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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산업의 탄생(4) 1970년대 민영화 막 올라] 신라호텔 전신은 청와대 영빈관

[호텔산업의 탄생(4) 1970년대 민영화 막 올라] 신라호텔 전신은 청와대 영빈관

선경개발, 워커힐호텔 27억원에 인수...1970년대 관광 붐 일자 재벌들 호텔산업 진출
신축 조선호텔(1973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1962년 6월 국내 관광의 선전, 관광객에 대한 편의 제공과 외국인 관광객 유치, 기타 관광사업발전에 필요한 사업을 경영하기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국제관광공사가 설립됐다. 국제관광공사는 1963년 개관 예정이었던 워커힐호텔의 운영권을 인수했으며, 정부가 운영하던 7개 국영 관광호텔을 비롯해 대한여행사·운수사업소·반도호텔·조선호텔을 잇따라 인수했다. 1960년대는 방한하는 외국인 관광객이 드물었던 시기다. 국내에서 일본 등 해외로 휴가를 떠나는 유엔군 장병은 연간 3만 명에 달했다. 이들을 국내에서 머물게 해 관광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대규모 휴양시설을 건립할 계획이 수립됐다.

서울 아차산 자락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 별장 부지를 중심으로 19만1520평의 부지에 동양 최대의 리조트 호텔을 건립하는 계획이 수립됐으며, 공사에는 민간 시공사뿐 아니라 육·해·공군과 해병대의 공병이 투입되기도 했다. 1962년 12월에 준공해 다음해인 1963년 4월 문을 열었는데, 외자 220만 달러를 포함, 6억4000만원이 소요됐다. 이 호텔은 객실 5개동과 빌라 13동, 전망대와 차고 등 26동의 건물로 이루어졌다. 워커힐이라는 호텔의 이름은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초대 미 8군 사령관 월튼 워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각 동의 명칭도 더글라스, 맥스웰, 매튜, 제임스 등 유엔군 장군의 이름을 따 붙여졌는데, 이는 이 호텔의 주요한 고객을 배려한 처사였다. 또 미 8군 PX분실, 미군은행출장소, 국제전화전신분실, 전보꽃집 등이 입주해 이용자들의 편의를 더했다.

워커힐호텔(1968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주한 유엔군 이용하던 ‘워커힐호텔’ 경영난으로 민영화
타워호텔 풀장(1975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워커힐호텔에는 최초로 도입된 시설이 많았다. 퍼시픽 나이트클럽에서는 국내 최초의 호텔공연이자 공연관광의 시초가 되는 허니비쇼(Honey Bee Show)가 시작됐다. 당시 퍼시픽 나이트클럽은 식사와 공연을 함께 볼 수 있는 공연장으로 최초의 전자오르간, 재즈 공연이 이곳에서 열렸다. 개관 기념 공연은 루이 암스트롱이 연주했는데, 매일 밤 2회씩 공연을 했다. 최근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신성일, 그리고 엄앵란이 1964년 11월 14일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워커힐호텔 광고(1970년경) / 사진: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국내 최초의 볼링장이 4레인을 갖추고 문을 열었는데, 당시 한국의 소피아 로렌이라 불리던 배우 김혜정이 이곳에서 볼링을 즐기기도 했다. 실내 수영장은 길이 23m 폭 7m, 연중 수온 24도를 유지하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었다. 1963년 2월 1일부터 우수한 수영선수들에게 수영장을 개방해 훈련을 할 수 있게 했는데, 이 때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동계에 수영훈련을 할 수 있게 됐다. 박태환 선수를 발굴한 김봉조 감독도 선수 시절 이곳에서 동계훈련을 했고, 4개월 뒤에 진행된 시합에서 본인이 수립한 자유형 400m 한국 신기록을 12초 단축하기도 했다.

워커힐 쇼(1965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하지만 워커힐 호텔은 당초 기대와 달리 영업실적이 좋지 않았다. 해마다 이용객 숫자가 줄어들었으며, 매년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지리적인 입지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가용의 보급률이 낮았던 당시에는 이곳까지 가기 위해 별도의 관광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이용해야만 했다. 또 도심에 새로운 호텔이 들어서거나 재단장하면서 국제회의 등 각종 행사 유치가 어려워지기도 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68년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카지노가 문을 열었다. 당초 외국인 전용이었던 카지노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 경영에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내국인 출입과 억대 도박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기도 했다. 적자는 계속됐으며 연평균 객실 이용률도 계속 감소해 1970년에는 44.4%에 머물렀다. 1972년에서야 처음으로 1억7000만원의 흑자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국영 업체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1973년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의 계열사 선경개발(지금의 워커힐)에 27억4200만원에 매각됐다.

타워호텔 개관(1969년).
1964년 12월 남산 자락에 아시아반공연맹 자유센터가 문을 열었다. 센터는 1966년 제12차 아주반공연맹 대회를 위한 시설로 건설됐는데 5층의 본관과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17층의 자유회관으로 이루어졌다. 17층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에 파병한 16개 국가와 한국을 포함한 숫자를 의미했으며, 외국에서 찾아올 학생들과 교수들의 숙소로 이용될 예정이었다. 1966년 8월 국제관광공사가 한국반공연맹으로부터 미완성인 자유회관을 인수했으며, 1년 간 개축을 통해 1967년 7월 1일부터 타워호텔로 영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영업을 시작한 지 두 달이 지난 8월 31일 갑자기 호텔을 민간에 매각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두 차례의 유찰 끝에 1968년 11월 공성산업 남상옥 대표에게 7억3700만원에 낙찰됐다. 이런 매각으로 당시 많은 논란이 발생했다. 10억원 이상의 가치가 있는 호텔을, 흑자를 올리고 있음에도 서둘러 헐값에 매각했기 때문이다.
 이익 내던 자유회관 헐값에 매각 의혹
영빈관에 도착한 독일 뤼프케 대통령(1967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1967년 3월 2일 한국을 방문한 서독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의 안내로 영빈관 서쪽 2층 큰 방에서 한국에서의 첫 밤을 보냈다. 뤼프케 대통령은 1967년 2월 28일 개관한 영빈관의 첫 번째 손님이었다. 영빈관은 1958년 장충단공원으로 부지를 선정하고 공사를 시작했는데, 4.19혁명이 발생해 건설이 중단됐다가 1964년이 되어서야 공사가 재개돼 개관에 이르렀다. 창덕궁 희정당의 모습을 본떠 만든 이곳은 전통적인 외양과 달리 내부는 서양식으로 치장했다. 정원에는 2개의 팔각정과 관상목 5000주, 분수대가 있었으며, 청사초롱 50여 개가 밤을 밝혔다. 영빈관은 국빈의 숙소로 사용하거나 차관급 이상이 주최하는 공식 파티의 장소로만 활용했다. 전통적인 외관은 우리나라의 문화를 대외에 보여주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운영은 녹록하지 못해 문을 연 첫해에 적자가 1000만원에 달했다. 이후 1970년 조선호텔의 신축은 영빈관의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970년 8월 방한한 애그뉴 미국 부통령이 조선호텔의 프레지덴셜 스위트에 머무는 등 국빈을 모시기 위해 민간호텔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영빈관은 1973년 6월 공개입찰을 통해 7월 삼성그룹의 임페리얼(지금의 호텔신라)에 28억4420만원에 넘어갔다. 새로운 호텔 건설에 앞서 8월 3일부터 일반에게 공개돼 그릴, 칵테일 라운지, 연회장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1978년 12월 청와대 내에 루이 14세의 건축양식과 전통양식을 절충한 영빈관이 새로 건립돼 국빈의 숙소와 만찬장소 역할을 계속하게 됐다.
 청와대 안에 영빈관 새로 지어
영빈관 내부(1967년) / 사진:국가기록원 소장
1967년 7월 6일 저녁 조선호텔은 주요 고객 200여 명을 초청해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는 미리 뜯어놓은 타일을 기념선물로 나누어주며 곧 사라질 풍경에 대한 아쉬움을 나누었다. 직원들은 뒤뜰 팔각당, 현관 그리고 400년이 넘은 시호나무 밑에 제단을 차려놓고 고별고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조선호텔은 영업을 마감하고 철거를 시작했다. 호텔의 비품들은 골동품 애호가와 주부들에게 인기리에 팔려나갔다. 조선호텔의 철거와 신축은 노후화와 수익성 악화가 이유였지만, 국제대회 등 대규모 회의를 개최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호텔 건립이 필요했던 이유도 있었다.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AA)과 국제관광공사가 공동으로 1100만 달러의 공사비를 투자했으며 29개월 간의 공사를 거쳐 지하 2층, 지상 19층에 504개의 객실을 갖추고 1970년 3월 17일 다시 개관했다. 1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리퍼블릭 볼룸에는 6개 국어를 동시통역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며, 옥외 수영장과 나이트클럽 등이 있었다. 조선호텔은 1971년 순이익 2억원을, 이듬해에는 4억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이는 도심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호텔의 지리적 이점과도 관련이 있지만, 1971년부터 증가하기 시작한 관광산업의 수요에 기인한다. 1972년 세계 관광인구 증가율은 9%에 머물렀지만, 우리나라의 증가율은 53.8%를 달성했고, 관광수입 증가율은 133.7%에 이르는 등 무역 외 수입 중 관광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1년 6.4%에서 1972년 12.3%로 크게 증가했다. 이와 같은 관광 붐은 국내 재벌들의 호텔경영 진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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