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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스테이지] 뮤지컬 ‘엑스칼리버’가 거대한 바위를 고집하는 까닭

더욱 거대해진 바위, 스케일에 대한 제작자의 남다른 집착
스토리 태세 전환에 새삼 달라진 관객의 힘 실감

 
 
'2021 엑스칼리버' [사진 EMK]
 
만들어 놓은 무대 세트가 너무 커서 극장에 못 들어가는 상황이라고 치자. 내가 뮤지컬 제작자라면 세트 사이즈를 좀 줄이지 않을까. 
 
뮤지컬 ‘엑스칼리버’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다. 2019년 초연 때 국내 최대 규모 공연장인 세종문화회관 무대를 채웠던 거대한 바위가 더 커졌다. 한 덩어리였던 바위가 이번 시즌 공연장인 블루스퀘어 입구를 통과하지 못하자, 5개의 바위를 새로 제작해 무대 위에서 합쳐 더욱 거대해진 것이다. 바위에 꽂혀 있는 영검 ‘엑스칼리버’를 뽑는 자가 왕이 될 운명을 타고 났다는 아더왕 이야기인지라 바위의 존재감이 중요하긴 하지만, 스케일에 대한 제작자의 남다른 집착이 엿보인다.
 
‘엑스칼리버’는 ‘마타하리’ ‘웃는 남자’ 등으로 한국 창작뮤지컬의 역사를 새로 쓴 EMK뮤지컬컴퍼니의 3번째 오리지널 뮤지컬로, 초연 당시 70여명의 출연진과 100억대 제작비로 이미 ‘스케일의 끝판왕’에 등극한 바 있다. 세트 규모를 줄이고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무대를 심플하게 만드는 최근 공연계 트렌드에 정색하고 반대하는 엄홍현 EMK 대표는 ‘돈 아끼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최고의 무대로 승부한다’는 철학을 이번 시즌에도 고수했다.
 
사실 완전한 창작은 아니다. 2013년 뉴욕에서 개발돼 2014년 스위스에서 ‘아더 엑스칼리버’라는 타이틀로 공연된 작품이지만, EMK가 ‘인핸스먼트’ 계약을 통해 월드와이드 판권을 확보하고 규모를 키워 재창작했다. 비영리 극단이 소규모로 개발한 작품을 상업 프로덕션이 사서 대규모로 키우는 게 브로드웨이에서는 일반적인 뮤지컬 제작방식이고, 국내에서도 창작산실 등 창작자 인큐베이팅 시스템을 통해 개발된 작품이 상업 프로덕션으로 옮겨가는 패턴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그런데 왜 아더왕인가. ‘엑스칼리버’는 ‘단 하나의 왕’의 운명을 타고난 아더가 내면의 악령을 물리치고 진정한 리더로 우뚝 서는 전형적인 영웅서사다. 일상에서 벗어나고파 극장을 찾는 관객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에 감동과 희망을 주는 영웅 판타지만큼 매력적인 소재도 없다. ‘반지의 제왕’ 등 서양 판타지 문학의 원조격인 아더왕 전설이 수세기 동안 원탁의 기사, 기네비어와 랜슬럿의 러브스토리 등 다양한 해석으로 변주되어 온 이유다. 유럽 뮤지컬 라이선스로 내공을 쌓아온 EMK가 영미권 진출을 목표로 만든 오리지널 작품에 안성맞춤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남의 나라 이야기를 어떻게 요리해야 본고장에서 승부할 수 있을까. EMK는 대세를 거스르는 ‘스케일의 미학’에 진심을 쏟았다. 울창한 실제 숲을 옮겨다놓은 듯 공간감 넘치는 세트와 엑스칼리버가 꽂혀있는 거대한 바위산이 시선을 압도하고, 세계적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도 무대 스케일에 뒤지지 않는 웅장하고 호소력 짙은 넘버들을 쏟아낸다.
  
'2021 엑스칼리버' [사진 EMK]
 
게다가 이번 시즌엔 신곡을 5곡이나 더해 다채로운 넘버들로 빈틈없이 무대를 채웠다.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캐릭터와 스토리다. 초연 당시 최고 스타 김준수로 대표되는 아더왕 캐릭터가 순수한 청년과 난폭한 왕의 면모를 오락가락하는 모습이 공감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수용해, 아더왕이 분노가 흐르는 용의 피를 타고 났다는 전사를 더욱 부각시킨 것. 서구 판타지물에서 인간을 무자비하게 살상하는 악마와 동급인 ‘드래곤’이 우리에게는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상서로운 존재인 만큼, ‘용의 피’에 대한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했던 것이다.  
 
압권은 기네비어 캐릭터의 변화다. 로빈훗처럼 활을 잘 쏘는 여전사로 등장했다가 삼각 러브스토리를 겪고 수녀가 되어 속세를 떠난다는 초연의 결말에 구시대적 설정이라는 비난이 집중되자 180도 태세 전환을 했다. 기네비어가 마지막까지 뒤에서 활을 쏘며 전쟁을 돕고, 아더를 지킬 전사를 키우겠다며 떠나는 엔딩에 몇 년 전 진보적 여성서사로 주목받았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떠오를 정도였다. 뮤지컬이란 게 시즌을 거듭하며 조금씩 완성도를 더하게 마련이지만, 이 정도의 태세 전환은 드문 경우다. 새삼 달라진 관객의 힘을 실감했다 할까.  
 
'2021 엑스칼리버' [사진 EMK]
 
손바닥 안에서 모든 욕망이 해결되는 지금 시대에 공연을 보러 움직인다는 건 그 자체로 특별한 행위가 됐다. 3시간 가까이 웅장한 비주얼 위에 김준수를 비롯해 손준호, 장은아 등 최고의 배우들이 완벽한 가창력으로 몰아치는 무대를 다 보고나니, 마치 명절 연휴에 ‘벤허’나 ‘십계’처럼 잘 만든 고전 영화 한 편을 본 듯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무게라는 걸 느끼기 힘들어진 디지털 세상에서 이 무대가 왜 이렇게 무거운 바위를 고집한 건지, 저절로 설득이 됐다.

유주현 기자 중앙 컬처&라이프스타일 랩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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