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조선인 최초 백화점 설립한 '돈키호테' 최남 [김준태 조선의 부자들⑯]

1931년 종로에 4층 신축건물 '동아백화점' 개점
'정찰제' '균일가' 실험…시대를 앞선 경영인

 
 
화신백화점 동관. 1932년 최남이 세운 동아백화점은 화신백화점에 흡수돼 화신백화점 동관이 됐다. [사진 e영상역사관]
 
 “이세상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딨어?”라는 노래 가사가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영감’이 기차표값을 깎아달라며 실랑이 벌이는 대목이다. 요즘은 전통시장을 제외한다면 어느 곳이나 정찰제에 따라 물건을 사고판다. 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정찰제는 매우 낯선 개념이었다. 소비자와 판매자가 흥정하고 에누리하는 것은 당연한 풍경이었다. 이러한 조선에 본격적으로 정찰제를 도입한 인물이 나왔으니, 바로 이번 화에서 소개할 최남(崔楠, 1865~미상)이다.
 
1865년(고종 2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남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갖은 고생을 하다 우연한 기회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광산(鑛山)학교를 졸업했다. 귀국 후 광산회사와 상업은행에 근무한 그는 상업에 관심을 두고 오늘날 종로 2가 인사동 입구 부근에 ‘덕원(德元)상점’이라는 잡화점을 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이 운영하는 상점들은 상품을 일본의 제조공장에서 직접 수입하지 못하고 일본인 도매상에서 공급받아야 했다. 가뜩이나 서비스나 경영기법 면에서 밀리는 상황에서 가격 경쟁력도 부족하니 일본 상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미모의 여직원 전면 배치, 화제의 ‘동아백화점’ 개점

최남은 이처럼 불리한 여건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는 일본인 상점에서 경험을 쌓은 조선인 점원을 스카웃하고, 세련된 진열로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오사카에 상주 직원을 보내 직수입 통로를 열었다. 덕분에 덕원 상점의 매출은 가파르게 상승하게 된다. 그런데 최남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제도였던 정찰제를 시행한 것이다. 좋은 상품을 싼 가격에 팔고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로, 소비자의 신뢰를 얻게 된다.
 
이후 최남은 1919년 동아부인상회를 인수하는 한편, 대구, 광주, 순천, 목포, 전주 등 전국 각지로 지점을 확장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어 1931년에는 종로에 세워진 4층 신축건물을 통째로 전세 내어 동아백화점(東亞百貨店)을 개점하였다. 조선인이 경영하는 최초의 백화점이었다. 하지만 백화점 사업은 만만하지 않았다.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쓰코시백화점(현재 신세계백화점 본점 자리), 조지야백화점(현재 명동 롯데영플라자 자리), 미나카이백화점, 히라다백화점과 비교할 때 규모나 자본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고, 운영 노하우나 서비스 품질 면에서도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남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쓰코시백화점의 일본인 직원 와타나베를 영입하여 관리를 맡기고, 직수입망을 확보하였으며, 200여 명의 직원을 선발하여 철저히 교육함으로써 서비스 마인드로 무장시켰다. 이때 200명 중 70~80명을 미모의 여직원으로 선발하였는데, 이들을 매장에 전면 배치함으로써 큰 화제를 모았다. 여직원을 보겠다는 손님들로 문전성시를 이룬 것이다. 문구 판매대의 여직원과 동경 유학생이 결혼하는 등 여러 로맨스를 낳기도 했다. 한데 이러한 방식만으로는 자본의 열세를 이겨낼 수 없었던 것 같다. 홍보마케팅으로 손님이 늘었는지는 몰라도 매출은 지지부진했고, 설상가상으로 채용을 담당한 임원이 여직원들을 농락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구설수에 휩싸였다.
 

조선 최초 ‘십전균일점’ 개설…美 십센트샵 벤치마킹  

그의 새로운 시도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최남은 ‘십전균일점(十錢均一店)’을 개설했다. 요즘의 원달러샵, 백엔샵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는 당시 미국의 십센트샵을 벤치마킹하여 모든 물건을 10전 균일가에 파는 매장을 설치했다. 조선상업계 최초의 일로, 매우 혁신적인 시도라 할 만하다. 최남의 말을 보자. “요새 젊은이들은 돈이 적게 들고 맵시는 잘 나는 물품을 찾으니까 포마드, 크림, 백분 등 화장품을 적당하게 준비하여 놓고 팔면 인기를 끌 것이라고 본다.(1935년 잡지 [삼천리])” 지금 젊은이들이 가성비를 따지며 다이소의 화장품을 쓰는 것과 같은 맥락인데, 최남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상점이 성공하려면 양질의 저가 상품이, 대량으로, 신속하게 공급되어야 한다. 생산공장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야 하는 것인데, 최남 역시 십전균일점의 성공 여부는 “조선에 공장이 어서 지어지느냐에 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의 제조업 공장은 지지부진하였다. 그렇다고 일본에서 수입해온다면 물류비용이 많이 들어서 저가 판매가 불가능해진다. 그뿐만이 아니다. 조선의 상황에서 ‘십전균일’은 소비자에게 생소한 방식이었다. 박리다매(薄利多賣)란 개념도 낯설었다. 왜 이런 식으로 파는 건지, 혹시라도 속여 파는 것은 아닌지 이해하지 못하니, 이 취지를 알리고 설득하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다. 요컨대 십전균일점은 조선에서 시행하기에는 시기상조였던 것이다. 최남은 여기서도 큰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1년 후인 1932년 7월, 최남은 동아백화점을 화신백화점의 박흥식에게 매도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7만원 넘는 손실이 발생하면서 최대투자자가 발을 뺐다는 설, 박흥식이 권력을 동원하여 압력을 넣었다는 설, 일본상인에 대항하기 위해 조선 상인끼리 힘을 합쳤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는데, 확인된 바는 없다. 어쨌든 최남이 백화점을 경영하는 데 힘에 부쳤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백화점을 양도한 이후에도 최남의 도전은 멈추지 않았다. 동순덕(東順德)이라는 주단 포목상을 설립하여 큰 돈을 벌었고, 지금까지도 이름이 남아있는 종로의 국일관을 서울 제일의 한정식집이자 요정으로 키워냈다. 최남은 1934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기붕을 지배인으로 고용하였는데, 알다시피 이기붕은 해방 후 자유당 정권의 2인자로서 국회의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독재와 부정선거로 인해 이미지가 땅에 떨어져 있지만, 노회한 이승만의 신임을 받았을 정도로 능력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기붕을 적절히 활용함으로써 국일관은 명성을 날리게 된다.
 
한데 1930년대 후반부터 최남의 행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광복 후, 상업은행의 이사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근거는 없다. 근대 이후, 나름의 지명도를 갖춘 인물이 이렇게 행적이 묘연한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이상으로 최남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는 시대를 앞서간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남들이 상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세상이 그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좌절을 겪어야 했지만, 한계를 극복하려 했던 저 창조적인 노력만큼은 꼭 기억할 필요가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김준태 칼럼니스트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中서 신종 코로나 또 발견?...관련주는 벌써부터 들썩

2'무례·혐오' 포털 뉴스 댓글에 몰려...유튜브보다 많아

3 미-러 대표단, 2주 내 우크라 종전 협상 예정

4일본 '다케시마의 날' 행사 열어...정부 "즉각 폐지 엄중 촉구"

5뉴욕 경매시장에 등장한 조선 달항아리...추정가 36억원

6"美 생산 아니면 관세"...트럼프, 일라이 릴리·화이자 등 압박

7AI에 돈 쏟는 중국 IT 공룡들...알리바바도 투자 동참

8무궁무진한 AI, K콘텐츠와 만난다면

9산케이 “韓, 독도 불법 점거...국익 해칠 뿐” 다케시마의 날 잇단 도발

실시간 뉴스

1中서 신종 코로나 또 발견?...관련주는 벌써부터 들썩

2'무례·혐오' 포털 뉴스 댓글에 몰려...유튜브보다 많아

3 미-러 대표단, 2주 내 우크라 종전 협상 예정

4일본 '다케시마의 날' 행사 열어...정부 "즉각 폐지 엄중 촉구"

5뉴욕 경매시장에 등장한 조선 달항아리...추정가 36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