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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무서운 여자들

할리우드의 무서운 여자들

넷플릭스의 ‘버드 박스’가 큰 성공 거두면서 여성이 감독과 주인공 맡은 스릴러·액션 영화에 관심 높아져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는 여성 감독 수사네 비르가 메가폰을 잡고 샌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은 ‘버드 박스’를 출시했다. / 사진:SAEED ADYANI/NETFLIX
여성 감독이 찍은 최초의 누아르 영화는 1953년 개봉된 ‘히치 하이커’였다. 이 영화를 만든 아이다 루피노는 당시 할리우드 배우로서 메가폰까지 잡은 유일한 여성 감독으로 ‘누아르의 퀸’이었다. 그로부터 25년 뒤 리나 베르트뮬러 감독의 스릴러 예술영화 ‘불의 여인’이 나왔다. 남편을 잃은 여인(‘육체파’로 불리던 이탈리아 출신의 소피아 로렌이 전혀 글래머러스하지 않은 모습으로 연기했다)을 고통과 분노에 떨면서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무기력한 이미지가 아니라 사나운 복수의 화신으로 변신시킨 최초의 누아르 작품이었다.

할리우드에 여성 감독이 드물긴 하지만 스릴러를 찍는 여성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려웠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이 1991년 ‘폭풍 속으로’라는 컬트 클래식으로 그 문을 더 넓혔고, 2000년 개봉된 메리 해런 감독의 ‘아메리칸 사이코’가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이 두 영화에서 주인공은 남자였다. 베르트뮬러 감독처럼 여성을 누아르의 주인공으로 과감히 내세우는 영화가 다시 나오기까지는 한참 걸렸다. 대표적인 작품이 2003년 제인 캠피온 감독의 ‘인 더 컷’, 2010년 데브라 그래닉 감독의 ‘윈터스 본’, 2013년 클레어 드니 감독의 ‘돌이킬 수 없는’이다.

지난해 12월 넷플릭스는 덴마크 출신 감독 수사네비르가 연출하고 샌드라 블록이 주연을 맡은 스릴러 ‘버드 박스’를 선보였다. 이 영화는 출시되자마자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기록을 세웠다(첫 일주일 동안 가장 많이 스트리밍된 영화였다). 또 넷플릭스는 지난 1월 18일 ‘클로즈’를 출시했다. 영국 출신 비키 주슨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누미 라파스가 주연한 스릴러다. 라파스는 억만장자의 딸(‘책도둑’의 소피 넬리스가 연기했다)을 보호하는 경호원 샘 칼슨으로 나온다.

넷플릭스는 이 두 작품에서 다양한 감독과 배우를 동원하겠다는 약속을 지켰을 뿐 아니라 여성만이 이 장르에 표현할 수 있는 독특한 면을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고정관념에서 탈피해 스릴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복수심에 불타는 폭력적인 여성이나 성욕 과잉 여성 사이코패스 또는 부당하게 학대당하는 아내나 여자친구 등을 뛰어넘는 독특하고 미묘한 여성 캐릭터를 그려낼 수 있다는 점이다.

아카데미상·골든글로브상·에미상을 휩쓴 유일한 여성 감독인 비르는 존 르 카레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더 나이트 매니저’(영국의 BBC 원과 미국의 AMC 채널에서 방영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에서 긴장과 흥분을 고조시키는 뛰어난 기술을 보여줬다. 그러나 ‘버드 박스’에선 그보다는 여성이 갈망하는 ‘그 무엇’을 만들어냈다. 그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히어로’를 말한다. 블록이 연기한 말로리는 반사회적이고 맹렬한 어머니로 베일에 가린 악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비르 감독은 “그녀는 남성이 정의하는 ‘부드럽고 침착하며 이상적인’ 어머니 상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블록이 이 영화에 매력을 느끼고 내가 애착을 갖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버드 박스’와 ‘클로즈’에 나오는 여성 주인공은 ‘영화에서 여성은 장식용’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하며 도발적으로 그려진다. 라파스와 블록은 각각의 영화에서 대체로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투박한 옷을 입으며 거칠고 지쳐 보인다. 그들은 결점이 드러나는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며 까다로운 성적 취향을 나타낸다. 비르는 여성 감독이 늘어나면서 그런 캐릭터를 더 많이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주슨 감독은 대본작가이자 남편인 루퍼트 위태커와 함께 ‘클로즈’의 캐스팅과 대본 작업을 했다. 그녀는 그동안 여성이 주인공을 맡은 액션 영화를 보며 거듭 실망했다고 돌이켰다. “그냥 만들어진 역할에 여성을 끼워넣는 식이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서 ‘클로즈’에선 ‘아토믹 블론드’(샤를리즈 테론이 주연한 냉전시대 스파이스릴러) 류의 진부한 액션 여주인공 캐릭터를 거부했다. “가죽옷과 타이츠 차림에 15㎝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성은 터무니없다.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여성성을 드러내고 싶진 않았다. 그런 영화를 보고 자라면서 좌절했다.”주슨 감독은 어려서 액션 영화를 좋아해 친구들과 함께 취미로 007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난 역할 모델을 찾고 싶었고 영화 감독이 되길 원했다”고 그녀는 돌이켰다. “하지만 내가 본 모든 영화는 남자들의 이야기였다.” 마땅한 역할 모델을 찾지 못한 그녀는 결국 자신을 윌리엄이라고 불렀다. “부모님이 무척 당황스러워 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위 왼쪽부터 시곗바늘 방향으로) ‘클로즈’의 누미 라파스(왼쪽)와 소피 넬리스, 넬리스의 연기를 지도하는 주슨 감독, ‘버드 박스’ 촬영장의 비르 감독. / 사진:GARETH GATRELL/NETFLIX(2); MERRICK MORTON/NETFLIX
그러다가 뤽 베송 감독의 1990년 영화 ‘니키타’를 보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프랑스 출신 배우 안 파리요가 연기한 니키타는 “제임스 본드 영화에서 결코 접할 수 없는 감성 수준을 보여줬다”고 주슨 감독은 말했다. “난 감성적인 영화 제작자다. 그 영화를 보면서 ‘바로 저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2008년 22세의 나이에 ‘레이디 고다이바’를 만들었다. 그녀가 처음으로 대본을 쓰고 예산을 확보하고 감독까지 맡은 영화였다.

주슨 감독은 1990년대 작품인 리들리 스콧 감독의 ‘델마와 루이스’, 토니 스콧 감독의 ‘트루 로맨스’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패트리샤 아퀘트(‘트루 로맨스’의 여주인공을 맡았다)가 화장실에서 제임스 갠돌피니와 싸워 이기는 것이 가장 놀라운 액션 장면이었다. 여성의 힘을 열정적으로 보여주는 그런 모습이 기억에 남아 ‘클로즈’에도 도입했다.”

주슨 감독은 스턴트 코디네이터로 줄리언 스펜서를 고용했다. 스펜서는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잔혹한 터키탕 격투 장면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우리가 만났을 때 스펜서는 내게 ‘어떤 액션을 원하느냐?’며 ‘잘 연출된 격투 장면인가 잔혹하고 현실감 나는 액션인가?’라고 물었다”고 주슨 감독은 돌이켰다. “ 난 ‘잔혹하고 실감나는 액션’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스펜서는 ‘좋다. 그러면 같이 일하겠다’고 말했다. 마치 나를 테스트하는 것 같았다.”

라파스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에서 무자비한 리스베트 살란데르 역을 맡아 국제적인 스타가 됐다. 그녀는 ‘클로즈’에서 정서적·신체적으로 피폐한 상태를 보여준다. 주슨 감독은 “일반적으로 액션 영화라고 해도 얼굴을 가격당한 여성이 피를 흘리는 장면을 잘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클로즈’에선 캐릭터의 정서적 여정이 그런 원초적이고 노골적인 장면을 뒷받침한다. 캐릭터가 액션을 이끈다. 그 반대가 아니다.”라파스가 연기한 샘 칼슨이라는 경호원 캐릭터는 유명 여성 보디가드 재키 데이비스를 모델로 했다. 데이비스는 이 영화 제작에서 자문을 맡았다. 그녀와 주슨 감독은 보디가드라는 위험한 직업을 심적으로 견뎌내는 문제에 관해 오랫동안 대화를 나눴다. “데이비스가 보디가드로 활동하면서 겪은 섬뜩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면 난 그녀에게 어떻게 견뎌냈는지 물었다. 어떤 느낌이 들었고 어떻게 이겨낼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그처럼 극단적인 일을 겪는다면 우리 삶이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난 그런 점에 흥미를 느꼈다.”

물론 여성이 구타의 피해자가 되든 가해자가 되든 비호감으로 행동하는 것은 관객의 반발을 부를 수 있다. 영화에서 여성을 상대로 하는 폭력은 흔히 ‘쓸데없는 장면’으로 인식된다.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는 특히 그렇게 비친다. 비르 감독은 ‘더 나이트 매니저’에서 여성이 고문당하는 장면으로 비난을 샀다. 블록도 ‘버드 박스’에서 지나치게 억세고 무모한 어머니라고 비판 받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한 세기 이상 남성 일색이었던 감독과 대본작가, 프로듀서들이 영화에서 여성의 행동을 규정해 왔기 때문이다. 그처럼 ‘세뇌’의 위력은 대단하다. 따라서 여성을 억센 히어로 캐릭터로 보여주는 것은 할리우드의 마지막 남은 금기라고 할 수 있다.

‘버드 박스’의 대본은 영화로 만들어지기 수년 전 완성됐다. 그동안 대본이 잠자고 있었던 것은 할리우드가 주인공 캐릭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에일리언’ ‘터미네이터’ ‘와호장룡’ ‘킬빌’ 등 여성 액션 히어로가 등장한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음에도 주슨 감독은 ‘클로즈’ 제작을 위한 투자 설명회에서 “여성이 주인공인 누아르 영화는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고 돌이켰다. “감독으로서 나는 더 큰 어려움을 겪었다.”

‘클로즈’가 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영국 웨스트엔드 필름스의 자회사인 위러브와 넷플릭스, 그리고 주인공 역할을 수락한 라파스 덕분이었다. 이 영화에 대한 공식적인 반응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버드 박스’를 보면 낙관적이다. 비평가들이 ‘버드 박스’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났기 때문이다. 여성이 감독과 주연을 맡은 액션 영화로선 좋은 소식이다. 비르 감독은 연예매체 할리우드 리포터와 가진 인터뷰에서 “전통적인 성공 기준은 흥행 수입이나 영화상 수상 중 하나지만 ‘버드 박스’는 그 모든 것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머지않아 007 영화도 여성이 주도할지 모른다. 비르 감독이 007 영화의 25번째 작품에서 감독 후보 명단에 들었다고 소문난 적이 있다. 하지만 내년에 개봉될 그 작품은 캐리 후쿠나가 감독에게 돌아갔다(시리즈 최초로 미국인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그렇다면 26번째 작품은 비르 감독이 맡을 수도 있지 않을까? 007도 그럴 때가 됐다.

- 메리 케이 실링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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