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부자’ 윤선도의 도리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④]
선(善) 쌓아 부(富) 이어간 해남 윤씨 가문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 동산에 달 떠오르니 그 모습이 더욱 반갑구나 / 두어라 이 다섯 외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학창시절 교과서에서 한 번쯤 접했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오우가(五友歌)’다. [산중신곡], [어부사시사] 등 뛰어난 가사(歌辭)와 시조 작품을 남긴 윤선도는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예학, 역사, 지리, 의학에도 통달한 다재다능한 인재였다.
하지만 거침없고 비타협적인 성품 탓에 유배와 은거를 반복한다. 특히 현종 때 벌어진 예송 논쟁에서 남인의 이데올로기로 나섰다가 패배, 74세의 나이에 함경도 삼수로 유배되고 81세가 되어서야 풀려나는 고초를 겪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그의 일상생활만큼은 더없이 풍족하여 남부러울 게 없었다고 한다.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고 이를 크게 불렸을 정도로 뛰어난 재정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전답’ 창조하며 성장 동력 확보한 윤선도
그런데 간척사업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간석지에 긴 해언(海堰, 둑)을 쌓고 물을 빼내려면 막대한 노동력과 정밀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더욱이 간석지를 개척해 전답으로 가꾸고, 그곳에서 이익을 얻어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입은 전혀 생기지 않는데 지출만 계속되는 상황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도 이 사업이 매력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땅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랜 R&D 끝에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윤선도는 전답을 ‘창조’함으로써 가문의 성장 동력을 확보한 것이다.
윤선도에게서 주목할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부를 유지하기 위해 지켜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상세한 가르침을 남겼다. 1660년(현종 1년) 윤선도가 큰아들 윤인미에게 쓴 편지를 보자. “하늘의 도움을 얻는 길은 오직 선(善)을 쌓는 데 있다. 너희들은 몸을 수양하고, 근면하고 성실하게 행동하며, 선을 쌓고 인(仁)을 행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라.” 어떤 일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나 자신을 바르게 하고 부지런히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올바른 방법을 써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좋은 기회가 주어지고 좋은 사람을 만나는 등 운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그러려면 내가 먼저 선을 쌓고 인을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어서 윤선도는 말한다. “우리 집안의 조상들을 보면, 고조부께서 농사일에 근면하고 노복들을 잘 대해주셨기 때문에 증조부 대에 우뚝 일어나서 가문이 융성하게 되었다. 한데 조부님은 비록 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마음을 쓰셨기 때문에 자손의 대가 그만 끊어지고 말았다. 다른 집안 어른들도 고조부의 법도를 제대로 본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손이 쇠락하였으니 선을 쌓고 인을 행하지 않으면 하늘이 외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가 있다.”
윤선도의 고조부인 윤효정과 증조부인 윤구는 근검절약하고 노비를 어질게 대해줌으로써 집안을 일으켰다. 특히 윤효정은 큰 가뭄이 들자 고을 백성의 세금을 대신 내주어 ‘삼개옥문적선지가(三開獄門積善之家)’라는 이름을 얻는다. 감옥 문을 세 번이나 열어주는 선한 일을 한 집안이라는 뜻으로, 세금을 내지 못해 옥에 갇히는 사람이 없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양조부인 윤홍중은 인색하고 치부에 집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윤홍중의 동생이자 생조부 윤의중도 ‘탐욕스럽다’, ‘청렴하지 않게 치부하여 청론의 버림을 받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윤홍중과 윤홍중의 대를 잇기 위해 양자로 들어간 윤유기(윤의중의 둘째 아들) 대에 이르러 자식도 없고 가세가 쇠락한 것은 선과 인을 실천하지 못해 하늘의 견책을 받은 탓이라는 것이다. (*윤선도는 윤의중의 큰아들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서, 윤유기에게 입적되어 종손의 계보를 이었다. 윤선도 대에 이르면 남자는 전멸하다시피 했는데, 윤선도의 형 윤선언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 윤효정이 7형제, 윤구가 6형제였던 것에 비하면 크게 쇠락했다고 볼 수 있다.
윤선도는 여덟 가지 사항을 전하며 “우리 집안의 흥망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려 있으니, 절대로 등한히 보지 말 것이요, 손자들로 하여금 가슴에 새겨서 읽고 잊지 말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주요 항목을 살펴보면, 우선 첫째 “의복과 안마(鞍馬) 등 갖가지 몸을 봉양하는 것들은 모두 습관을 고치고 폐단을 줄여야 마땅하다. 음식은 배고픔을 면할 만큼만 취하고, 의복은 몸을 가릴 만큼만 취하고 말은 보행을 대체할 용도로만 취하고 안장은 견고한 것을 취하고 기물(器物)은 쓰기에 알맞은 것을 취해야 한다.”
부의 번영 위해선 ‘아랫사람 행복’이 먼저
다음으로 둘째 항목, 노비의 신공(身貢, 외거노비가 노동력 대신 주인에게 바치는 세금)을 일정하게 하되 “가난한 사람은 감경해주고 넉넉한 사람에게서도 더는 받지 말라”는 말과 일곱째 항목 “종들을 곁꾼으로 부릴 경우, 모두 시세에 맞게 품삯을 지급하라”라는 말도 유념할 만하다. 모두 아랫사람의 부담을 덜어주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라는 뜻이다. 윗사람이 욕심을 내어 이익을 독점하려 하지 말고 아랫사람에게 나눠줌으로써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늘날에 비유하면 CEO 혼자서 잘 났다고 회사의 수익이 늘어나진 않는다. 직원이 행복해야 회사도 행복하다는 말처럼 이익을 직원들에게 배분하고 직원들이 워라밸을 이루며 즐겁게 일할 수 있어야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는 법이다. 윤선도는 이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손들이 그의 당부를 잘 따른 덕분에 해남 윤씨 가문의 번영은 그 후로도 한동안 이어지게 된다. 윤두서(윤선도의 증손)와 같은 거장을 탄생시킨 것도 이러한 역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 김준태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컬럼니스트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교보증권, 대한민국 1호 증권사 창립 75주년…“변화·혁신 내재화 해야”
2"2800세대 대단지에 '매매물량 1200개'"...'인천 송도'에 무슨 일?
3산업은행·경찰청, 순직경찰관 유가족·공상 퇴직경찰관 지원 업무협약
4‘미국필라델피아AI반도체나스닥 ETF’ 26일 상장…“세계 최초 ASOX 지수 추종”
5케이뱅크 임직원, 연말 맞아 연탄·난방유 등 나눔 봉사
6국민이주㈜, 시중 4대 은행 협력으로 릴레이 미국이민 프로그램 미국투자이민 세미나 개최
7“아름다운 겨울 만끽”…홀리데이 시즌 기념 ’샤넬 윈터 테일 홀리데이 아이스링크’ 오픈
8신한은행, 강남구와 ‘땡겨요’ 업무협약 체결
9"거액 치료비 선납했는데 의료기관 폐업"…소비자 주의 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