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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5) 김유신과 계백] 계백이 김유신과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었다면…

[김준태 호적수(15) 김유신과 계백] 계백이 김유신과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었다면…

조직의 뒷받침 없던 리더 계백 vs 조직의 도움받은 연승의 리더 김유신
2012년 10월 충남 논산시 부적면 계백장군 유적지에서 백제 황산벌 전투재현 행사가 열렸다.
660년 7월, 김유신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이 황산벌로 진군했다. 백제를 속이기 위해 남천정(경기 이천)으로 우회하여 탄현(충남 금산)을 거쳐 황산벌로 들어선 것이다. 이곳만 돌파하면 백제의 수도 사비성으로, 바다를 건너온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백제 조정은 공포에 휩싸였다. 당시 백제는 계속된 분열과 혼란 속에서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즉위 초기만 해도 더없이 영명했던 의자왕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고, 왕권을 강화한다며 귀족들을 탄압했다. 유력 귀족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했는가 하면, 41명의 아들에게 1품 관직인 좌평(佐平)을 제수하여 국정을 맡겼다(.귀족들이 맡았던 좌평은 원래 6명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백성으로부터 존경받던 성충은 의자왕에게 간언을 올리다 투옥된 뒤 식사를 거부하고 감옥에서 굶어 죽었다. 올곧은 신하 흥수는 유배형에 처했고, 조정의 중심을 잡아주던 대좌평 사택지적은 은퇴해버렸다. 왕의 전횡과 귀족의 반발로 국정은 혼돈 그 자체였다.
 5000명의 결사대로 5만 병력을 상대한 계백
이러한 상황이니 서쪽 바다에서는 당나라가, 동쪽 육로로는 신라가 도합 20만 대군을 휘몰아 쳐들어왔지만 백제로서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일찍이 성충이 전쟁을 예견하며 “육로로는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로 진입하지 못하게 한 후,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맞서 싸우면 틀림없이 격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귀양을 가 있던 흥수도 탄현과 기벌포에 군사를 집결하여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우왕좌왕하다가 때를 놓쳐버렸다. 귀족들이 나랏일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원할 병사조차 턱 없이 부족했다. 황산벌에서 김유신과 마주한 계백의 5000 결사대는 백제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5만 대 5000. 누가 봐도 뻔한 싸움이다. 일찍이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는 10배 많은 적과 맞서게 되면 두려워 도망가는 병사들이 생긴다고 했다. 게다가 신라군은 불패의 명장으로 불리는 김유신이 지휘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변이 일어났다. 계백의 백제군이 네 번의 치열한 공방에서 모두 신라군을 격퇴한 것이다. 도대체 계백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기적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계백에 관한 사료는 매우 드물다.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 그리고 [삼국유사]에 전해오고 있는데 계백 본인의 열전조차 매우 짧다. 더욱이 그가 등장하는 것은 황산벌 전투가 처음이어서 이전의 삶에 대해서 파악할 수가 없다. 그의 품계가 2품 달솔(達率)이라는 점, 황산벌 전투에서 자신보다 상위 품계인 좌평 충상과 상영을 지휘했다는 점에서 신분이 높고 무장으로서도 인정받았을 것으로 짐작하는 정도다.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계백이 ‘부여씨’, 즉 백제의 왕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확실하지 않다.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이 지은 [해동잡록]에는 계백이 가잠성(충북 보은 혹은 영동) 성주로서 일찍이 김유신을 격퇴한 바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백제와 싸워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 [해동잡록]은 [삼국사기] 외에도 실전된 역사서들을 대거 인용하고 있음으로, 이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백제는 유일하게 김유신과 싸워 이긴 경험이 있는 계백을 출정시킨 셈이다. ([삼국사기]에 김유신-계백 간의 가잠성 전투는 나오지 않는다)
 황산벌 싸움에서 계백의 패배, 여러 해석 나아
계백은 5000의 결사대를 이끌고 김유신을 저지하기 위해 황산벌로 나아갔다. 전장으로 떠나기 전 계백은 아내와 자식을 직접 베었는데, “지금 당나라와 신라의 대군을 마주하고 있어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만약 망하게 된다면 아내와 자식들은 필시 치욕을 당하게 될 것이다. 살아서 욕을 보느니 차라리 깨끗이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 말했다고 한다. 이 행동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한 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계백은 ‘나라의 존망을 알 수가 없다’, ‘만약 망하게 된다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했는데, 망하지 않을 가능성,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처자식을 죽이고 출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시라도 내가 죽고 사비성이 적에게 함락되거든 자결하라고 당부할지언정 말이다.

계백은 백제의 국운이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최대한 적을 저지함으로써 백제의 군신(君臣)이 후일을 도모하고,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기꺼이 전장으로 나선 것이다.

그리하여 황산벌에 도착한 계백은 병사들에게 외쳤다. “옛날 월나라 왕 구천은 5000명의 군사로 오나라 70만 군대를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도 있는 힘을 다해 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 <삼국사기> 에 따르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백제군이 “한 사람이 천명을 당해내는 기개”로 신라군과 격돌했고 여기에 계백의 지략이 덧붙이면서 김유신은 연패를 거듭했다. 이에 김유신과 신라 지휘부는 승부수를 던졌는데 어린 화랑을 투입하여 신라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것이다. 김유신의 조카 반굴과 좌장군 김품일의 아들 관창이 백제의 진영으로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 죽임을 당하자, 분노한 신라군이 목숨을 걸고 싸워 계백의 결사대를 물리쳤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황산벌 전투의 결말인데, 다른 뉘앙스의 역사 기록도 있다. 계백과 백제군은 전투에서 진 것이 아니라, 힘이 다해 쓰러졌다는 것이다.

이상 김유신과 계백은 가히 호적수라 부를 만하다. 김유신이 군대를 통솔하게 된 이래 그를 지게 만들고 곤경에 빠트린 적장은 계백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산벌 전투가 이 두 호적수 간의 온전한 승부였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병력 규모 면에서 상대가 안 됐고, 동원할 수 있는 자원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나라의 상황, 군사들의 분위기도 차원이 달랐다. 객관적으로 김유신이 월등하게 유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백이 놀랄만한 역량을 보여주었으니, 만약 계백이 김유신과 동등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하다.

김유신과 계백의 사례는 본인의 실력 못지않게 소속되어 있는 집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개인이 아무리 뛰어나도 보스가 그 능력을 펼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조직이 나를 지원해주지 못한다면, 그는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다. 전사적인 지원을 받아 훨훨 날고 있는 라이벌을 부러워하며 절망할 수밖에 없다. 자기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환경을 찾는 것도 실력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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