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태의 호적수(9) 정도전과 이방원] 조선 건국 최고 공로자 정도전과 이방원의 비극적 인연
[김준태의 호적수(9) 정도전과 이방원] 조선 건국 최고 공로자 정도전과 이방원의 비극적 인연
뜻 함께한 동지도 대업(大業) 후 파열음 많아… 鄭 아성 틈새 노려 승리 거둔 李 생사를 함께 한 동지라도 대업을 이루고 난 뒤에는 파열음이 나게 마련이다. 조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든가 구체적인 방법론에 대해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다투기도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소위 ‘개국공신’, ‘혁명동지’ 간에 내분이 없었던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제외한다면, 조선 건국의 최고 공로자는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다.
정도전이 새 왕조를 설계하고 이성계를 제왕의 길로 이끌어주었다면, 이방원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호한 결단으로 이성계 세력을 지켜냈다. 고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체포하여 유배 보내고, 정도전과 조준 등 핵심인사를 처형하려고 했다. 정몽주의 파상공세에 이성계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때 그 흐름을 끊어낸 것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버팀목을 제거해버렸다. 정도전뿐 아니라 이방원이 없었어도 역사는 필시 다른 길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된 후, 두 사람은 정적으로 돌아섰다. 왕위계승 문제 때문이다. 전통사회에서 보위는 적장자 승계가 원칙이다. 이성계의 후계자도 맏아들인 방우가 우선순위에 있었지만, 방우는 새 왕조 창업에 반대하여 은둔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다음 서열인 둘째 아들 방과, 아니면 건국에 큰 공을 세운 방원을 세자로 삼는 것이 통례다.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은 예상 밖이었다.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아마도 방석의 친어머니 신덕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방석을 지지했다. 처음부터 방석을 옹립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계가 이를 끝내 관철하자 방석의 후견인을 자임한다. 방석의 장인 심효생이 정도전 세력의 핵심인사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방석이 훌륭한 왕이 될 만한 그릇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방원이 방석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정도전은 누구보다도 방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학문적 소양, 지혜와 용기, 판단력과 결단력, 객관적으로 봐도 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과 갈라선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구상하는 조선의 미래에 어울리는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학은 본래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왕은 백성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의 판단과 선택이 공동체의 안위와 직결되는 이유도 있다. 요 임금이 아들이 아닌 순 임금에게, 순 임금이 역시 아들이 아닌 우 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그래서다. 혈연이 아니라 오로지 ‘최선(最善)’, ‘최적(最適)’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 세습군주제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유학의 이상은 더 이상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창업군주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아들, 손자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왕 중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랜덤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선대의 위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재벌 2세도 있지만, 아예 말아먹는 2세도 있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훌륭한 성군이 계속 출현하면 좋겠지만 복권에 당첨되듯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니, 대신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자는 것이다. 능력과 인품을 검증받은 현자(賢者)들이 계속해서 재상을 맡는다면 세습 군주제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다만, 이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으려면 왕은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좋은 재상을 임명하는 것 정도랄까?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추구하였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방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방원이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고 말이다.
아무튼 방석을 세자로 받든 정도전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갔다. 한데 사병혁파 등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도전이 태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독주하다 보니, 조준 같은 혁명동지와도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이들을 포섭하며 반정도전파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방원이다.
방원은 책략가 하륜을 휘하로 거둬들이고, 기득권을 빼앗겨 정도전에게 비판적이던 종친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 이거이·이저(태조의 사위) 부자, 측근인 이숙번, 조영무를 중심으로 병력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26일, 방원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방원은 광화문 앞에 병력을 집결하여 무력시위를 했다. 반대파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다. 실제로 세자 방석이 군사를 모아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어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급습하여 죽였다. 조정을 장악하고 궁궐을 점거하기 전에 우선 정도전부터 제거한 것은 정도전의 존재가 거사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일들은 역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다. 정도전의 죽음과 이방원의 쿠데타 성공. 조선을 세운 두 주역의 인연은 이처럼 비극으로 끝났다.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해 손을 맞잡은 동지였지만 끝내 원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서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조선을 이끌어갔다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은 의미가 없다. 생각과 방향이 전혀 다른, 이해관계가 일치할 수 없는, 그렇다고 어느 한 쪽이 양보할리도 없는 두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가정이다.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군권까지 장악한 재상이었으며, 학문적 깊이나 정치 경험도 이방원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패한 것은 그가 방심했기 때문이다. 세자도 어느새 열여섯 살이 되었고 추진하던 개혁도 어느 정도 안착이 되었고. 방원도 더 어쩌지 못하리라고 안심한 것이다. 정도전은 방원의 불온한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이방원은 그 틈새를 노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적수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한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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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창업 군주인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를 제외한다면, 조선 건국의 최고 공로자는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과 태종 이방원(李芳遠, 1367~1422)이다.
정도전이 새 왕조를 설계하고 이성계를 제왕의 길로 이끌어주었다면, 이방원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단호한 결단으로 이성계 세력을 지켜냈다. 고려 공양왕 4년,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정몽주는 이성계 일파를 체포하여 유배 보내고, 정도전과 조준 등 핵심인사를 처형하려고 했다. 정몽주의 파상공세에 이성계 측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이때 그 흐름을 끊어낸 것이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함으로써 고려왕조의 마지막 버팀목을 제거해버렸다. 정도전뿐 아니라 이방원이 없었어도 역사는 필시 다른 길로 이어졌을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정적으로 돌아서
그러나 이성계의 결정은 예상 밖이었다. 막내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이다. 아마도 방석의 친어머니 신덕왕후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은 방석을 지지했다. 처음부터 방석을 옹립하자고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성계가 이를 끝내 관철하자 방석의 후견인을 자임한다. 방석의 장인 심효생이 정도전 세력의 핵심인사였던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도전은 방석이 훌륭한 왕이 될 만한 그릇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방원이 방석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다. 정도전은 누구보다도 방원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학문적 소양, 지혜와 용기, 판단력과 결단력, 객관적으로 봐도 방원은 이성계의 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정도전은 이방원과 갈라선 것이다. 이방원은 정도전이 구상하는 조선의 미래에 어울리는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유학은 본래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 임금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왕은 백성을 다스릴 뿐만 아니라 깨우쳐주고 이끌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의 판단과 선택이 공동체의 안위와 직결되는 이유도 있다. 요 임금이 아들이 아닌 순 임금에게, 순 임금이 역시 아들이 아닌 우 임금에게 왕위를 넘겨준 것은 그래서다. 혈연이 아니라 오로지 ‘최선(最善)’, ‘최적(最適)’을 기준으로 후계자를 고른 것이다.
그런데 세습군주제가 정착되면서 이러한 유학의 이상은 더 이상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창업군주가 훌륭하다고 해서 그 아들, 손자까지 훌륭하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왕 중에는 어리석은 자질도 있고 현명한 자질도 있으며 강력한 자질도 있고 유약한 자질도 있어서 한결같지 않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랜덤으로 찾아온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자주 볼 수 있지 않은가? 선대의 위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재벌 2세도 있지만, 아예 말아먹는 2세도 있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정도전은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훌륭한 성군이 계속 출현하면 좋겠지만 복권에 당첨되듯 운에 맡겨야 하는 상황이니, 대신 구성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자는 것이다. 능력과 인품을 검증받은 현자(賢者)들이 계속해서 재상을 맡는다면 세습 군주제의 단점을 충분히 보완할 수 있다고 여겼다.
다만, 이러한 시스템이 자리 잡으려면 왕은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 왕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좋은 재상을 임명하는 것 정도랄까? 국왕이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를 추구하였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졌던 방원은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방원이 이를 받아들일 리도 없고 말이다.
아무튼 방석을 세자로 받든 정도전은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갔다. 한데 사병혁파 등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으로 인해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정도전이 태조의 신임을 등에 업고 독주하다 보니, 조준 같은 혁명동지와도 차츰 사이가 벌어졌다. 이들을 포섭하며 반정도전파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이 다름 아닌 방원이다.
방원은 책략가 하륜을 휘하로 거둬들이고, 기득권을 빼앗겨 정도전에게 비판적이던 종친들의 지지를 끌어냈다. 그리고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 이거이·이저(태조의 사위) 부자, 측근인 이숙번, 조영무를 중심으로 병력을 준비했다. 그리하여 1398년 8월 26일, 방원은 마침내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방원은 광화문 앞에 병력을 집결하여 무력시위를 했다. 반대파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다. 실제로 세자 방석이 군사를 모아 대항하려고 했지만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 감히 나오지 못했다”라고 한다. 이어서 이방원은 정도전을 급습하여 죽였다. 조정을 장악하고 궁궐을 점거하기 전에 우선 정도전부터 제거한 것은 정도전의 존재가 거사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일들은 역사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다.
유리한 상황 이용하지 못한 정도전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의 성패를 가른 요인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이 훨씬 유리한 상황이었다. 태조의 절대적인 신임 아래 군권까지 장악한 재상이었으며, 학문적 깊이나 정치 경험도 이방원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런데도 패한 것은 그가 방심했기 때문이다. 세자도 어느새 열여섯 살이 되었고 추진하던 개혁도 어느 정도 안착이 되었고. 방원도 더 어쩌지 못하리라고 안심한 것이다. 정도전은 방원의 불온한 움직임을 전혀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 이방원은 그 틈새를 노려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적수가 기회를 노리고 있는 한 끝까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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