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에 맞서는 멕시코의 좌파 대통령
트럼프에 맞서는 멕시코의 좌파 대통령
부패와 범죄에 시달린 멕시코 유권자 89년 만에 좌익 포퓰리스트 정권 선택했지만 넘어야 할 장애물 많아 멕시코는 지난 7월 1일 선거를 통해 향후 6년 임기의 제58대 대통령에 좌익 성향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64)를 선택했다. 이로써 멕시코에는 89년 간 이어져 온 우파 정권이 물러나고 중도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됐다.
오는 12월 1일 취임해 6년 간 임기를 이어갈 로페스 오브라도르 당선인은 좌파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건 인물로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각을 세우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긴 이름의 이니셜을 따 AMLO(암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 사상 최악으로 치닫는 치안위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압박에 따른 대중의 염증과 반발에 힘입어 대통령에 선출된 것으로 분석된다.
대선·총선·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져 멕시코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번 선거에서 지난해 9월 이래 130명 이상의 후보와 당원이 살해됐다. 멕시코에 만연한 마약카르텔 등 조직범죄 및 이에 연관된 정부 안팎의 부정부패가 원인이다. 지난해 멕시코 당국에 보고된 계획적인 살인은 약 2만9000건으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7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많았다. 살인율도 인구 10만 명당 20.51명으로 2016년의 16.80명보다 높아졌다. 전체 범죄의 94%가량은 아예 경찰에 신고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살인 용의자 검거율은 17%로 2년 전인 2015년의 27.5%보다 대폭 낮아졌다. 일부 지방에서는 마약 카르텔이 사실상 지방정부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멕시코 국민은 엔리케 페냐 니에토 현 대통령 및 그 정부가 이런 치안 악화에 전혀 손쓰지 못하는데다 만연한 부정부패와 경제 악화에 염증을 드러내 왔다. 치안 악화가 안보위기로까지 진행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이민·무역 문제로 멕시코를 압박하는 것도 멕시코 유권자에게 새로운 선택을 압박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에 장벽을 쌓고 그 비용을 멕시코에 부담하라고 강요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암로 후보는 조직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약속하는 한편 반(反)트럼프 노선도 천명해 유권자의 표심을 잡았다. ‘멕시코의 좌파 트럼프’로 불릴 정도로 거침없는 발언과 포퓰리스트적인 접근으로 유권자의 관심을 끌며 선두 주자로 나섰다. 악화되는 치안과 반트럼프 정서는 그에게 그동안 붙여졌던 ‘급진파’라는 딱지를 가리는 배경이 됐다.
그의 당선은 멕시코에서 한 세기 가까이 계속된 제도혁명당(PRI) 중심의 독점 정치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알리는 서곡으로 평가된다. PRI는 1929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직 뿐만 아니라 모든 주지사를 석권하며 여당으로 군림했다. 2000년 대선에선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후보가 당선됐으나 PRI가 다시 정권을 탈환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 PRI의 통치가 약화되고 우파 중심의 독점적 권력구조가 흔들리면서 이번 대선에서 결국 좌파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에서 국가재건운동(MORENA)과 노동자당(PT) 등 중도 좌파 정당 연합인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의 후보인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50%대의 득표율로 경쟁후보였던 중도우파 PAN·중도좌파 민주혁명당(PRD)의 연합 ‘멕시코를 위해 앞으로’의 후보인 리카르도 아나야(38)를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아나야 후보는 27.6%를 득표했다. 집권당인 중도우파 PRI의 호세 안토니오 미드(48) 후보는 득표율 18.3%로 3위였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암로의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연대가 압승을 거뒀다. 같은 정당이 대선과 총선·지방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것은 21년만에 처음이다. 게다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선 환경운동가 출신 유대계 좌파 정치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56)이 역시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연대의 후보로 출마해 사상 첫 여성 시장으로 선출돼 성 불평등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멕시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 수 있을지 주목된다.암로 당선인은 경력 40년 이상의 노련한 정치인이다. 그는 1976년 PRI에 입당했다가 내부 문제와 이념적 차이 때문에 1988년 탈당했다. 1989년엔 PRD에 입당해 1990~1996년 대표를 지냈다. 2000~2005년 멕시코시티 시장을 역임했으며 2006년과 2012년 대선에 출마했다. 따라서 세 번째 출마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그는 네 자녀를 뒀으며 두 번 결혼했다. 그는 흔히 포퓰리스트로 불린다. 특히 2006년 대선 출마 때부터 유권자에게 포퓰리스트로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 선거에서 그는 35.51%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당시 보수정당 PAN의 후보였던 펠리페 칼데론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당시 암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자신이 ‘적법한 대통령’이라고 선포하고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고 칼데론 대통령은 2012년까지 집권했다.
오랫동안 비판자들은 암로를 베네수엘라의 장기집권 지도자 고(故) 우고 차베스에 견주며 ‘멕시코의 차베스’라고 불렀다. 미국에 맞선 정유공장 건설, 유가 인하, 부의 공평한 분배 등 포퓰리스트 이념 때문이었다. 반대파는 그가 베네수엘라의 경제적·인도주의적 위기를 불러온 차베스와 똑같은 정책을 원한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반대파의 그런 전술이 올해는 먹혀들지 않았다고 본다. 미국 외교협회(CFR)의 멕시코 전문가 섀넌 K. 오닐 연구원은 “멕시코는 베네수엘라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베네수엘라와 달리 멕시코는 수출에 기초한 다각화된 경제 시스템을 갖고 있으며 첨단 제조산업이 발달했다. 석유 수출은 멕시코 경제의 10%도 차지하지 않는다. 게다가 암로는 차베스가 아니다. 그는 멕시코 특유의 민족주의 포퓰리스트다.”
워싱턴 D.C. 소재 윌슨센터 멕시코 연구소의 던컨 우드 소장도 같은 생각이다. “멕시코 국민은 암로를 차베스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에 견주는 전술을 좋지 않게 본다. 중·상류층에선 그런 전술이 먹히지만 서민은 생각이 다르다. 그의 경제 정책은 자유무역과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중도나 중도 우파 후보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암로 당선인의 앞날이 순탄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12월 1일 취임하면 부닥칠 주요 문제를 짚어 본다.
임시 개표결과가 발표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멕시코 차기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그와 함께 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적었다.
암로 당선인은 선거운동 기간에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주의 정책에 대한 ‘멕시코의 대항마’로 묘사됐다. NAFTA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미국 대 캐나다·멕시코의 재협상을 경색시키면서 일부 전문가는 암로 당선인도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파격적인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가 멕시코의 미국 농산물 수입 의무를 폐지하고 산유국이면서 석유관련 제품을 수입하는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정유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이다.
CFR의 오닐 연구원은 “보호주의의 주된 위협이 여전히 미국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암로 정부는 그에 맞서 보조금과 보호 정책을 통해 지지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농을 지원하고 정유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을 도모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 정책은 미국의 농업과 미국 남부의 정유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암로 당선인이 NAFTA 협상에서 그와 다른 전술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나야 후보가 이끈 연대 ‘멕시코를 위해 앞으로’의 대변인 앙헬 아빌라는 뉴스위크에 “NAFTA로 혜택을 보는 미국인, 주로 미국의 농민과 자동차산업 종사자와 연대해 그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의회에 압력을 가해 NAFTA를 비준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 많은 일자리가 걸려 있어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멕시코와 미국 두 나라 모두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암로는 성격상 트럼프 대통령과 닮은 점이 아주 많다. 우드 소장은 “그를 경제적인 민족주의자로 봐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다”고 말했다. “암로는 식량·휘발유·자동차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더 많은 생산시설을 다시 멕시코로 들여오고 싶어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과 매우 비슷하다. 그는 권위주의 성향으로 비판 받아 왔다. 반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트럼프와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이민 문제에선 암로뿐 아니라 다른 후보들도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지대 군병력 배치를 비판했다. 암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를 공격하는 프로파간다로 이런 캠페인을 이용한다”며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 위협 요인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위협은 없다”고 말했다.
암로는 또한 이민자 어린이를 가족과 격리시켰던 트럼프 대통령의 ‘무관용” 정책을 비판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억압적·인종차별적·비인간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백악관의 어떤 “억압적인” 이민 정책에도 맞서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달 초 쿨리아칸주 연설에서 “이번 승리로 우리가 중미, 멕시코 그리고 미대륙 전체의 이민자를 보호할 것”이라며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인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 간에 변화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오닐 연구원은 “차관보같은 실무자들의 일상적인 교류 등 양국 관계는 상당 부분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트윗과 조소에 신중한 침묵을 지켰던 페냐 니에토 대통령과는 다를 수 있다. 암로가 트럼프와 정면 대결을 벌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기 정치기반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안다. 그것은 항상 약자 편에 서는 방식이었다. 멕시코 국내에선 엘리트 집단에 맞섰지만 해외에선 트럼프가 안성맞춤의 표적이다. 멕시코에선 펠리페 칼데론 전 대통령이 2006년 마약조직에 선전포고한 뒤로 폭력이 난무했다. 지난해만 해도 영국 가디언 신문에 따르면 살인이 2만9000건을 넘어 1997년 이후 최고를 기록했다. 지난해 살인사건 수사는 물러나는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1년의 임기를 마친 2013년 대비 40% 증가했다.
마약거래 관련자 대상의 사면을 실시하겠다는 암로의 논평은 논란을 촉발했지만 그가 여러 경찰 병력 간의 수사 조율에 착수해 부패 관료와 범죄자들 간의 결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빌라 대변인은 “지난 6년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피를 많이 뿌린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의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멕시코에 20만 명의 경찰병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봉급을 인상해 시가지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마약조직 거물들만 체포할 게 아니라 조직범죄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
재무부가 “금융정보국과 공조체제를 갖춰 마약조직의 소득을 압수할 수도 있다”고 아빌라 대변인은 덧붙였다. 동시에 멕시코는 “미국에서 유입되는 총이 마약조직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며 “청소년 취업 프로그램을 마련해 조직범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가 유혈극에서 쉽게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우드 소장은 “조직범죄 근절 방법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고 말했다. “소규모 마약 생산자의 사면을 논하는 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암로가 시가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힘의 공백이 생겨 곧바로 조직범죄로 채워지게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적어도 한 세대는 걸릴 것이다.” 중미 지역으로부터의 이민도 멕시코가 남쪽 국경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2014년 미국의 도움으로 시행된 남부국경계획(Southern Border Plan)에선 이민 담당직원, 해병대원, 현지 당국자를 배치해 멕시코-과테말라 국경 인근 치아파스주에 봉쇄 구역을 지정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남부 국경을 통해 멕시코로 유입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다’고 트윗을 띄웠지만 그 계획이 시행된 이후 멕시코는 50만 명 이상의 중미 국적자들을 추방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감안할 때 일부 관측통은 멕시코가 중남미와 유대를 강화할 때가 됐다고 본다. 칼데론 후보 선거진영의 엔리케 토레스 대변인은 “멕시코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미국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남쪽의 이웃들과의 유대 강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멕시코-미국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초점을 바꿔야 한다.”
우드 소장은 “경제적으로 멕시코는 북미 국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중남미 지역의 가장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암로는 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좌우 양 진영의 모든 중남미 지도자들에게 손을 내밀 듯하다. 미국과의 현재 분위기를 감안할 때 많은 멕시코인이 그것을 환영할 것이다.”
아나야 후보의 대변인은 “멕시코가 중남미 지역 지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1980년대 초 중미 게릴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콘타도라 그룹의 중요한 조인국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빌라 대변인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같은 남미의 경제 블록과 더 개방된 관계를 구축해 미국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대통령 당선인의 앞길에 놓인 많은 과제 속에서 암로가 어떤 대통령이 될지는 앞으로 지켜봐야 한다. 오닐 연구원은 “이제 의문은 캠페인에서 드러난 모습 중 어떤 암로가 통치자로 나서느냐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와 그의 대리인들은 교육개혁, 에너지 정책, 관료체제의 미래, 안보구상 등 온갖 현안에 관해 여러 가지 상충되는 입장을 드러냈다. 상당수가 실용적이지만 극단적인 건의안도 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 연합이 확보한 의석 수 덕분에 그의 정책 집행이 수월할 전망이다. 우드 소장은 “그의 연합 파트너, 다른 정당의 의원들과 협력해 의회에서 과반수를 달성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암로의 정당은 충분한 의석을 확보해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정당이 그랬던 것처럼 동맹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
아빌라 대변인은 아나야 후보의 연합이 결과와는 상관없이 의회에서 협력하기로 협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멕시코에 절실히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다”며 “의회에서 지명을 미루는 반부패 검사와 검찰총장 임명이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칼데론 후보의 대변인 입장에선 정치적 분열의 봉합이 최대 과제가 될 것이다. 토레스 대변인은 “칼데론만 제외하고 이번 대선 레이스가 전체적으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아 멕시코인 사이에 분열을 촉발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더 나은 나라를 원하지만 멕시코인도 태도를 바꿔 아무리 현명하거나 강한 지도자라도 혼자 힘으로 멕시코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칼데론 후보는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잘하면 멕시코도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로버트 발렌시아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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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1일 취임해 6년 간 임기를 이어갈 로페스 오브라도르 당선인은 좌파 민족주의를 기치로 내건 인물로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각을 세우면서 돌풍을 일으켰다. 긴 이름의 이니셜을 따 AMLO(암로)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 사상 최악으로 치닫는 치안위기와 트럼프 대통령의 멕시코 압박에 따른 대중의 염증과 반발에 힘입어 대통령에 선출된 것으로 분석된다.
대선·총선·지방선거가 동시에 치러져 멕시코 사상 최대 규모였던 이번 선거에서 지난해 9월 이래 130명 이상의 후보와 당원이 살해됐다. 멕시코에 만연한 마약카르텔 등 조직범죄 및 이에 연관된 정부 안팎의 부정부패가 원인이다. 지난해 멕시코 당국에 보고된 계획적인 살인은 약 2만9000건으로 관련 통계가 집계되기 시작한 1997년 이후 20년 만에 가장 많았다. 살인율도 인구 10만 명당 20.51명으로 2016년의 16.80명보다 높아졌다. 전체 범죄의 94%가량은 아예 경찰에 신고조차 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살인 용의자 검거율은 17%로 2년 전인 2015년의 27.5%보다 대폭 낮아졌다. 일부 지방에서는 마약 카르텔이 사실상 지방정부 역할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멕시코 국민은 엔리케 페냐 니에토 현 대통령 및 그 정부가 이런 치안 악화에 전혀 손쓰지 못하는데다 만연한 부정부패와 경제 악화에 염증을 드러내 왔다. 치안 악화가 안보위기로까지 진행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이민·무역 문제로 멕시코를 압박하는 것도 멕시코 유권자에게 새로운 선택을 압박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국경에 장벽을 쌓고 그 비용을 멕시코에 부담하라고 강요한 것이 결정적이었다.암로 후보는 조직범죄에 대한 강력한 대처를 약속하는 한편 반(反)트럼프 노선도 천명해 유권자의 표심을 잡았다. ‘멕시코의 좌파 트럼프’로 불릴 정도로 거침없는 발언과 포퓰리스트적인 접근으로 유권자의 관심을 끌며 선두 주자로 나섰다. 악화되는 치안과 반트럼프 정서는 그에게 그동안 붙여졌던 ‘급진파’라는 딱지를 가리는 배경이 됐다.
그의 당선은 멕시코에서 한 세기 가까이 계속된 제도혁명당(PRI) 중심의 독점 정치구조에 근본적인 변화를 알리는 서곡으로 평가된다. PRI는 1929년부터 2000년까지 대통령직 뿐만 아니라 모든 주지사를 석권하며 여당으로 군림했다. 2000년 대선에선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 후보가 당선됐으나 PRI가 다시 정권을 탈환했다. 하지만 2000년 이후로 PRI의 통치가 약화되고 우파 중심의 독점적 권력구조가 흔들리면서 이번 대선에서 결국 좌파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에서 국가재건운동(MORENA)과 노동자당(PT) 등 중도 좌파 정당 연합인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의 후보인 로페스 오브라도르는 50%대의 득표율로 경쟁후보였던 중도우파 PAN·중도좌파 민주혁명당(PRD)의 연합 ‘멕시코를 위해 앞으로’의 후보인 리카르도 아나야(38)를 누르고 압승을 거뒀다. 아나야 후보는 27.6%를 득표했다. 집권당인 중도우파 PRI의 호세 안토니오 미드(48) 후보는 득표율 18.3%로 3위였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과 지방선거에서도 암로의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연대가 압승을 거뒀다. 같은 정당이 대선과 총선·지방선거에서 모두 승리한 것은 21년만에 처음이다. 게다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에선 환경운동가 출신 유대계 좌파 정치인 클라우디아 셰인바움(56)이 역시 ‘함께 역사를 만들어 갑시다’ 연대의 후보로 출마해 사상 첫 여성 시장으로 선출돼 성 불평등이 심각한 것으로 알려진 멕시코 사회에 변화의 바람이 불 수 있을지 주목된다.암로 당선인은 경력 40년 이상의 노련한 정치인이다. 그는 1976년 PRI에 입당했다가 내부 문제와 이념적 차이 때문에 1988년 탈당했다. 1989년엔 PRD에 입당해 1990~1996년 대표를 지냈다. 2000~2005년 멕시코시티 시장을 역임했으며 2006년과 2012년 대선에 출마했다. 따라서 세 번째 출마에서 대통령에 선출된 것이다.
그는 네 자녀를 뒀으며 두 번 결혼했다. 그는 흔히 포퓰리스트로 불린다. 특히 2006년 대선 출마 때부터 유권자에게 포퓰리스트로서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그 선거에서 그는 35.51%의 득표율을 올렸지만 당시 보수정당 PAN의 후보였던 펠리페 칼데론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했다. 당시 암로는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자신이 ‘적법한 대통령’이라고 선포하고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그러나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고 칼데론 대통령은 2012년까지 집권했다.
오랫동안 비판자들은 암로를 베네수엘라의 장기집권 지도자 고(故) 우고 차베스에 견주며 ‘멕시코의 차베스’라고 불렀다. 미국에 맞선 정유공장 건설, 유가 인하, 부의 공평한 분배 등 포퓰리스트 이념 때문이었다. 반대파는 그가 베네수엘라의 경제적·인도주의적 위기를 불러온 차베스와 똑같은 정책을 원한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는 반대파의 그런 전술이 올해는 먹혀들지 않았다고 본다.
트럼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민 문제
워싱턴 D.C. 소재 윌슨센터 멕시코 연구소의 던컨 우드 소장도 같은 생각이다. “멕시코 국민은 암로를 차베스나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에 견주는 전술을 좋지 않게 본다. 중·상류층에선 그런 전술이 먹히지만 서민은 생각이 다르다. 그의 경제 정책은 자유무역과 외국인 직접투자(FDI)를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중도나 중도 우파 후보도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암로 당선인의 앞날이 순탄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가 12월 1일 취임하면 부닥칠 주요 문제를 짚어 본다.
임시 개표결과가 발표된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멕시코 차기 대통령이 된 것을 축하한다. 나는 그와 함께 일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 멕시코 모두에게 이익이 되도록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다!’고 적었다.
암로 당선인은 선거운동 기간에 트럼프 대통령의 보호주의 정책에 대한 ‘멕시코의 대항마’로 묘사됐다. NAFTA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이 미국 대 캐나다·멕시코의 재협상을 경색시키면서 일부 전문가는 암로 당선인도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한 파격적인 접근법을 취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히 그가 멕시코의 미국 농산물 수입 의무를 폐지하고 산유국이면서 석유관련 제품을 수입하는 현실을 탈피하기 위해 정유공장을 건설하겠다고 공약했기 때문이다.
CFR의 오닐 연구원은 “보호주의의 주된 위협이 여전히 미국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암로 정부는 그에 맞서 보조금과 보호 정책을 통해 지지자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소농을 지원하고 정유공장을 건설함으로써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을 도모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런 정책은 미국의 농업과 미국 남부의 정유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암로 당선인이 NAFTA 협상에서 그와 다른 전술을 채택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아나야 후보가 이끈 연대 ‘멕시코를 위해 앞으로’의 대변인 앙헬 아빌라는 뉴스위크에 “NAFTA로 혜택을 보는 미국인, 주로 미국의 농민과 자동차산업 종사자와 연대해 그들이 트럼프 대통령과 의회에 압력을 가해 NAFTA를 비준토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너무나 많은 일자리가 걸려 있어 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멕시코와 미국 두 나라 모두에 재앙이 닥칠 것이다.”이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암로는 성격상 트럼프 대통령과 닮은 점이 아주 많다. 우드 소장은 “그를 경제적인 민족주의자로 봐야 한다는 점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공통점이 많다”고 말했다. “암로는 식량·휘발유·자동차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더 많은 생산시설을 다시 멕시코로 들여오고 싶어 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공약과 매우 비슷하다. 그는 권위주의 성향으로 비판 받아 왔다. 반대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트럼프와의 또 다른 공통점이다.”
이민 문제에선 암로뿐 아니라 다른 후보들도 지난 4월 트럼프 대통령의 국경지대 군병력 배치를 비판했다. 암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를 공격하는 프로파간다로 이런 캠페인을 이용한다”며 “미국-멕시코 국경지대에 위협 요인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런 위협은 없다”고 말했다.
암로는 또한 이민자 어린이를 가족과 격리시켰던 트럼프 대통령의 ‘무관용” 정책을 비판하며 트럼프 대통령을 “억압적·인종차별적·비인간적”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백악관의 어떤 “억압적인” 이민 정책에도 맞서겠다고 다짐했었다. 이달 초 쿨리아칸주 연설에서 “이번 승리로 우리가 중미, 멕시코 그리고 미대륙 전체의 이민자를 보호할 것”이라며 “우리가 옹호하는 것은 인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양국 간에 변화는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오닐 연구원은 “차관보같은 실무자들의 일상적인 교류 등 양국 관계는 상당 부분 변함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트윗과 조소에 신중한 침묵을 지켰던 페냐 니에토 대통령과는 다를 수 있다. 암로가 트럼프와 정면 대결을 벌이지는 않을지 모르지만 그는 자기 정치기반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안다. 그것은 항상 약자 편에 서는 방식이었다. 멕시코 국내에선 엘리트 집단에 맞섰지만 해외에선 트럼프가 안성맞춤의 표적이다.
조직 범죄
마약거래 관련자 대상의 사면을 실시하겠다는 암로의 논평은 논란을 촉발했지만 그가 여러 경찰 병력 간의 수사 조율에 착수해 부패 관료와 범죄자들 간의 결탁이 사라질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아빌라 대변인은 “지난 6년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피를 많이 뿌린 기간이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차기 대통령의 새로운 전략이 필요하다. 멕시코에 20만 명의 경찰병력이 부족하다. 그들의 봉급을 인상해 시가지에서 군대를 철수해야 한다. 마약조직 거물들만 체포할 게 아니라 조직범죄 자체를 무너뜨려야 한다.”
재무부가 “금융정보국과 공조체제를 갖춰 마약조직의 소득을 압수할 수도 있다”고 아빌라 대변인은 덧붙였다. 동시에 멕시코는 “미국에서 유입되는 총이 마약조직의 손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차단해야 한다”며 “청소년 취업 프로그램을 마련해 조직범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멕시코가 유혈극에서 쉽게 벗어날 길은 보이지 않는다. 우드 소장은 “조직범죄 근절 방법에 관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다”고 말했다. “소규모 마약 생산자의 사면을 논하는 식으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암로가 시가지에서 군대를 철수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힘의 공백이 생겨 곧바로 조직범죄로 채워지게 된다. 이 문제가 해결되려면 적어도 한 세대는 걸릴 것이다.”
라틴 아메리카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감안할 때 일부 관측통은 멕시코가 중남미와 유대를 강화할 때가 됐다고 본다. 칼데론 후보 선거진영의 엔리케 토레스 대변인은 “멕시코는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뉴스위크에 말했다. “우리는 너무 오랜 세월 미국에 의존해 왔기 때문에 남쪽의 이웃들과의 유대 강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물론 멕시코-미국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이번 일을 교훈 삼아 초점을 바꿔야 한다.”
우드 소장은 “경제적으로 멕시코는 북미 국가”라고 말했다.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중남미 지역의 가장 효과적인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암로는 남쪽으로 눈길을 돌려 좌우 양 진영의 모든 중남미 지도자들에게 손을 내밀 듯하다. 미국과의 현재 분위기를 감안할 때 많은 멕시코인이 그것을 환영할 것이다.”
아나야 후보의 대변인은 “멕시코가 중남미 지역 지도자 역할을 맡아야 한다”며 “1980년대 초 중미 게릴라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콘타도라 그룹의 중요한 조인국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빌라 대변인은 “메르코수르(남미공동시장) 같은 남미의 경제 블록과 더 개방된 관계를 구축해 미국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멕시코의 앞날
그러나 대통령 당선인 연합이 확보한 의석 수 덕분에 그의 정책 집행이 수월할 전망이다. 우드 소장은 “그의 연합 파트너, 다른 정당의 의원들과 협력해 의회에서 과반수를 달성하기가 쉬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암로의 정당은 충분한 의석을 확보해 페냐 니에토 대통령의 정당이 그랬던 것처럼 동맹을 구축할 필요가 없다.”
아빌라 대변인은 아나야 후보의 연합이 결과와는 상관없이 의회에서 협력하기로 협약을 체결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멕시코에 절실히 필요한 개혁을 추진하고자 한다”며 “의회에서 지명을 미루는 반부패 검사와 검찰총장 임명이 대표적”이라고 덧붙였다.
칼데론 후보의 대변인 입장에선 정치적 분열의 봉합이 최대 과제가 될 것이다. 토레스 대변인은 “칼데론만 제외하고 이번 대선 레이스가 전체적으로 대결 양상으로 치달아 멕시코인 사이에 분열을 촉발했다”고 말했다. “우리 모두 더 나은 나라를 원하지만 멕시코인도 태도를 바꿔 아무리 현명하거나 강한 지도자라도 혼자 힘으로 멕시코를 바꿔놓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칼데론 후보는 대통령에 선출되지 않을 경우 대통령 당선인을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 잘하면 멕시코도 좋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 로버트 발렌시아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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