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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의날 특집기획] 밋밋하고 틀어지고…‘무늬만 점자’ 넘친다

[인터뷰] 이연주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
포장지 공간적 제약 한계, QR코드 확대로 극복 가능
손끝만 닿아도 알아차리는 비락식혜 하트(♡) “작고 소중해”

 “위에서 두번째 선반대 맨 왼쪽부터 신라면·진라면·삼양라면·짜파게티…. 한때 자주 가는 마트에서 라면 진열 순서를 모두 외웠어요. 연고를 바를 때도 마찬가지에요. 가장 끝에 있는 건 상처가 났을 때, 그 다음은 화상, 다음은 습진에 바르는 것….”
점자 표기 제품들. 사진은 기사와 무관.[중앙포토]

‘티 나지 않는 스트레스.’ 이연주 사단법인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은 일상 속 제품이 주는 정보를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 실장과 같이 눈 대신 촉각에 의존해 살아가는 시각장애인은 약 25만3000명(보건복지부 등록 기준). 이들에게 먹고, 마시고, 입는 데 필요한 모든 제품 정보는 거대한 스트레스에 가까웠다. 점자가 주는 정보의 한계 때문이다. 4월 13일 서울시 여의도동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이 실장을 만나 점자 표기의 실상에 대해 물었다.  
이연주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실장[사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이 실장은 사실상 ‘무늬만 점자’인 제품들이 일상 속에 많이 퍼져있다고 지적했다. 손으로 점자 인지하는 ‘촉지’가 불가능한 경우가 첫 번째다. 점선이 밋밋하거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시각장애인들이 촉지해도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 자간과 점간 등이 조금만 틀어져도 읽기가 불가능하다. 1번 칸에 있어야 할 점이 2번 칸에 있다면 제품 정보에 대한 정확한 식별이 어렵다.  
점자 예 [사진=중앙포토]
 
대부분 공간적 제약 때문이지만 종이·PVC·스테인리스 등 재질에 따라 점 높이와 점간 거리가 다르게 표기되기도 한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러한 오류를 줄이기 위해 점자의 물리적 규격(점 높이는 최솟값 0.6㎜· 최댓값 0.9㎜, 점 지름은 최솟값 1.5㎜·최댓값 1.6㎜, 점간 거리는 최솟값 2.3㎜· 최댓값 2.5㎜, 자간 거리는 종이·스티커 최솟값 5.5㎜ 최댓값 6.9㎜)을 권고하고 있지만 현실에선 비슷하게 맞추기도 어렵다는 게 이 실장의 설명이다.  
 
인천 송암점자도서관. 나라별 점자의 예.[중앙포토]
영어로 점자를 표기해 놓고 영문으로 해석하라는 표시를 안 해 주는 제품도 있다. 영어 점자의 경우 한글과 겹치는 게 많기 때문에 시각장애인에게 영어 점자 표시는 꼭 필요한 부분이다. 해당 표시가 없다면 영어인지 알 수 없어 제품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말로 인지될 수 있다.  
 

필수품 된 마스크, 점자 표기한 제조사는 하나뿐

 
이 실장은 “제조사들이 시각장애인들의 정보 접근성을 높이는 측면에서 점자 표기를 하기보다는 보여주기 식 점자를 찍어내는 경우가 많다”며 “촉지했는데 엉터리 점자일 때는 정보를 알긴커녕 오히려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식품만의 문제가 아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필수적인 물품을 인지하고, 구입하는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코로나19 확진 증상이 의심될 때 가정용 체온계로 체온을 재도 혼자서는 몇 도인지 알 길이 없다. 체온을 음성으로 알려주는 체온계가 시중에 없는 탓이다. 마스크의 경우 KF94·KF80 등의 점자 표기가 되지 않아 종류를 식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 실장은 “가격이 비싸 KF94 제품이겠거니 했는데 덴탈마스크인 경우도 있었다”며 “크린웰이라는 제조사가 유일하게 포장지에 점자를 표기한 마스크를 출시했는데 시중에선 찾기 어려워 주로 지인의 도움을 받아 구입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인식 변화 속에서 희망을 엿보기도 한다. 이연주 실장은 맥주 ‘테라’와 생수 ‘아이시스’를 모범 사례로 꼽았다. 맥주를 종류별로 다 사놓으면 이 제품이 어떤 브랜드 맥주인 지 알 수 없었는데 ‘테라’라고 정확히 점자 표기가 돼 있으니 구분하기 편하다는 것. 페트병만으로는 물인지 음료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는데 점자표기가 된 ‘아이시스’는 생수라는 걸 바로 인지할 수 있어 바람직한 변화로 봤다.  
 
이 실장은 브랜드 명이 길어서 제품에 표기가 어렵다면 ‘줄임말’이나 ‘기호’ 등으로 제품에 대한 정보를 주는 것도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가 팔도 비락식혜에 표기된 ‘하트(♡)’점자다. 이 실장은 “예컨대 ‘처음처럼’이면 ‘처음’이라는 표기를 하거나 제품에 대한 애칭 등을 담은 서로 간의 약속이 있으면 된다”며 “출시 초기엔 헷갈릴지 몰라도 같은 표시에 계속 노출되면 문제될 게 없다”고 말했다.  
QR코드를 통해 직원 문의 없이도 상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사진은 기사와 무관. [뉴시스]
 
그보다 더 나아간 방식은 점자와 QR코드 정보를 함께 쓰는 것이다. 점자 표기만으로는 설명이 어려운 제품에 대한 추가 정보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 폰으로 제품 바코드나 QR코드를 찍으면 해당 제품이 무엇이고, 제조년월부터 유통기한과 성분, 제조사 연락처 등의 자세한 정보를 음성지원하면 굳이 점자 표기를 키우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다. 
 
이 실장은 “바코드나 QR코드는 매장에서 이미 다 하고 있는 시스템이니 기술력은 문제가 없다고 본다”며 “문제는 관심”이라고 강조했다. “QR코드를 하더라도 어떤 위치에 어떤 방식으로 알려줄 건지에 대한 통일성에 대한 표준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점자에 QR정보가 더해진다면 시각장애인들도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제품을 고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 실장의 생각이다. 그는 단순히 원하는 제품을 산다는 것을 넘어 자기선택권이 보장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장애인 복지의 궁극적인 목표인 ‘자립’과 연결되는 중요한 지점인 것이다.  
 
이 실장은 “장애인이 독립적 인격체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며 “추가적으로 QR코드를 적용하는 기업에겐 정부의 간접적인 지원이 이어져 기업과 시각장애인 모두가 서로 윈윈하는 구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설아 기자 kim.seola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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