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경학적 파편화와 저금리 자금 시대의 종언 [최배근 이게 경제다]
우크라이나 전쟁발 경제위기는 ‘지경학적 파편화’가 가져온 충격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처럼 저금리 자금 투입으로 해결 안돼
단기적·구조적 해결 어려워...세계 경제의 장기침체 도래를 의미
21세기 들어 겪는 충격들 대부분은 기존의 지적 체계나 경험들로 예측하기 어렵거나 예측하더라도 쉽게 혹은 단기적으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처음’형 충격들이다. 예를 들어, 10억 달러 이상 피해를 발생시킨 기후변화 재난은 1980년대에는 연평균 2.9회와 재난 당 178억 달러의 피해 및 287명의 사망자를 유발했지만, 2010년대에는 연평균 11.9회와 재난 당 810억 달러의 피해 및 522명의 사망자를 낳고 있듯이 기후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기후변화는 산업 문명의 산물인 반면, 인류 세계의 지적 체계나 시스템, 제도 등은 산업 문명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가 겪는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역시 자연생태계 파괴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자연을 인간의 이용(착취) 대상으로 보는 인간 중심주의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백신 개발 방식이 해결책이 되지 않는 이유이다. 2007~08년 금융위기 역시 2008년 가을 미국 하원에서 앨런 그린스펀이 “지난 수십년간 지배해온 현대 리스크 관리 패러다임의 전체 지적 체계가 붕괴하였음을 보여주었다”고 진술하였듯이 (기존의 지적 체계로 예측할 수 없었던 위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다.
기존의 충격이나 위기와 달리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나 위기는 규모나 범위가 세계적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는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 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발생하는 충격임을 의미한다. 반면 산업 문명을 만든 지적 체계는 세상의 모든 것은 분리되었다고 보거나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결과 (중심부는) 충격의 전염을 차단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세계관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오늘날 세계는 (경제적으로) 전례가 없을 정도의 깊이와 복잡성으로 상호연결(의존)되어 있고, (기술적으로도) 모든 것이 연결된 세상이기에 충격의 전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나 코로나 팬데믹 등의 새로운 처음형 충격들은 (특히 중심국에서는) 저금리 자금(easy money) 투입으로 해결하였다. 예를 들어, GDP 대비 연준의 자산(부채) 비중은 금융위기 전 6.1%에서 금융위기 수습 과정에서 25.3%까지 증가하였고, 팬데믹 대응 과정에서도 19.4%에서 38.1%로 증가하였다. 유럽중앙은행(ECB)의 자산(부채)은 GDP 대비 유로존 위기 대응 전후 15.4%에서 31.8%로 증가하였고, 다시 (환율을 통한) 경기부양을 위해 40.0%까지 증대시켰고, 팬데믹 전후로는 40%에서 약 70%까지 증대시켰다. 천문학적인 저금리 자금 투입이 없었으면 충격들의 수습은 불가능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그 결과 정부채무 급증과 자산가격의 과도한 인플레를 초래하였다. 금융위기 전 58%도 되지 않았던 미국 연방정부 채무는 지난해에는 약 118%로 두 배 이상 증가했고, 유로존 평균 정부채무도 66%에서 96%로 증가하였다. 그럼에도 달러와 유로 등은 기축통화의 힘과 저금리(제로금리)로 정부채무가 당장 문제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산가격 인플레는 경기부양 효과도 존재하면서 저금리 자금 투입 방식을 지속할 수 있었다.
기존 지적 체계로 예측 어려운 '새로운 처음'형 충격...모두가 연결된 세계에서 발생
그런데 22년 글로벌 경제를 덮친 우크라이나 전쟁발 ‘새로운 처음’형 충격은 저금리 자금 투입을 더는 용인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전쟁발 경제위기는 경제블록의 분할을 의미하는 ‘지경학적 파편화(geoeconomic fragmentation)’가 가져온 충격이다. 일부에서 탈세계화로 표현하는 지경학적 파편화는 자본, 상품과 서비스 교역, 아이디어, 기술 등의 국제 흐름에 균열을 의미한다. 지난 40년간 추진된 세계화는 불평등 문제를 포함해 많은 도전을 받아왔지만 빈곤 개선과 생산성 증대, 세계 경제성장의 동력이었다. 자신감을 얻은 미국은 (다자주의 협상에 기반해 WTO라는) ‘규칙 기반의 무역 세계화 시스템(a rule based system of trade globalisation)’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새로운 시스템에서 가장 이득을 본 나라는 중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수익성 극대화를 추구한) 월가 이해의 결과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가의 이익은 금융위기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금융위기 이후 뒤늦게 중국 통제를 시작했지만, 중국은 자신의 달라진 위상에 부합하는 역할과 몫을 요구하였다. 기존 틀의 재편이 한계가 존재하자 중국은 자신이 주도하는 새로운 질서 만들기로 선회하였다. 여기에 동유럽으로 확장한 나토와 (부국강병과 제국 건설을 추구하며 등장한) 푸틴 러시아가 충돌한다.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G7은 러시아를 G8에서 축출하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나토 동진을 계속하였다. 동시에 다자주의는 물론이고 G7 등으로는 해결이 어렵다고 생각한 트럼프 시절 미국은 무역전쟁을 일으켰고, 뒤를 이은 바이든 역시 (G7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가치 동맹’을 구성하여 중국과 러시아 압박을 가하고 있다. 자유주의 체제와 권위주의 체제라는 상이한 지각판이 연결되어 하나의 지각판처럼 움직였던 세계화 시대가 지각판 사이의 단층선이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즉 경제블록이 분열하면서 막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지경학적 파편화는 인플레이션 → 금리 인상과 양적 긴축(QT) → 자산가격 조정, 성장 둔화 및 후퇴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경학적 파편화의 본 게임인 미·중 충돌은 중국 경제의 비중과 역할 등을 고려할 때 글로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가늠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자산가격 조정과 성장 둔화 등에 대응해 다시 저금리 자금을 투입할 수 있느냐이다. 문제의 원인인 지경학적 파편화를 초래한 패권 충돌이 해결되지 않는 한 지경학적 파편화는 해결되기 어렵다. 지경학적 파편화가 야기한 인플레이션과 침체가 과거의 위기와 다른 이유이다. 패권 충돌을 해결하는 것이 해법인 것을 알면서도 단기적으로 그리고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지경학적 파편화는 새로운 처음형 충격이다. 문제는 기존의 새로운 처음형 충격과 달리 ‘저금리 자금’의 투입이 어렵다는 점이다. ‘저금리 자금 시대의 종언(An End of Cheap Money Era)’은 미국과 유럽 등의 마지막 의지처인 달러와 유로가 힘이 되어줄 수 없고, 따라서 세계 경제의 장기침체 도래를 의미한다.
*필자는 건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은 경제 전문가다. 현재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경제사학회 회장을 지냈다. 유튜브 채널 ‘최배근TV’를 비롯해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 KBS ‘최경영의 경제쇼’ 등 다양한 방송에 출연 중이며, 한겨레21, 경향신문 등에 고정 칼럼을 연재했다. 주요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대한민국 대전환 100년의 조건] [호모 엠파티쿠스가 온다] [이게 경제다] 등이 있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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