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주도 ‘초대형 인수합병 시대’] 독과점 특혜일까, 산업경쟁력 강화일까
[정부 주도 ‘초대형 인수합병 시대’] 독과점 특혜일까, 산업경쟁력 강화일까
“최악 아닌 차악” 평가에 “독과점 해소 위한 재매각 필요” 지적도 정부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을 추진하면서 정부 주도의 초대형 인수합병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고 있다. 정부가 특정 기업에 독과점 특혜를 용인했다는 지적과 부실기업 회생, 산업경쟁력 강화 등을 위한 불가피한 결정이라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항공업계와 전문가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촉발된 항공업 위기 상황에서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 외에 별다른 대안이 없다고 전제하면서도, 독과점 문제 등 특혜 시비가 불거지지 않도록 철저한 관리·감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산업은행은 지난 11월 16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항공운송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 추진을 위해 한진칼과 총 8000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한다고 밝혔다. 한진칼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5000억원을 투입하고, 3000억원의 교환사채를 인수하는 방식이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주주가 아닌 제3자에 신주인수권을 주고 이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상증자를 말한다. 교환사채는 투자자가 보유한 채권을 일정 시일 경과 후에 발행회사가 보유한 다른 회사 유가증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채다. 대한항공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한진칼 사채라는 얘기다. 이를 통해 산업은행은 한진칼 지분 약 10.7%를 보유하게 된다.
이후 대한항공이 2조5000억원 규모의 주주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하면 산업은행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한 한진칼이 유상증자에 7300억원을 투입하는 구조다. 대한항공은 유상증자로 끌어들인 자본 중 1조8000억원을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사용한다. 아시아나항공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1조5000억원을, 영구채 인수에 3000억원 등을 쓰겠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통합 추진의 배경에는 글로벌 항공 산업 경쟁 심화 및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항공업 구조 재편 등 근본적인 경쟁력 제고 노력 없이는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국적 항공사의 경영 정상화가 불확실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밝혔다.
재계에선 “정부가 특정 기업에 인수 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통해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형태의 초대형 인수합병을 비공개 합의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초대형 인수합병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기아자동차 매각은 공개입찰로 진행됐다. 당시 산업은행은 기아차를 현대차에 매각하면서 약 7조원의 부채를 탕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인수합병은 특혜 시비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동차업체로 도약했다는 측면에서 초대형 인수합병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다만 국내 자동차 시장에 대한 양사의 독점적 지위 등에 대한 지적은 여전하다. 그동안 정부는 특혜 시비에 휘말릴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기조로 기업 구조조정을 진행해왔다. 산업경쟁력보다는 금융 논리가 우선 순위였다. 2017년 파산한 한진해운 사례가 대표적이다. 한진그룹은 2014년 한진해운이 위기에 빠지자 에쓰오일 지분 매각, 대한항공 유상증자 등을 통해 한진해운 경영정상화에 1조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했다. 2016년 8월에 총 5000억원 규모의 유동성 확보 방안 등이 포함된 한진해운 자구 계획안을 채권단에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해운업계에선 “글로벌 7위의 한진해운을 파산시키면 국내 해운 산업 경쟁력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이에 따라 한진해운과 현대상선(현 HMM)의 인수합병에 대한 목소리가 쏟아졌으나 정부는 한진해운 파산을 선택했다. 이를 두고 산업계에선 “정부가 산업경쟁력에 대한 고려 없이 금융 논리에 매몰된 정책 결정을 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금융 논리를 앞세운 정부 기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9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취임 이후부터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1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 결정이다. 당시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지분 전량(55.7%)을 현물 출자해 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 등 4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중간지주사(한국조선해양)의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의 인수합병을 발표했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지분을 한국조선해양에 넘기는 대신 한국조선해양 신주를 받겠다는 것이다. 한국조선해양은 1조5000억원으로 대우조선 지분 68.35%를 확보하고, 산업은행은 한국조선해양의 지분 18%를 확보한 2대 주주에 올라서는 구조다.
조선업 빅딜과 양대 항공사 인수합병을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정부가 우회적인 지원을 통해 초대형 인수합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정부는 한국조선해양 지분 확보로 대우조선 매각가격을 낮췄고, 이번엔 한진칼에 8000억원을 투자해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금을 지원했다. 독과점 특혜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도 비슷하다. 산업은행 측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인수합병 발표 당시 한국조선해양 2대 주주로 독과점 우려 등에 대해 관리·감독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번엔 한진칼 지분 10.7%를 통해 한진그룹 경영진을 감시한다고 설명했다. 지주사 지분 확보로 인수합병을 지원하고, 확보된 지분으로 독과점 경영을 견제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금융권 안팎에선 이동걸 회장 취임 이후 성사된 2건의 초대형 인수합병은 이동걸 회장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결과물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들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청와대 재가는 있었겠지만, 초대형 인수합병의 아이디어는 산업은행으로부터 시작됐을 것이란 분석이다.
그러나 재벌 개혁론자로 알려진 이 회장은 산업은행 취임 전부터 정책 금융을 통한 부실기업 지원을 비판해왔다. 이 회장은 2017년 9월 취임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 중인 기업은 채권단의 지원 없이 독자생존이 가능한지 최우선으로 봐야한다”며 “그 후 지원이나 매각을 통해 정상화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부실기업 살리기를 위한 맹목적인 지원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항공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양대 항공사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양사를 합병하는 것이 정부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는 분석이 많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에 기간산업안정기금 등을 포함해 최근 2년간 5조7000억원의 지원이 이뤄졌지만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지원이 불가피하다”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로 공적 자금이 투입돼야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둘 다 살리려면 훨씬 더 많은 재정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은 정부와 한진그룹, 금호그룹 모두가 만족할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번 합병으로 한진칼 지분 10.7%를 확보한 산업은행이 경영권 분쟁 상황인 조원태 회장 측의 백기사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조원태 회장쪽에 서면,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종결된다. 금호그룹의 경우 독자생존이 불가능한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해 아시아나항공발(發) 연쇄 부실을 막을 수 있게 됐다. 정부 입장에선 양대 항공사에 대한 과도한 지원에 따른 혈세낭비 논란을 줄일 수 있고,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부담도 피하게 됐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경영학)는 “이번 인수합병으로 대한항공은 경영권 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됐고, 독자생존이 불가능했던 아시아나항공은 기사회생 하게 됐다”며 “산업은행은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동시에 아시아나항공 회생을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대한항공에 떠넘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황 교수는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은 케이씨지아이(KCGI)를 제외한 다수의 이해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인데, 다수 이해당사자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방안이라는 것은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은 고육지책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방안”이라고 했다. 문제는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이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 방어, 부실기업 아시아나항공 회생 등에만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져있다는 점이다. 항공업계와 재계에선 조원태 회장이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결정하지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많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은 HDC현대산업개발과의 인수합병이 결렬된 이후 사실상 독자생존이 불가능해 정부 지원을 받아도 대규모 구조조정이 불가피했다”며 “아시아나항공 구조조정 과정에서 에어부산 등이 분리 매각되거나 장거리 노선이 정리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대한항공은 기다리면 되는 입장이었다”고 분석했다. 실제 산업은행 측도 아시아나항공 매각이 실패한 이후 구조조정과 분리 매각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경제개혁연대 측은 11월 17일 논평을 내고 “이번 인수합병이 한진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권을 안정시키고 향후 항공 산업 재편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까지 추가적으로 보장해주는 ‘재벌 특혜’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교환사채 인수를 통해 대한항공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방식을 택할 경우, 한진칼의 대한항공 지분은 다소 희석될 수 있으나 지주회사 의무지분율 요건(상장회사 20% 이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지적했다.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경영권 분쟁 중인 조원태 회장에만 유리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도 조 회장에 유리한 인수합병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재계에선 이번 인수합병으로 정부가 한진그룹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각에선 “한진그룹이 사실상 공기업이 된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가 최대주주인 KT나 포스코처럼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수합병이 성사되면 산업은행의 의중에 따라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을 방어하거나 박탈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며 “한진그룹이 KT나 포스코처럼 공기업 민영화 형태의 회사가 됐다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이 완료되지 않은 현 시점에 이미 한진그룹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인수합병을 발표하면서 인수합병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은 없다고 밝혔다. 양사가 보유한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의 저비용항공사(LCC)를 단계적으로 통합하는 방안 등도 거론했다. 인수 주체가 아닌데도 양대 항공사의 경영정상화 방안을 언급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조원태 회장은 산업은행 발표 이틀 뒤인 11월 18일에 “구조조정 계획은 없다”는 뜻을 밝혔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경영학)는 “진에어 등 자회사 통합 문제나 인력 구조조정은 인수자(한진그룹)가 할 일”이라며 “정부가 인수합병 전에 경영정상화 방안을 언급하는 것은 과도한 경영 개입”이라고 했다. 양준모 교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거나 채권단이 불가피하게 인수한 지분은 경영정상화 이후 조기 매각해 민영화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산업은행이 지분 소유로 경영 개입을 한다면 그 자체로 불법”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한진그룹 경영에 개입하는 것은 문제지만,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독과점 문제 등을 해소하기 위한 관리·감독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상인 위원장은 “산업은행의 의견을 전달하는 수준의 사외이사가 아닌 독립적이고 전문성이 있는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항공사의 독과점 문제는 노선 전체의 점유율이 아닌 노선별 점유율을 따져야 하는데, 양대 항공사가 합쳐지면 미주, 유럽 등 장거리 노선을 독점하게 된다”며 “다른 LCC에 장거리 노선을 배분하거나 통합 후 진에어나 에어부산 등을 매각해 대한항공과 경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양준모 교수는 “향후 노선별 편중이나 항공료 운임 인상 등 독과점의 폐해가 발생할 경우 분할 명령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통합에 따른 독과점이나 총수 일가 갑질 등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윤리경영위원회 설치 등 7개 의무 조항을 한진칼에 부과했다. 주요 조항은 산업은행 지명 사외이사 3인 및 감사위원회위원 선임, 윤리경영위원회 설치, 대한항공 주식 등에 대한 담보 제공·처분 등의 제한이 있다. 또한 투자합의서의 중요 조항을 위반할 경우 5000억원의 위약벌과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대한항공 발행 신주에 대한 처분 권한 위임 및 질권을 설정할 의무를 가진다. 질권은 채무자가 돈을 갚을 때까지 채권자가 담보물을 간직할 수 있고,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담보물로 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산업은행은 지난 11월 16일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통합을 골자로 하는 항공운송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 추진을 위해 한진칼과 총 8000억원 규모의 투자계약을 체결한다고 밝혔다. 한진칼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5000억원을 투입하고, 3000억원의 교환사채를 인수하는 방식이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는 주주가 아닌 제3자에 신주인수권을 주고 이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유상증자를 말한다. 교환사채는 투자자가 보유한 채권을 일정 시일 경과 후에 발행회사가 보유한 다른 회사 유가증권으로 교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사채다. 대한항공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한진칼 사채라는 얘기다. 이를 통해 산업은행은 한진칼 지분 약 10.7%를 보유하게 된다.
이후 대한항공이 2조5000억원 규모의 주주 배정 유상증자를 단행하면 산업은행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한 한진칼이 유상증자에 7300억원을 투입하는 구조다. 대한항공은 유상증자로 끌어들인 자본 중 1조8000억원을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사용한다. 아시아나항공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1조5000억원을, 영구채 인수에 3000억원 등을 쓰겠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통합 추진의 배경에는 글로벌 항공 산업 경쟁 심화 및 코로나19 사태 장기화로 항공업 구조 재편 등 근본적인 경쟁력 제고 노력 없이는 코로나19 종식 이후에도 국적 항공사의 경영 정상화가 불확실하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밝혔다.
재계에선 “정부가 특정 기업에 인수 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통해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형태의 초대형 인수합병을 비공개 합의로 결정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초대형 인수합병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는 기아자동차 매각은 공개입찰로 진행됐다. 당시 산업은행은 기아차를 현대차에 매각하면서 약 7조원의 부채를 탕감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의 인수합병은 특혜 시비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자동차업체로 도약했다는 측면에서 초대형 인수합병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다만 국내 자동차 시장에 대한 양사의 독점적 지위 등에 대한 지적은 여전하다.
초대형 인수합병 지원하는 정부
금융 논리를 앞세운 정부 기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9월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 취임 이후부터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해 1월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의 인수합병 결정이다. 당시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 지분 전량(55.7%)을 현물 출자해 현대중공업, 현대삼호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대우조선 등 4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중간지주사(한국조선해양)의 지분을 취득하는 방식의 인수합병을 발표했다. 산업은행이 대우조선 지분을 한국조선해양에 넘기는 대신 한국조선해양 신주를 받겠다는 것이다. 한국조선해양은 1조5000억원으로 대우조선 지분 68.35%를 확보하고, 산업은행은 한국조선해양의 지분 18%를 확보한 2대 주주에 올라서는 구조다.
조선업 빅딜과 양대 항공사 인수합병을 단순 비교하긴 어렵지만, 정부가 우회적인 지원을 통해 초대형 인수합병을 추진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정부는 한국조선해양 지분 확보로 대우조선 매각가격을 낮췄고, 이번엔 한진칼에 8000억원을 투자해 아시아나항공 인수 자금을 지원했다. 독과점 특혜를 방지하기 위한 방안도 비슷하다. 산업은행 측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인수합병 발표 당시 한국조선해양 2대 주주로 독과점 우려 등에 대해 관리·감독한다는 입장을 밝혔고, 이번엔 한진칼 지분 10.7%를 통해 한진그룹 경영진을 감시한다고 설명했다. 지주사 지분 확보로 인수합병을 지원하고, 확보된 지분으로 독과점 경영을 견제한다는 논리를 편 것이다.
부실기업 살리고 구조조정 부담 피한 ‘묘수’
그러나 재벌 개혁론자로 알려진 이 회장은 산업은행 취임 전부터 정책 금융을 통한 부실기업 지원을 비판해왔다. 이 회장은 2017년 9월 취임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구조조정 중인 기업은 채권단의 지원 없이 독자생존이 가능한지 최우선으로 봐야한다”며 “그 후 지원이나 매각을 통해 정상화해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부실기업 살리기를 위한 맹목적인 지원을 용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항공업계와 전문가들 사이에선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양대 항공사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양사를 합병하는 것이 정부 지원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이라는 분석이 많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아시아나항공에 기간산업안정기금 등을 포함해 최근 2년간 5조7000억원의 지원이 이뤄졌지만 아시아나항공의 경영 정상화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지원이 불가피하다”며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어느 정도로 공적 자금이 투입돼야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상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정책위원장(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둘 다 살리려면 훨씬 더 많은 재정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은 정부와 한진그룹, 금호그룹 모두가 만족할만한 제안이었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이번 합병으로 한진칼 지분 10.7%를 확보한 산업은행이 경영권 분쟁 상황인 조원태 회장 측의 백기사 역할을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산업은행이 조원태 회장쪽에 서면,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은 사실상 종결된다. 금호그룹의 경우 독자생존이 불가능한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해 아시아나항공발(發) 연쇄 부실을 막을 수 있게 됐다. 정부 입장에선 양대 항공사에 대한 과도한 지원에 따른 혈세낭비 논란을 줄일 수 있고, 정부가 나서서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부담도 피하게 됐다.
황용식 세종대 교수(경영학)는 “이번 인수합병으로 대한항공은 경영권 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됐고, 독자생존이 불가능했던 아시아나항공은 기사회생 하게 됐다”며 “산업은행은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동시에 아시아나항공 회생을 위해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해야 한다는 부담을 대한항공에 떠넘길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황 교수는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은 케이씨지아이(KCGI)를 제외한 다수의 이해당사자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결과물인데, 다수 이해당사자의 이해를 충족시키는 방안이라는 것은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양준모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은 고육지책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방안”이라고 했다.
한진그룹 ‘공기업’ 전락 우려도
경제개혁연대 측은 11월 17일 논평을 내고 “이번 인수합병이 한진 총수일가의 그룹 지배권을 안정시키고 향후 항공 산업 재편으로 인한 독점적 지위까지 추가적으로 보장해주는 ‘재벌 특혜’가 아닌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경제개혁연대는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교환사채 인수를 통해 대한항공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방식을 택할 경우, 한진칼의 대한항공 지분은 다소 희석될 수 있으나 지주회사 의무지분율 요건(상장회사 20% 이상)에는 문제가 없다고 지적했다. 산업은행이 한진칼의 제3자 배정 유상증자에 참여해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경영권 분쟁 중인 조원태 회장에만 유리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정치권에서도 조 회장에 유리한 인수합병 방식에 대한 문제제기가 나왔다.
재계에선 이번 인수합병으로 정부가 한진그룹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일각에선 “한진그룹이 사실상 공기업이 된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정부가 최대주주인 KT나 포스코처럼 정부 입김에서 자유롭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이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수합병이 성사되면 산업은행의 의중에 따라 조원태 회장의 경영권을 방어하거나 박탈할 수 있는 구조가 된다”며 “한진그룹이 KT나 포스코처럼 공기업 민영화 형태의 회사가 됐다는 시각이 많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의 인수합병이 완료되지 않은 현 시점에 이미 한진그룹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인수합병을 발표하면서 인수합병에 따른 인력 구조조정은 없다고 밝혔다. 양사가 보유한 진에어, 에어부산, 에어서울 등의 저비용항공사(LCC)를 단계적으로 통합하는 방안 등도 거론했다. 인수 주체가 아닌데도 양대 항공사의 경영정상화 방안을 언급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조원태 회장은 산업은행 발표 이틀 뒤인 11월 18일에 “구조조정 계획은 없다”는 뜻을 밝혔다. 허희영 한국항공대 교수(경영학)는 “진에어 등 자회사 통합 문제나 인력 구조조정은 인수자(한진그룹)가 할 일”이라며 “정부가 인수합병 전에 경영정상화 방안을 언급하는 것은 과도한 경영 개입”이라고 했다. 양준모 교수는 “공적자금이 투입됐거나 채권단이 불가피하게 인수한 지분은 경영정상화 이후 조기 매각해 민영화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산업은행이 지분 소유로 경영 개입을 한다면 그 자체로 불법”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한진그룹 경영에 개입하는 것은 문제지만, 향후 발생할 수 있는 독과점 문제 등을 해소하기 위한 관리·감독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박상인 위원장은 “산업은행의 의견을 전달하는 수준의 사외이사가 아닌 독립적이고 전문성이 있는 사외이사를 선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항공사의 독과점 문제는 노선 전체의 점유율이 아닌 노선별 점유율을 따져야 하는데, 양대 항공사가 합쳐지면 미주, 유럽 등 장거리 노선을 독점하게 된다”며 “다른 LCC에 장거리 노선을 배분하거나 통합 후 진에어나 에어부산 등을 매각해 대한항공과 경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양준모 교수는 “향후 노선별 편중이나 항공료 운임 인상 등 독과점의 폐해가 발생할 경우 분할 명령 등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산업은행은 양대 항공사 통합에 따른 독과점이나 총수 일가 갑질 등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윤리경영위원회 설치 등 7개 의무 조항을 한진칼에 부과했다. 주요 조항은 산업은행 지명 사외이사 3인 및 감사위원회위원 선임, 윤리경영위원회 설치, 대한항공 주식 등에 대한 담보 제공·처분 등의 제한이 있다. 또한 투자합의서의 중요 조항을 위반할 경우 5000억원의 위약벌과 손해배상책임을 부담해야 한다. 이를 담보하기 위해 대한항공 발행 신주에 대한 처분 권한 위임 및 질권을 설정할 의무를 가진다. 질권은 채무자가 돈을 갚을 때까지 채권자가 담보물을 간직할 수 있고, 채무자가 돈을 갚지 않으면 담보물로 우선 변제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인 가구 월평균 소득 315만원…생활비로 40% 쓴다
2‘원화 약세’에 거주자 외화예금 5개월 만에 줄어
3서울 아파트 실거래가 지수 9개월 만에 하락
4국제 금값 3년 만에 최대 하락…트럼프 복귀에 골드랠리 끝?
5봉화군, 임대형 스마트팜 조성… "청년 농업인 유입 기대"
6영주시, 고향사랑기부 1+1 이벤트..."연말정산 혜택까지 잡으세요"
7영천시 "스마트팜으로 농업 패러다임 전환한다"
8달라진 20대 결혼·출산관…5명 중 2명 ‘비혼 출산 가능’
9김승연 회장 “미래 방위사업, AI·무인화 기술이 핵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