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라노 거리서 누리던 럭셔리 경험, 온라인에서 드려요"
[김홍일의 혁신우혁신⑭] 최형록 발란 대표
럭셔리 유통의 시작점인 해외 부티크 계약 통해 제품 공급
합리적 소비로 명품 들어도 쿨하고 싶은 MZ세대 공략 성공
해외 부티크 디지털 혁신 지원 경험으로 글로벌 공략 준비
“몇 년 만에 연매출 수백억 신화”, “고졸이 대박집 사장이 되기까지”, “유명 대기업에 수백억 투자받은 비결”, “스타트업, 나처럼 하면 성공한다”…. 창업 관련 기사를 수놓는 미디어의 헤드라인이다. 가시밭길을 밟아온 창업가의 역경 드라마를 소개하고,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장밋빛 전망을 늘어놓는 식이다. 스타트업의 숱한 곡절을 생생하게 목격한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전 디캠프 센터장)는 창업 시장이 일률적으로만 묘사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창업가의 성공에 손뼉만 치고 끝낼 게 아니라, 그들의 혁신 비법을 우리 사회가 함께 공유하자.” [이코노미스트]가 ‘김홍일의 혁신우혁신’을 연재하는 이유다. 창업 요람의 리더 역할을 하던 VC 대표가 스타트업 CEO를 만나 진중한 질문부터 가볍고 짓궂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침체에 빠진 한국 경제를 살릴 새 성장 동력을 찾을지도 모를 일이라서다. 열네 번째로 만난 창업자는 발란의 최형록 대표였다. [편집자]
한국은 럭셔리 브랜드의 격전지가 된 지 오래다. 시장조사업체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명품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 약 16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전년 대비 4.6% 성장한 것으로, 한국 럭셔리 시장은 전 세계에서도 7번째로 규모가 컸다.
과거 럭셔리는 일부 부자들만의 전유물로 소비됐지만 지금은 다르다. MZ세대가 럭셔리 시장의 주 소비자로 등극했다. 이들은 디지털 환경에 익숙하고, 최신 트렌드에 민감한 동시에 남과는 차별화한 자신만의 독특한 경험을 추구하고 있다. MZ세대의 새 소비 형태는 콧대 높은 럭셔리의 유통 시스템마저 변화시키고 있다.
진입 문턱이 높기로 유명한 럭셔리 산업에 온라인 열풍이 불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발란은 그중 눈에 띄는 럭셔리 이커머스 사업자다. 모바일 앱과 PC 홈페이지를 통해 명품을 소비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배우 김혜수를 광고모델로 발탁하면서 대중에 이름을 널리 알린 발란은 업계의 선두 사업자로 꼽힌다. 지난해 말 325억원 규모의 시리즈B 투자 유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발란의 투자자 중엔 국내 이커머스 업계 1위 사업자인 네이버도 있다.
여러 경쟁 플랫폼이 있지만, 발란은 이탈리아, 파리 등 현지 부티크 제품을 유통한다는 강점으로 내세워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의 작은 기업임에도 글로벌 럭셔리 시장의 핵심 유통처인 부티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던 건 발란이 부티크에 고객 구매 데이터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형록 발란 대표는 “그런 점에서 발란은 단순한 이커머스 기업이 아닌 IT 데이터 기업”이라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와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가 역삼동의 발란 사무실에서 최형록 대표를 만났다. 김홍일 대표는 럭셔리를 유별나게 사랑하는 한국 시장의 특성을 물었다.
김홍일 케이유니콘인베스트먼트 대표(김홍일 대표) : 럭셔리를 그저 과시욕으로 치부하는 독자도 많을 겁니다. 발란이 생각하는 럭셔리, 명품은 무엇입니까.
최형록 발란 대표(최형록 대표) : 입을 것과 탈 것, 먹을 것을 아우르는 라이프스타일의 총칭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어떤 형태의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는 거죠.
김홍일 대표 : 그중에서도 발란은 패션 브랜드를 다루고 있군요.
최형록 대표 : 소비자가 제품에 깃든 브랜드 가치와 철학을 효과적으로 느낄 수 있거든요. 항상 몸에 걸치고 있는 데다 가격 면에서도 다른 명품과 비교하면 접근하기가 쉽잖아요.
김홍일 대표 : 발란은 그 진입 문턱을 더 낮추고 있습니다. 발란에선 할인율이 상당한 제품을 엄지손가락 몇 번을 움직이면 살 수 있으니까요. ‘명품을 왜 백화점에서 사’라고 되묻는 광고 문구는 꽤 도발적이었습니다.
최형록 대표 : 그 질문에서 발란이 출발했습니다. 저 역시 럭셔리를 좋아하던 MZ세대였는데, 매번 백화점을 가는 게 번거로웠거든요. 모든 걸 온라인에서 할 수 있는 세상으로 바뀌었잖아요.
변화 더뎠던 럭셔리 산업에 이커머스 플랫폼 유행
김홍일 대표 : 명품 산업이 온라인 판매에 적극 대응하지 않은데 에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오프라인을 통해 고객에게 특별한 경험을 전달하고 싶었던 거겠죠.
최형록 대표 : 이젠 합리성을 추구하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됐습니다. 럭셔리를 더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한 걸 자랑하는 젊은 세대가 많아졌죠. 젊은층은 명품을 들어도 쿨하게 보이길 원합니다.
김홍일 대표 : 명품이 점점 대중과 가까워지는군요.
최형록 대표 : 거리에 나가면 3초마다 한 번씩 볼 수 있다며 ‘3초백’이란 별명이 붙은 게 꽤 오래된 일이죠. 럭셔리는 이미 모두의 럭셔리가 됐습니다.
김홍일 대표 : 그렇다면 역설적으로 럭셔리 소비를 통해 남들과 차별화하는 게 어려워진 건 아닐까요.
최형록 대표 : 제품을 순전히 가격으로 구별할 때엔 그렇죠. 지금은 다릅니다. 남들이 잘 모르는 브랜드더라도 헤리티지가 매력적이면 과감하게 소비하는 패턴이 늘어났습니다. 그냥 진짜 나다움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죠. 럭셔리 이커머스가 소비자 사이에서 유행하게 된 건 그때부터일 겁니다.
김홍일 대표 : 소비패턴이 바뀌면서 유통 과정도 바뀌기 시작한 거군요.
최형록 대표 : 맞습니다. 얼마에 파느냐에서 어떻게 파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됐죠. 럭셔리가 대중화한다고 해서 모든 이들이 자신의 한도를 넘어서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가령 이런 식이에요. 50만원짜리 럭셔리 맨투맨 티셔츠를 사고 몇 달 입은 다음에 40만원에 중고시장에 걸어놓을 수 있거든요. 내가 소비한 건 10만원뿐인데, 럭셔리의 경험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시대죠.
대중이 럭셔리를 경험하는 방식이 바뀐 건 발란의 수치로도 잘 드러난다. 2019년 256억원에 불과했던 발란의 거래액은 지난해 3150억원으로 10배 넘게 성장했다. 해외 부티크 업체, 국내 파트너사 등 1400여 개 공급사로부터 약 8000여 개의 럭셔리 브랜드를 다루고 있다. 발란에 등록된 개별 상품은 140만개 이상이다. 앱 누적 다운로드 수는 280만 회를 넘었다.
김홍일 대표 : 그럼에도 일반 대중의 시선에선 미심쩍은 게 있습니다. 온라인에서 값싸게 파는 걸 보면, 가품이 아니냐하는 얘기요.
최형록 대표 : 일단 발란 플랫폼에서 가품이 유통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발란은 유럽 각지의 정품이 인증된 부티크와 직거래, 철저한 검증을 통해 정품이 인증된 국내 파트너사와 함께 하고 있으니까요.
김홍일 대표 : 철 지난 상품을 파는 게 아니냐는 의심도 있어요.
최형록 대표 : 온라인을 통해 명품을 파는 채널이 최근에 등장한 게 아닙니다. 오픈마켓 형식으로 예전부터 있었는데, 그들은 그랬습니다. 아웃렛 상품이나 브랜드에서 팔다 남은 상품을 싸게 떼어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죠. 그런데 그들 중 대중에게 어필할 만큼 성장한 곳이 있었나요. 소비자를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태됐죠.
김홍일 대표 : 발란은 다르다는 얘기군요.
최형록 대표 : 발란은 오히려 백화점보다 한두 달 정도 신상 입고 속도가 빠릅니다.
김홍일 대표 :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최형록 대표 : 발란은 고객에게 ‘최적화한 유통 시스템으로 밀라노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동일한 상품을 3일 만에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발란이 계약을 맺은 부티크는 명품 브랜드의 프리오더 권한을 갖고 있죠. 럭셔리 유통의 시작점을 담당하는 전문점이 바로 부티크입니다. 발란은 부티크에 입고된 상품을 실시간으로 연동하기 때문에 민첩할 수밖에 없죠. 반면 백화점은 제품을 주문하고 생산하고, 바다 건너 한국에 도착해서 또 매장에 전시할 때까지 시간이 제법 걸립니다.
김홍일 대표 : 신상 입고 속도가 빠르고 가격도 합리적입니다. 발란이 금세 시장을 잠식할 것 같지만, 아직은 오프라인 럭셔리 소비 시장이 더 큰데요. 명품 쇼핑의 비용 안에는 매장의 고급스럽고 안락한 분위기를 만끽하는 것, 정중한 서비스를 받는 걸 포함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최형록 대표 : 온라인을 통해서 백화점 소비 경험을 뛰어넘는 게 발란의 목표입니다. 현재 발란은 리얼 패킹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국내 물류 센터에 도착한 상품의 검수 과정을 영상으로 촬영해 고객에게 문자로 전송하는 겁니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소비자 반응이 긍정적이었습니다. 차별화한 서비스라는 거죠.
김홍일 대표 : 오프라인을 뛰어넘는 경험을 제공하고 난 뒤엔 무엇이 있죠. 발란의 다음 전략은 무엇입니까.
최형록 대표 : 처음 언급했듯, 럭셔리는 ‘나다움’을 드러내는 라이프스타일의 총칭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객이 발란을 켰을 때 가장 나다울 수 있는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싶습니다. 이커머스를 고도화하면서 빅데이터와 각종 기술을 섭렵하고 있는 이유죠. 단순히 몇 천원 더 싼 제품을 찾아내 고객에게 전달하는 게 중요한 건 아닌 것 같아요. 고객의 삶이 진짜 럭셔리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김홍일 대표는 최형록 대표에게 “최애 럭셔리 제품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최형록 대표가 가죽 가방을 꺼내면서 말했다. “이게 라이터 브랜드로 유명한 듀퐁에서 만든 서류가방이에요. 2014년에 순전히 제가 번 돈으로 처음 샀던 명품입니다. 8년이나 썼는데도 튼튼한 것 보세요. 발란을 창업했을 때도 이 가방을 들고 유럽 현지 부티크를 설득했어요. IR을 할 때도 이 가방과 함께였고요. 물론 제 옷장엔 더 비싸고 값나가는 제품이 더 있지만, 아마 이 가방만큼은 결코 팔지 않을 겁니다. 제 삶과 발란이 묻어있으니까요.”
기자가 본 최형록 대표
럭셔리의 조건으론 족보가 확실해야 할 것 같았는데,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럭셔리 브랜드가 부쩍 늘어났다. 패션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업에서 명품과 프리미엄을 앞세워 고객을 손짓하는 시대다. 진짜 럭셔리가 뭔지 헷갈렸다.
그래서 최형록 대표의 “명품은 나다움을 드러내는 것”이란 답변은 명쾌하게 들렸다. 내가 누군지를 드러내는 일은 나에게 먼저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거나 과시하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를 들여다봐야 한다. 럭셔리는 소비를 계급으로 나누는 일인 줄 알았는데, 취향의 문제였다. 럭셔리의 콧대가 예전보다 낮아 보였다.
최형록 발란 대표로부터 받은 명함 뒤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BE THE ONE, OR NOTHING.” ‘모 아니면 도’로 읽히는 심상치 않은 뜻을 보고 있자 최형록 대표가 말했다.
“발란 말고도 럭셔리 플랫폼이 많습니다. 앞으로 더 많아질 거고요. 그런데 아직까진 럭셔리 이커머스 하면 고객 머릿속에 확실히 떠오르는 플랫폼이 없잖아요. 발란은 럭셔리 이커머스의 대명사로 성장하고 싶습니다. 럭셔리하면 ‘아, 발란’이 되는 거죠. 그렇게 되는 게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란 각오로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발란은 이제 또 하나의 하나의 분기점을 맞는다. 발란 사무실엔 여러 회의실이 있고, 그 앞엔 밀라노, 뉴욕 같은 해외 도시 이름을 붙여 놨다. 발란의 특별한 경험을 한국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선보이겠다는 최 대표의 의지가 엿보였다. 한국 플랫폼이 세계 시장을 호령하는 미래를 상상하는 건 어렵지만, 최 대표가 정의한 ‘나다움을 드러내는 럭셔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통할 가능성이 크다. 어떤 경험이든 ‘고객 중심’으로 돌려놓는 걸 마다할 사람은 없다.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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