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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궤도에 오른 비핵화 협상

다시 궤도에 오른 비핵화 협상

봄에 판문에서 뿌린 남북관계 개선의 씨앗이 가을 평양에서 한꺼번에 소화를 못시킬 만큼 수확이 풍성했다. 5개월 사이에 세 번째로 만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2박3일 간의 퍼포먼스는 어느 것 하나 ‘최초’ ‘극적’ ‘역사적’인 것 아닌 게 없다. 정상회담에서의 합의와 회담장 밖의 분위기 전체를 묶으면 하나의 열정적인 디오니소스적 교향곡이 된다.

문 대통령이 평양 시민들의 익숙한 생각의 틀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순안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연도에 늘어 선 10만 인파와 5·1 경기장에 모인 15만 북한인들은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자신들을 향해 깊이 허리를 꺾어 인사하는 모습을 처음 봤다.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15만 군중 앞에서 남북한이 함께 전쟁 없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어 나가자고 한 호소는 평양시민들과 방송으로 본 북한 주민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비핵화의 필요와 정당성을 납득시켜야 하는 짐을 덜어준 것이기도 하다. 시민들이 좋아하는 식당에서의 식사,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한 백두산 등정, 두 지도자의 포옹, 양쪽 퍼스트레이디들의 팔짱 낀 모습은 평양 시민들에게 딴 세상 같은 인상을 남겼을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서울 방문 초청 수락도 놀라운 성과다. 문 대통령은 사실상 북한사회에 씨앗 하나를 떨어뜨리고 왔다.

형식이 내용을 규정한다는 말 대로 문 대통령이 받은 융숭한 대접, 북한인들의 눈에는 자유분방하게 보였을 문 대통령의 광폭 행보가 실제로 회담 성과와 균형을 맞추고 있는가. 평양 정상회담 의제 중 핵심의 핵심인 비핵화부터 보자. 판문점선언 3조 4항은 이렇게 되어 있다. ‘남과 북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를 실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확인하였다.’ 애매한 개념적 선언이다.

이것이 평양선언에서는 5조 1, 2, 3항으로 구체화 되었다. ‘▶북측은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우선 영구적으로 폐쇄하기로 하였다. ▶북측은 미국이 6·12 북미공동성명의 정신에 따라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면 영변 핵시설의 영구적인 폐기와 같은 추가적인 조치를 계속 취해나갈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였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추진해나가는 과정에서 함께 긴밀히 협력해나가기로 하였다.’

북한은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내외 기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폐쇄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과 국제사회는 전문가들의 참관과 검증, 미국식 표현으로는 사찰 없는 핵 실험장 폐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래서 북한은 “유관국 전문가들의 참관 하에” 동창리 미사일 관련 시설을 폐기하는 데 동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라도 판문점 선언과 “북한은 판문점 선언을 확인하고 완전한 비핵화를 약속(commit)하기로 노력한다”는 싱가포르 선언에 비하면 장족의 진전이요 비핵화의 확실한 구체화다.

그러나 큰 게 하나 빠졌다. 미국이 요구하는 핵무기와 핵물질의 목록이다. 풍계리 핵 실험장 폐쇄나 동창리 미사일 시험장 폐기는 미래 핵의 폐기를 의미한다. 북한이 현재 보유하고 있으면서 한국과 미국을 위협하는 추정 20~30개의 핵탄두와 이동식 발사대에 실려 있는 100기 이상의 미사일은 평양선언에 들어있지 않다. 미국은 북한이 건네는 핵 목록을 토대로 현재 핵과 운반수단(미사일)을 검증·사찰하지 않는 비핵화는 진정한 비핵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큰 갭에 대한 대답을 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내어 놓았다. 평양선언에 들어있지 않은 북한의 약속이다. 평양선언의 플러스 알파다. 김정은으로부터 플러스 알파를 사전에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평양선언을 아주 잘 된 것이라고 즉각 환영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명은 문 대통령이 9·19 한미 정상회담에서 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에게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확고하다는 점, 김정은은 비핵화 과정을 조기에 끝내고 싶어 한다는 점을 트럼프에게 전달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은 어땠을까. 평양선언에 들어가지 않은 김정은의 플러스 알파가 2차 북미 정상회담을 해도 좋을 만큼의 조건은 충족시킨 것 같다. 트럼프 대통령이 머지않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고, 지금 여러 채널을 통해 날짜와 장소를 논의 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국이 종전선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 북한이 요구하는 상응조치에도 묵묵부답인 것은 한국에게는 실망스럽다. 물론 그런 사항들은 김·트럼프 회담에서 테이블에 올릴 협상카드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북미 간 중재는 일단 막혀있던 북미관계에 중요한 돌파구를 뚫었다. 조만간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4차 평양 방문을 하여 핵 목록 제시에서 검증 하의 반출과 폐기까지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있는 빈에서는 미국 대북 핵협상 대표 스티븐 비건과 북한 외무성 부상 최선희가 만난다. 뉴욕에서도 북한 외무상 리용호가 폼페이오를 만날 것이다. 장마철 댐의 수문 열리듯 북미 대화가 꼬리를 물고 열린다.

그러나 종전선언 없이 핵 협상은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북한은 왜 종전선언에 그렇게 집착하는가. 북한은 “전쟁은 끝났다”라고 선언하는 종전선언을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종식의 첫걸음으로 본다. 미국은 북한이 가시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해야 종전선언에 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를 문 대통령이 설득력 있게 설명했다. “종전선언을 먼저 하고 거기서부터 비핵화·평화협정의 협상을 시작하는 것이다. 종전선언을 해도 평화협정 체결 때까지는 현재의 정전체제는 유지된다. 따라서 유엔군사령부와 주한미군의 지위에는 추호의 변동도 있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은 비핵화 협상의 최종 단계에서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가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거기가 평창에서 시동을 건, 한반도의 불가역적 평화에의 길고 먼 여정의 종착역이다.

평양 정상회담에서 남북 간 군사적 긴장완화에는 역사의 한페이지가 넘어갔다. 남북한 국방장관은 ‘군사분야 합의서’에 서명했다. 합의서 1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남과 북은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군사적 긴장과 충돌의 근원이 되는 상대방에 대한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군사분야 합의서에 따라 남북은 군사분계선으로부터 5km 안에서 포병 사격훈련이나 연대급 이상 야외 기동훈련을 중지한다. 해상에서는 서해 남쪽 덕적도 이북으로부터 북측 초도 이남까지의 수역, 동해 남측 속초 이북으로부터 북측 통천 이남까지의 수역에서 포사격 및 해상 기동훈련을 중지하고 해안포와 함포의 포구·포신 덮개 설치 및 포문 폐쇄 조치를 취한다. 공중에서는 군사분계선 동·서부 지역 상공에 설정된 비행금지구역 내에서 고정익 항공기(전투기)의 공대지 유도무기사격 등 실탄 사격을 동반한 전술훈련을 금지한다. 평창에 떨어진 작은 평화의 씨앗 하나가 판문점·싱가포르·평양을 거쳐 곧 밝혀질 또 다른 역사의 무대에서 결실을 맺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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