섯 명의 어린이를 남기고 모두 죽음을 택했다. 유대 율법은 자살을 금하므로 서로 상대의 목숨을 빼앗아 죽었을 것이다. 죽을 순 있어도 무릎 꿇을 순 없음을 목숨으로 웅변했다. 유적지는 1842년에야 발견됐다. 1963~65년 발굴에서 지하에 가매장됐던 영웅들의 유골이 나왔다. 1969년 7월 7일 이스라엘군은 최고의 예우로 군대식 장례를 치르고 유골들을 다시 매장했다. 마사다는 불굴의 독립 정신을 상징하는 민족 성지가 됐다. 6일전쟁의 영웅 모세 다얀 장군은 국방장관(1967~74 재임)이 되자 이곳을 통곡의 벽과 함께 특수부대 신병들의 선서 장소로 지정했다. 티로누트라고 불리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친 신병들은 긴 행군 끝에 야간에 샛길을 오른다. 이들은 마사다 정상에서 횃불을 뒤로 하고 군인선서를 하며 국토사수를 다짐한다. “마사다가 다시는 함락되지 않도록 하겠다.”

유대인들은 고향을 잃고 유럽과 중동 사방으로 흩어져 사실상 난민 생활을 했다. 이 중에서 이베리아 반도에 살던 유대인들은 1492년 추방돼 살 곳을 새롭게 찾아나서는 신세가 됐다. 그 해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무슬림 근거지였던 그라나다를 점령하고 레콩키스타(기독교도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재정복)를 이룬 스페인은 무슬림은 물론 유대인까지 추방하는 명령을 내렸다. 그해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준비 중이던 콜롬부스가 배를 구하지 못해 출항 일정을 미뤘을 정도다. 추방돼 떠나는 유대인들로 배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가톨릭 개종과 추방 중에서 택일했어야 했다. 1492년은 그라나다 점령, 콜롬부스의 신대륙 도착, 그리고 유대인의 이베리아 반도라는 세 가지 세계사적 사건의 해로 기록된다. 가톨릭으로 개종한 부유한 유대인들의 운명은 좋지 못했다. 상당수가 그들의 재산을 노린 사람들로부터 거짓 개종을 했다는 모함 속에 재산과 토지는 물론 목숨까지 잃었기 때문이다. 거짓 개종을 신고한 사람은 당사자의 재산 둥 일정 부분을 가질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베리아 반도를 떠난 유대인의 상당수는 종교 관용의 지역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는 ‘헤도헌(gedogen)’이라고 해서 타인에게 관용을 보이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전통이 있다. 당시 네덜란드는 지금의 벨기에와 하나의 지역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보석 가공, 금융 등 자신들이 가진 재주와 노하우를 활용해 산업을 일으켰다. 벨기에의 도시 안트워프(네덜란드어로 안트베르펜, 프랑스어로 앙베르)는 지금도 세계적인 보석 가공의 도시다. 네덜란드는 난민을 받아들여 번영의 불씨로 활용한 지혜의 나라로 통한다. 경제적인 기여가 많았던 유대인을 쫓아낸 후 금융과 유통망이 무너졌던 스페인은 1557년 국가부도를 선언하는 등 경제가 허약해졌다. 물론 다른 요인도 많았겠지만 관용을 포기한 대가를 치른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스페인 하원은 2015년 3월 25일 1492년 자국에서 추방된 ‘세파르디 유대인(이베리아 반도 출신 유대인)’의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하원은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큰 실수인 1492년의 유대인 추방령을 바로 잡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스페인에는 당시 세파르디 후손 9만 명이 정착한 상태였지만 외국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전에는 세파르디 자손임을 증명해도 2년 이상 스페인에 거주하고 이전 국적을 포기해야 스페인 국적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법 덕분에 그런 절차 없이도 간단히 곧바로 스페인 국적을 보유할 수 있게 됐다. 과거 유대인을 추방했던 포르투갈을 2015년 1월 같은 조치를 취했다. ‘역사 바로잡기’ 취지인지 유대인와 이스라엘의 투자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지는 알 수 없다.
 위그노 탄압한 루이 14세
6월 29일(현지시간) 북아프리카 리비아 해상에서 난민들이 탄 고무보트가 전복돼 100여 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16명이 구조된 가운데, 이날 트리폴리 동쪽 해안에서 2~3살로 추정되는 여아 시신 세 구가 수습됐다. / 사진:연합뉴스
난민이 정착 국가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사례는 17~18세기의 위그노도 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다. 프랑스는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으로 가톨릭과 신교도 사이의 종파 갈등을 종식하고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다.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인 번영을 누리며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면서 ‘부르봉의 전성기’를 맞았다. 하지만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1638~1715)는 1685년 10월 22일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퐁텐블로 칙령’을 내렸다. 개신교를 불법화하고 위그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처벌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내용이다.

낭트 칙령 폐지의 배경을 놓고 다양한 주장이 있지만 가장 설득력 있어 보이는 설명이 루이 14세는 국민을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로 묶는 것이 절대왕정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왕의 권력은 신이 내린 것이라는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며 ‘짐이 곧 국가다’라고 외쳤던 루이 14세가 권력 강화라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종교적 관용을 포기하고 편 가르기에 나선 셈이다. 절대권력과 독재는 믿음과 생각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대신 획일성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프랑스는 내전 못지 않은 위기에 빠졌다. 경제에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퐁텐블로 칙령으로 박해를 우려한 위그노 20만~100만 명이 국외로 탈출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새로운 난민이다. 루이 14세 본인이 1686년 1월 17일 “80만~90만 명의 위그노 중 지금 프랑스에 남은 자는 1000~1500명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발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인구 감소 못지 않게 중요한 사실은 위그노의 상당수가 상공업 종사자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부의 정당한 축적을 인정한 칼뱅주의 교리를 따랐다. 당시 프랑스 기업인·장인·기술자의 상당수를 차지하며 상공업에 필수적인 지식·노하우·기술·경험·창의력을 보유한 위그노의 국외 망명은 심각한 ‘인재 기근’을 유발했다. 특히 실크·시계·열쇠·판유리·은공예·가구 산업은 숙련공의 상당수가 사라지면서 프랑스 경제는 휘청거렸다. 위그노 중에는 수학자·천문학자·역사학자·작가·교사 등 지식인도 많았다. 이들은 프랑스를 떠나 새롭게 정착한 나라의 과학기술과 산업, 문화예술, 교육 등의 발달에 기여했다. 당시의 타격은 1789년의 대혁명 발발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위그노는 탄압을 피해 종교·종파에 관용적인 네덜란드·스위스나 개신교가 다수인 영국·프로이센·덴마크·스웨덴 등으로 이주했다. 북미대륙과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에도 정착했다. 경제를 잘 아는 위그노가 이주한 네덜란드·영국·프로이센·미국 등이 나중에 강국으로 부상해 세계를 경영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들 나라는 위그노를 국가 경영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위그노는 이주한 나라에서 축복이었다. 종교적 관용으로 이름난 네덜란드는 위그노 난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일부 위그노는 네덜란드를 거쳐 남아프리카 식민지로 이주했다.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의 남아공 포도주는 위그노가 개척했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니콜라스 터프스트라(역사학) 교수는 2015년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서 펴낸 저서 [근세 초기의 종교 난민(Religious Refugee in the Early Modern World)]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네덜란드는 절대 군주가 없어 ‘하나의 군주, 하나의 신앙, 하나의 법률’을 앞세워 전제정치를 추구했던 프랑스와 달리 종교적 관용정신이 강해 위그노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전제정치나 독재정치가 없어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사회 분위기를 유지해 외국에서 유용한 인재·지식·기술을 흡수할 수 있어 강소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당시 독일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작인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 재위1640~1688)은 1685년 10월 29일 ‘포츠담 칙령’을 발표하고 정책적으로 위그노의 정착을 장려했다. 그가 자국에 도착한 위그노 난민을 환영하는 부조도 제작됐을 정도다. 그 뒤 프로이센이 부국강병책으로 강국으로 부상하고 독일 통일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데는 17세기 경제 노하우를 지닌 위그노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산업진흥을 꾀했던 것이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관용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
영국도 위그노에게 문을 열었다. 런던 박물관에 따르면 1685년 낭트 칙령 폐지로 이주해온 위그노가 늘면서 1700년에는 런던에 무려 23개의 위그노 교회가 들어섰다. 런던과 에식스는 위그노가 들여온 실크 산업의 중심지가 됐다. 위그노 실크 공장은 1900년대 초까지 가동하며 세계에 견직물을 수출했다. 1694년 설립된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 영란은행이라고도 함)의 초대 총재와 런던 시장을 지낸 금융인 존 허블런(1632~1712)도 프랑스 북부 릴에서 이주한 위그노 경제인이다. 당시 첨단제품이던 정밀 추시계도 위그노 장인이 만들었다. 제지업도 기술이 뛰어난 위그노가 주도했다. 1842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창업해 예술품 수준의 보석 공예품 ‘파베르제 달걀’로 명성을 얻은 러시아 보석상 파베르제 집안도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에서 이주한 위그노 난민의 후손이다.

프랑스 사회당 소속의 프랑수아 미테랑(1916~96년, 재임 1981~95년) 대통령은 퐁텐블로 칙령 선포 300주년이던 1985년 10월 세계에 있는 위그노 후손에게 공개 사과를 했다. 때늦은 사과였다. 난민의 역사는 관용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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