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현의 IT 사회학] 자율주행차라면 스쿨존에서 어땠을까?
[김국현의 IT 사회학] 자율주행차라면 스쿨존에서 어땠을까?
미래의 자율운전은 알고리즘 궤도를 도로에 깔 수도 있어 운전자의 93%는 자신이 운전을 잘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보고가 있다. 그러나 ‘우수성 편향’이라는 이 착각을 1톤이 넘는 쇳덩어리를 발끝과 핸들로 움직이는 효능감과 결합하니 위험해 보인다. 운전대만 잡으면 사람이 달라진다는 이야기처럼 인격을 만들기도 하고, 문화가 되기도 한다. 한국의 교통문화에서 적어도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보행자보다 우선시된 것만은 확실하다. 교차로에 횡단보도 대신 육교와 지하보도가 있는 풍경을 불편해하지 않았고, 차와 사람의 대치국면에서 차가 우선 멈추는 대신 응당 사람이 피해야만 한다는 상식에도 별로 거북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은 유서 깊은 교통후진국이 되어버렸다. 감소추세라고는 하나 2017년 통계 기준 14세 이하 어린이 인구 10만 명 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세계 3위로, OECD 회원국 평균 대비 약 2.3배 많았다. 65세 인구에서는 4.5배가 많아 압도적 1위였다. 후진국형 교통사고라는 보행사고 비율은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40%. 한국은 여전히 차를 모는 이들이 걷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위협하고 있는 나라다.
“보이지도 않는 데서 갑자기 튀어나오니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줄줄이 주차된 차 사이에서 어린이가 뛰어나온다. 모퉁이에서 갑자기 어린이가 달려 나온다. 그런데 어린이는 원래 그렇다. 천방지축 허둥지둥. 우리 모두 그랬다. 그저 그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모든 사고는 불행한 일이다. 타임머신으로 시간을 되돌려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교통사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사자가 운전대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그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다른 운전자의 다른 차는 그 사고를 피했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뜻하지 않게 가해자가 되었다면 그 운전석에 앉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운전대를 잡는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아무리 실수라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유 의지의 결과로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했다면, 그것도 아직 피어나지 못한 어린이였다면 그 업보의 무게는 평생을 짓누를 것이다.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삶도 더는 어제까지의 삶이 아니다. 법이 개정될 때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상상하지 않은 채 과실상계를 계산하고 합의금을 걱정하고 징역을 걱정하곤 한다.
운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는 일이다. 베테랑 모범운전사들은 운전에서는 예측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미리 상상하는 일이다. 아니면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이 운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운전도 도(道)나 선(禪)인가.
2년 전 네이처에 게재된 스탠포드 연구팀의 논문은 사각에 가린 대상물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자율주행차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라이다(Lidar) 센서는 레이저를 쏘고 그 빛이 반사되어 튕겨져 돌아오는 것을 계산해 대상을 인지하고 측정한다. 라이다는 볼보가 2022년부터 양산차에 장착한다고 선언했고, 그 부품 자체는 최신형 아이패드나 아이폰에 탑재될 예정일 정도로 대규모 상용화가 진행 중인 흔해진 기술이다.
스탠포드 연구진들은 이 라이다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는 일에까지 확장했다. 모퉁이에서 굴러오는 공을 따라 뛰어오는 어린이. 인간은 코너에 가려 보지 못하지만, 광자들의 움직임은 다르다. 라이다가 쏜 레이저로 이리저리 튕겨져 나온 광자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코너 뒤에 무엇이 있음을, 그리고 또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같은 코너라도 그 귀퉁이 뒤에 사물이 있고 없고 따라 코너 뒤에까지 넘어간 빛의 산란과 반사는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이 언제 현실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기술은 인간의 한계가 위험을 가져온다면 그 한계를 언제든 뛰어넘고 싶어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예측이자 상상이다. 노련한 운전자라면 시야를 가리고 있는 차폐물 너머에 어린이가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한다. 마치 수풀 속에 맹수가 있음을 가정하는 영양과도 같이 오감을 경계 태세로 세운 채 조심조심 지나갈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존재하는 생명체를 감각으로 감지하는 일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을 터, 마치 태고의 본능처럼 우리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다.
기술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첨단 라이다 센서의 자율주행차라면 어떻게 운전할까 흉내 내듯 운전해 보는 것도 좋다. 마치 센서로 스캔하듯 전방의 시야를 좌우로 훑으며 눈에 보이는 가시광 이외에도 곧 반사되어 돌아올 또 다른 광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제만 둬도 그 상상을 하기 위해 충분히 느린 속도로 주행해야만 할 것이다.
미래의 자율주행차에게는 과거의 빅데이터를 통해 도로 특유의 사고 가능성이 차량에 전달될 것이다. 초행길이라도 돌발적 보행자들의 출현 방향과 예상 궤적마저 미리 알려줄 수도 있다. 도심 지자체 중에는 횡단보도에 LED를 박고 있는 곳들이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각종 입출력 센서를 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은 앞으로 두드러진 시청각적 경고를 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아직 이런 시스템은 우리에게는 없지만 대신 스쿨존이라는 제도는 있다. 자율주행차였다면 어찌했을까 상상한다면, 여기서는 적어도 브레이크에 발을 얹어 놓고 다닐 것이다. 예전에는 택시운전사나 버스운전사의 창 옆에 두 손 모아 기도하는 ‘오늘도 무사히’ 그림이 붙어 있곤 했다. 사고는 나만 잘한다고 안 나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는 일. 실제로 교통사고 대국이라는 불명예 속 고도성장기의 경찰서에서는 이 그림을 붙이라고 직접 나눠줬다는데, 인생을 뒤바꿀 비극에 휘말리지 않기를 기도하듯 조심하는 일, 지금도 유효한 삶의 자세다.
미래의 운전은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이들의 취미, 또는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생계라는 양극화 활동이 될 수 있다. 지금도 운전을 외주할 수 있는 이들은 형사처벌의 두려움도 함께 위탁한다.
시스템과 엄격한 절차에 의해 궤도 위에서 운행되는 철도에 개인의 우수성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없듯 미래의 자율운전은 알고리즘의 궤도를 도로에 깔지 모른다. 운전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에 누구도 운전자가 되려 하지 않고 심지어 규제되는 그날, 사고 책임은 철도공사처럼 신설 자율차공사가 맡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잇따른 교통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누가 사장직에서 물러난다는 뉴스가 흐를 수도 있다.
공상과학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빨래가 정말 싫어져야 세탁기가 팔리고 설거지가 꺼려질 때 식기세척기 시장이 형성된다. 모두 운전을 기피한다면 자율주행은 현실이 된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어엿한 수요. 수요는 기술개발을 서두르게 하고, 두려움은 그 수요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상상하려 않을 때, 규제는 두려움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 필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겸 IT평론가다. IBM,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IT 자문 기업 에디토이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정치·경제·사회가 당면한 변화를 주로 해설한다. 저서로 [IT레볼루션] [오프라인의 귀환] [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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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국은 유서 깊은 교통후진국이 되어버렸다. 감소추세라고는 하나 2017년 통계 기준 14세 이하 어린이 인구 10만 명 당 보행 중 사망자 수는 세계 3위로, OECD 회원국 평균 대비 약 2.3배 많았다. 65세 인구에서는 4.5배가 많아 압도적 1위였다. 후진국형 교통사고라는 보행사고 비율은 OECD 평균의 2배가 넘는 40%. 한국은 여전히 차를 모는 이들이 걷고 있는 사회적 약자를 위협하고 있는 나라다.
“보이지도 않는 데서 갑자기 튀어나오니 어떻게 하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줄줄이 주차된 차 사이에서 어린이가 뛰어나온다. 모퉁이에서 갑자기 어린이가 달려 나온다. 그런데 어린이는 원래 그렇다. 천방지축 허둥지둥. 우리 모두 그랬다. 그저 그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을 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이처럼 운전대를 잡는 자유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아무리 실수라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그 자유 의지의 결과로 누군가가 크게 다치거나 심지어 사망했다면, 그것도 아직 피어나지 못한 어린이였다면 그 업보의 무게는 평생을 짓누를 것이다.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의 삶도 더는 어제까지의 삶이 아니다. 법이 개정될 때 사람들은 그 두려움을 상상하지 않은 채 과실상계를 계산하고 합의금을 걱정하고 징역을 걱정하곤 한다.
운전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는 일이다. 베테랑 모범운전사들은 운전에서는 예측이 중요하다고들 말한다.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만 벌어질 수 있는 일을 미리 상상하는 일이다. 아니면 정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봐야 하는 것이 운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운전도 도(道)나 선(禪)인가.
2년 전 네이처에 게재된 스탠포드 연구팀의 논문은 사각에 가린 대상물도 인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미 자율주행차에서 많이 쓰이고 있는 라이다(Lidar) 센서는 레이저를 쏘고 그 빛이 반사되어 튕겨져 돌아오는 것을 계산해 대상을 인지하고 측정한다. 라이다는 볼보가 2022년부터 양산차에 장착한다고 선언했고, 그 부품 자체는 최신형 아이패드나 아이폰에 탑재될 예정일 정도로 대규모 상용화가 진행 중인 흔해진 기술이다.
스탠포드 연구진들은 이 라이다를 보이지 않는 대상을 보는 일에까지 확장했다. 모퉁이에서 굴러오는 공을 따라 뛰어오는 어린이. 인간은 코너에 가려 보지 못하지만, 광자들의 움직임은 다르다. 라이다가 쏜 레이저로 이리저리 튕겨져 나온 광자들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코너 뒤에 무엇이 있음을, 그리고 또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한다. 같은 코너라도 그 귀퉁이 뒤에 사물이 있고 없고 따라 코너 뒤에까지 넘어간 빛의 산란과 반사는 달라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이 언제 현실이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기술은 인간의 한계가 위험을 가져온다면 그 한계를 언제든 뛰어넘고 싶어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일은 우리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바로 예측이자 상상이다. 노련한 운전자라면 시야를 가리고 있는 차폐물 너머에 어린이가 있을 수 있음을 상상한다. 마치 수풀 속에 맹수가 있음을 가정하는 영양과도 같이 오감을 경계 태세로 세운 채 조심조심 지나갈 것이다. 눈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도 존재하는 생명체를 감각으로 감지하는 일은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을 터, 마치 태고의 본능처럼 우리에게 주어졌을 수도 있다.
기술이 현실이 되기 전까지는 첨단 라이다 센서의 자율주행차라면 어떻게 운전할까 흉내 내듯 운전해 보는 것도 좋다. 마치 센서로 스캔하듯 전방의 시야를 좌우로 훑으며 눈에 보이는 가시광 이외에도 곧 반사되어 돌아올 또 다른 광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전제만 둬도 그 상상을 하기 위해 충분히 느린 속도로 주행해야만 할 것이다.
미래의 자율주행차에게는 과거의 빅데이터를 통해 도로 특유의 사고 가능성이 차량에 전달될 것이다. 초행길이라도 돌발적 보행자들의 출현 방향과 예상 궤적마저 미리 알려줄 수도 있다. 도심 지자체 중에는 횡단보도에 LED를 박고 있는 곳들이 있다. 머지않은 미래에는 각종 입출력 센서를 박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기술은 앞으로 두드러진 시청각적 경고를 보낼 수도 있을지 모른다. 아직 이런 시스템은 우리에게는 없지만 대신 스쿨존이라는 제도는 있다. 자율주행차였다면 어찌했을까 상상한다면, 여기서는 적어도 브레이크에 발을 얹어 놓고 다닐 것이다.
사고책임 두려움이 신기술 앞당기기도
미래의 운전은 리스크를 감내할 수 있는 이들의 취미, 또는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생계라는 양극화 활동이 될 수 있다. 지금도 운전을 외주할 수 있는 이들은 형사처벌의 두려움도 함께 위탁한다.
시스템과 엄격한 절차에 의해 궤도 위에서 운행되는 철도에 개인의 우수성 편향이 개입될 여지가 없듯 미래의 자율운전은 알고리즘의 궤도를 도로에 깔지 모른다. 운전의 리스크가 너무 크기에 누구도 운전자가 되려 하지 않고 심지어 규제되는 그날, 사고 책임은 철도공사처럼 신설 자율차공사가 맡게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어느 날 잇따른 교통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누가 사장직에서 물러난다는 뉴스가 흐를 수도 있다.
공상과학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빨래가 정말 싫어져야 세탁기가 팔리고 설거지가 꺼려질 때 식기세척기 시장이 형성된다. 모두 운전을 기피한다면 자율주행은 현실이 된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어엿한 수요. 수요는 기술개발을 서두르게 하고, 두려움은 그 수요를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상상하려 않을 때, 규제는 두려움을 가르쳐주기도 한다.
※ 필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겸 IT평론가다. IBM,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IT 자문 기업 에디토이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정치·경제·사회가 당면한 변화를 주로 해설한다. 저서로 [IT레볼루션] [오프라인의 귀환] [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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