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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전자파와 무관한 전자파 과민증’

[장근영의 팝콘 심리학] ‘전자파와 무관한 전자파 과민증’

잘못된 현실인식으로 불안·고통에 빠져… 개인·사회 막대한 비용 지불
전국의사 2차 총파업 첫날인 8월 26일 경기 수원시 아주대학교 병원에서 전공의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미국 드라마 ‘베터 콜 사울’은 골든 글로브를 포함한 각종 상을 받았고 종영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인터넷 무비데이터베이스(IMDB)에서 최고평점을 유지하고 있는 걸작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스핀오프(외전)에 해당한다. 올바른 방식보다는 ‘현란한 방식’을 택하는 변칙 변호사 지미 맥길(밥 오덴커크)의 우여곡절을 그려내며 5번째 시즌을 맞이한 이 블랙 코미디 드라마는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독특한 인물들을 소개한다.

그 중 하나가 주인공의 형이자 이 드라마 속에서 가장 똑똑하고 뛰어난 변호사 중 한명인 챨스 ‘척’ 맥길(마이클 맥키언)이다. 흥미로운 건 그가 전자파 과민증(EHS: Electro magnetic hypersensitivity)을 겪고 있다는 설정이다.

전자파 과민증은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증상이다. 꽤 많은 이들이 염려하거나 실제로 경험하기도 한다. 사람에 따라 두통이나 근육통, 피부자극이나 불면증, 스트레스까지 증상도 다양하다. 당사자들은 이런 증상이 모두 전자파 때문에 생긴다고 호소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물론 전자파가 인체에 무해하다는 뜻은 아니다. 전자파가 세포에 좋든 나쁘든 뭔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WHO 산하의 IARC에서는 전자파를 ‘잠재적인’ 발암물질인 2B 등급으로 보고 있으며, 각국에서 ‘안전한 수준의 전자파’에 대한 규정을 정하고 관리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통용되는 모든 전자기기는 이 규정을 준수한다.)
 뇌에 존재하는 ‘노시보 효과(너를 해하리라)’
하지만 전자파 과민증은 전자파와 무관하다. 전자파 과민증은 매우 주관적이다. 예를 들어, 전자파 과민증 증상은 당사자가 전자파에 노출된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즉시 발현되지만, 실제로 전자파에 노출되어 있더라도 당사자가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타나지 않는다. 문제는 생활 속의 전자파는 우리가 인식할 수 없는 수준의 에너지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자신이 전자파과민증을 겪는다고 호소하는 사람들 수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수십 여건의 연구결과들은 모두 그들 역시 전자파를 느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전자파는 우리 주변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다. 단지 휴대폰이나 전자레인지뿐 아니라 전기가 통하는 곳에는 언제나 전자파가 발생한다. 대부분의 가정은 전자파 방출원으로 가득 차 있다. 집 밖으로 나서도 마찬가지다. 승용차나 버스의 내비게이션 장비나 라디오, 엔진을 작동시키는 점화플러그와 모터, 발전기는 모두 전자파 방출원이다. 지하철은 강력한 전자파 발생원인 거대한 모터로 작동되며 그 전원은 선로에 깔린 고압전선을 통해 전달된다. 그뿐인가. 마트는 형광등과 냉장고로 가득 차 있으며, 테이블에 전열기기를 장비한 식당도 많다. 누군가가 정말로 전자파에 과민하다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실제 전자파 과민증 호소 환자들은 ‘선택적’으로 증상을 느낀다. 멀리 보이는 휴대전화 중계기의 전자파는 강력하게 느끼지만 가까이에서 더 강한 전자파를 방출하는 컴퓨터나 휴대폰을 사용하는 데는 별 지장을 느끼지 못하는 식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정말로 심각한 경우에는 자기 방을 모두 알미늄 피복으로 감싸고 모든 전기 장비 사용을 포기한 채 칩거하거나, 아예 전자파가 닿지 않을 오지로 이주하기도 한다. 이 드라마 속 척 맥길이 그렇다. 그는 완전히 전원으로부터 차단하고, 태양빛을 막기 위해 두꺼운 커튼을 친 자신의 집에 칩거한다. 어둠은 등유 램프로 밝히고, 음식물은 얼음을 채운 아이스박스에 보관하면서.

전자파 과민증의 원인이 전자파가 아니라면 진짜 원인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은 전자파 과민증을 노시보(Nocebo) 효과의 전형적인 예라고 본다. 노시보 효과는 플라시보(Placebo) 효과의 정 반대현상이다. 플라시보 효과는 명백히 존재하는 현상이다.

‘노시보 효과’ 역시 고대 라틴어에서 나왔다. 원래 뜻은 ‘너를 해하리라(I will harm)’이다. 즉, 어떤 물질이나 처치가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믿으면 실제로 그런 나쁜 효과가 발휘되는 것이다. 플라시보 효과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 듯, 노시보 효과 역시 꾀병이나 허위 증상이 아니라 진짜 증상이다. 결국 이 모든 증상의 배후에는 우리의 뇌가 있다. 뇌는 예를 들어 겉으로 보이는 현상 속에서 뒤에 숨겨진 원인과 결과를 파악하고 다양한 물건이나 사건들 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능력이 가끔은 우리를 엉뚱하게도 비현실적 세상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연결로 인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다. 전자파 과민증 때문에 평범한 일상 생활을 포기해야 했던 척 맥길 같은 경우만이 아니다. 전자파 과민증을 실제 전자파 때문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이동통신 중계기를 자기네 주거지에서 몰아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현대 사회에서 무선정보통신은 거의 생필품과 같다. 통신 중계기가 없으면 통신연결이 안되고, 정말 필요한 상황에서 먹통인 전화기를 마주해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통신 중계기를 철거한 지역에서 안전사고나 심장마비 같은 긴급 사태에 전화 불통으로 제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해 심각한 결과를 맞이한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현실서 잘못된 연결이 어디 이뿐이랴
그 뿐이 아니다. 전자파 과민증에 대한 오해가 오히려 더 많은 전자파 노출을 유발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통신기기의 작동 방식은 대개 통신전파가 약하면 기기 자체에서 더 강한 전파를 발생하도록 되어 있다. 엘리베이터 같이 외부의 통신전파가 잘 통하지 않는 장소에서 휴대전화기의 전자파가 더 강력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전자파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겠다고 휴대전화에 소위 전자파 차단 스티커를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스티커들은 대부분 소비자들로 하여금 헛돈 쓰게 만드는 가짜 제품들이다. 하지만 만약 실제로 전자파를 차단해주는 제품이라면? 휴대전화의 통신감도는 낮아질 것이고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그의 휴대전화는 더 강한 전자파를 발산할 것이다.

전자파 과민증은 일부 불행한 사람들의 문제다. 하지만 잘못된 현실 인식으로 인해 불안이나 고통에 빠지고 불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상황이 단지 그 뿐일까? 드라마 속에서 척은 결국 자신의 증상이 전자파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리고 정신과의사의 도움을 청하며 이렇게 말한다. “지금까지는 내게 이 증상은 명백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만약 모든 것이 단지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지금까지 나는 무슨 짓을 해왔던 것인가?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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