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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 원조 데스게임 ‘배틀로얄’과 치명적 차이점 [장근영 팝콘 심리학]

현실과 게임장 속 세상 중에서 더 가혹한 곳은 ‘현실’
스스로 게임장 선택한 참가자 456명

 
 
(좌)배틀로얄 [중앙포토], (우)오징어게임 [사진 넷플릭스]
 
폴란드에서 태어나 베를린 대학에서 공부하고 미국에서 활동했던 쿠르트 레빈(Kurt Lewin)은 산업조직심리학이라는 분야를 거의 직접 만들어낸 선구자다. 지금도 많은 직장과 훈련연수원에서 사용하는 브레인스토밍 기법, 감수성 훈련이나 T그룹 훈련 기법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위상심리학’(Topological psychology)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이 이론을 요약하면 어떤 사람을 둘러싼 환경 속의 밀고 당기는 힘의 구조만 알면 그 사람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성을 지닌 쇠구슬이고 그 인간의 주변에는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자석들이 널려있는 셈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장면. [사진 화면캡처]
 
우리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향해서 움직인다. 반면에 싫어하는 대상으로부터는 멀어지려고 한다. 끌어당기면서 동시에 밀어내는 존재도 있다. 인간은 결국 그 밀고 당기는 힘의 크기와 방향의 합에 따라서 움직이는 존재다. 예를 들어, 평소의 나는 TV드라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드라마는 나를 약하게 끌어당기는 존재다. 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평소에는 시큰둥하던 TV 드라마가 갑자기 엄청나게 재미있게 느껴진다. 미는 힘 덕분에 내 마음이 반대편으로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힘의 방향이 정반대로 작동할 때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갈등을 경험한다. 우리가 맛있는 디저트를 앞에 두고 느끼는 갈등의 본질은 식욕이라는 끌어당기는 힘과 체중 증가에 대한 염려라는 밀어내는 힘의 충돌이다. 실제 우리 삶은 이보다 더 복잡한 갈등으로 가득하다. 싫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일들, 하고 싶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한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온라인 스트리밍 중인 한국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말 그대로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중이다. 이 드라마가 지금까지 나온 데스게임 장르물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1화와 2화다. 기존 데스게임에서 참여자들을 게임에 묶어두는 것은 강제력이다. 참여자들은 원해서 참여한 것도 아니고 싫다고 게임을 중단할 수도 없다. 데스게임의 원조에 해당하는 ‘배틀로얄’이나 ‘헝거게임’에서는 공권력이, ‘아리스 인 보더랜드’같은 드라마에서는 보다 초월적인 힘이 주인공들로 하여금 게임을 강요한다.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하는 오징어게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장면. [사진 넷플릭스코리아
 
그들은 게임을 포기하면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다르다. 이 게임 운영자는 참여자들에게 선택할 기회를 부여한다. 참가자 과반수가 동의하면 게임을 중단하고 모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첫 번째 게임을 마친 참가자들이 투표를 통해 게임 중단을 결정하자 정말로 아무 조건 없이 게임에서 풀려난다. 게임 운영자의 약속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 대다수는 다시 게임장으로 돌아온다.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게임이 좋아서, 혹은 게임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게임 밖보다는 차라리 이 게임이 낫기 때문이다.
 
레빈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참여자들의 행동은 게임장 밖의 현실과 게임장 속의 세상 중에서 어느 쪽의 미는 힘이 더 강한지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이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게임을 선택했다는 건 게임 밖의 현실이 게임 속의 무자비한 규칙보다 더 가혹함을 의미한다. 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부채, 벗어날 수 없는 각종 덫에 빠져 허우적대는 것 보다는 이 유년기의 게임장에서 목숨을 거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보면 이 드라마 속 게임장의 보안이 어처구니없이 허술한 이유도 납득이 된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탈출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을 둘러싼 장벽은 물리적인 장벽이 아니라 심리적인 장벽이다. 이들은 게임에 이겨 456억원 상금을 받아서 나가거나, 여기서 죽거나를 선택하도록 세상으로부터 밀려난 사람들이다. 더구나 그들에게 주어진 게임들이 어린 시절 해봤던 것들이다. 정신없이 변해가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에 던져져 생전 처음 접하는 자본주의 게임에서 어이없이 패배한 경험이 있는 한국의 시청자들이라면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의 선택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으리라. 험악한 바깥세상 게임보다는 차라리 그 옛날 내가 한 번은 이겨본 게임에서 내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 거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장면. [사진 넷플릭스코리아
 

치열한 경쟁, 패자에 대한 배려 없는 전 세계 현실  

2019년 WHO에서 발표한 국가별 자살통계는 통계에서 한국의 자살율은 러시아와 남아프리카 다음으로 높았다. 심지어 여성의 자살율은 비교국가 중에서 가장 높았다. 한국은 범죄 사망율은 매우 낮은 대신 스스로 죽는 사람은 많은 나라다. 그나마 이는 코로나 이전까지의 통계다. 최근 2년간 여성 자살율은 더 높아졌다는 조사결과들을 고려하면 지금은 이보다 더 심각할 수도 있다. 넷플릭스에서 이 드라마에 투자한 금액이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한 에피소드 제작에 투입되는 수준에 불과하다는 사실 역시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은 이제 UN이 공인한 선진국이다. 우리나라 구성원들의 교육 수준,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문화와 사회의 성숙도는 실제로 다른 선진국들에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귀한 사람의 값어치는 선진국만큼 인정받지 못한다. 그 덕분에 선진국보다 훨씬 싼 가격에 선진국과 경쟁할 수 있는 품질의 콘텐트를 생산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은 이런 현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드라마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전 세계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현실이 단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임을 의미한다. 이 드라마의 소재나 그 드라마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창의력은 모두 한국이라서 가능한 것이었다. 치열한 경쟁, 패자에 대한 배려 없는 가혹한 규칙들이 극단적인 격차를 만들어내는 현실, 그 현실을 바탕으로 잔혹한 게임보다 더 잔혹한 세상 이야기를 전달하는 드라마가 만들어져 전 세계를 매혹시켰다.  
 
질문을 하게 된다. 지금과 같은 여건 속에서 한국 문화의 창의성과 생산성은 과연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까. 가혹한 경쟁으로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넣지 않고서는 이렇게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없는 걸까. 
 
※ 필자는 심리학 박사이자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다. 연세대에서 발달심리학으로 석사를, 온라인게임 유저 한·일 비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험인간] [심리학오디세이] [팝콘심리학] [무심한 고양이와 소심한 심리학자] 등을 썼고 [심리원리] [시간의 심리학] [인간 그 속기 쉬운 동물] 등을 번역했다.

장근영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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