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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스테이지] 연극 ‘코리올라누스’…흑백 느와르영화 같은 무대, 영웅 포스로 사로잡다

연극 ‘코리올라누스’ 한 장면
“이번엔 비주얼보다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했습니다.”
 
‘전방위 스타일리스트’가 비주얼을 포기한 걸까 싶지만, 아니다. 양정웅 연출은 비주얼도 캐릭터도 놓치지 않았다.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식 총연출 등으로 5년여 연극판에서 만날 수 없었던 그의 복귀작 ‘코리올라누스’(15일까지 LG아트센터) 얘기다.
 
자타공인 ‘셰익스피어 스페셜리스트’로서 9번째로 도전한 셰익스피어가 결이 좀 다른 건 맞다. 양정웅에게 “한국적 정서의 셰익스피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는 평을 선사했던 ‘한여름밤의 꿈’ ‘십이야’ 등 전작들이 우리 전통예술의 요소를 결합한 해학 넘치는 희극이었다면, ‘코리올라누스’는 모던하고 미니멀한 무대와 현대적인 의상을 입은 영웅의 몰락을 그린 정치극이자 비극이다.
 
양정웅이 매료된 캐릭터는 플루타크 영웅전에 등장하는 기원전 5세기 로마의 장군 가이우스 마르티우스다. 강한 신념과 자존감의 상징과도 같은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마르티우스는 로마가 볼스키족과의 대립으로 위기에 빠졌을 때 볼스키족의 도시 ‘코리올리’를 정복해 ‘코리올라누스’란 영광의 이름을 얻고 로마 최고 권력인 집정관으로 추대된다. 최고의 출신 성분과 스펙을 갖췄기에 마지막 관문인 시민들과의 소통 점수만 얻으면 되는 상황.
 
하지만 그는 대쪽같이 ‘고결한’ 성품 탓에 몸을 낮추지 못하고 견제세력인 호민관의 음모에 말려들어 추방된다. 이후 결국 볼스키에 투항해 복수에 나서지만, 로마에 남겨진 가족에게 발목 잡혀 죽음을 맞는 운명이다.  
 

21세기 현실정치 보는 듯 흥미로워 

기원전 5세기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마치 21세기 현실정치의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흥미로운 이야기가 다의적이고 중층적이긴 하지만 분명한 건 있다. ‘고결함’을 신조로 살아온 영웅이 그 ‘고결함’ 때문에 몰락하는 아이러니다. 유권자에게 아첨할 줄 모르는 정치인은 고립되기 쉽다. 영웅에게 열광했다가도 금세 마이크를 쥔 선동가에게 놀아나게 마련인 대중의 속성 또한 불변의 진리다. 고결함과 겸손이란 물과 기름과 같아서 대충 눈속임으로 섞을 수 없는 노릇이다.
 
객석을 광장에 모인 시민들로 설정해 시민들과의 어쩔 수 없는 스킨십을 위해 마스크를 쓰고 손소독을 하는 것은 코리올라누스의 ‘고결한’ 성품을 팬데믹이라는 동시대성에 녹여내면서 유머까지 살린 ‘일타삼피’ 연출이다.
 
원톱 주인공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발휘한 건 남윤호 배우다. 코리올라누스는 햄릿과도 같은 고독을 품은 애처로운 히어로 캐릭터인데, 요즘 우리 연극판에서 찾아보기 힘든 대형 배우의 포스가 느껴졌다. ‘에쿠우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에서 미소년 이미지로 나름 주목받다가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던 그다. 어쩌면 ‘유인촌의 아들’이라는 굴레 안에서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아니었을까. 4년 만에 복귀한 국내 무대에서 몰라보게 성장한 모습 이면에 코리올라누스의 그것처럼 처절한 고독이 배어나왔다.  
 
연극 ‘코리올라누스’ 한 장면
양 연출은 ‘캐릭터와 그가 겪는 이야기에 집중했다’고 했지만, 결국 인물을 돋보이게 한 건 뛰어난 미장센이었다. ‘이야기 자체가 느와르 영화 같다’던 그는 무대와 의상 전체를 마치 흑백영화처럼 무채색으로 만들어버렸다. 1막에선 피칠갑조차 검정 먹물을 끼얹어 표현할 정도다. 민주주의가 태동한 로마에서 시민과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광장을 은밀하고 폐쇄된 지하벙커로 표현한 것도 고도의 아이러니다. 21세기의 광장은 특정집단의 아지트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볼스키족 오피디우스와의 결투를 근육질 상반신을 드러낸 두 남자의 슬로우모션으로 연출한 장면도 현대무용을 보는 듯 스타일리쉬했다.  
 

넷플릭스는 흉내낼 수 없는 연극의 맛 

압권은 셰익스피어에 걸맞는 강렬한 엔딩이다. 코리올라누스의 죽음에 이르러 비로소 흑백을 깨고 짙은 오렌지빛이 시야를 물들일 때 무릎을 쳤다. 연극의 경쟁력이란 눈앞에서 생생히 펼쳐지는, 예술적 아이디어가 응축된 퍼포먼스에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달아서다. 5천년을 관통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현미경 같은 이야기를 강렬한 미적 체험과 함께 전달하는 감동을 연극 아닌 어떤 예술이 줄 수 있을까. 적어도 넷플릭스가 연극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점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유주현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랩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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