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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게임 ‘퐁’…IT 시대 이끌고, AI 연구에 영감 준다 [한세희 테크&라이프]

최초 ‘퐁 키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 꼽아
구글 자회사 딥마인드 인공지능 훈련에 퐁·벽돌깨기 게임 이용

 
 
 
 
아이들이 큰 화면 버전의 퐁 게임을 하고 있다. [사진 위키미디아]
흑백 화면 양쪽 끝에 있는 막대기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공을 받아 치는 게임 ‘퐁’을 기억하는가? 탁구와 같은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요즘 게임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는 극히 단순한 게임이지만, 중년 이상 연배의 사람들이라면 퐁과 같은 전자적 오락을 처음 접했을 때의 놀라운 느낌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퐁의 등장과 함께 스스로 조작하고 참여할 수 있는 다채로운 환상의 세계, 즉 비디오 게임의 시대가 열렸다. 1972년 미국 아타리가 출시한 퐁은 세계 최초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게임으로, 오늘날 약 282조 원 규모로 성장한 게임 산업을 만들어낸 기념비적 작품이다.
 
처음에는 핀볼 머신처럼 가게에 설치해 동전을 넣어 즐기는 전용 기계 형태로 출시됐는데, 동전이 너무 많이 투입돼 고장나는 기계가 속출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이어 컨트롤 패드를 TV에 연결해 즐기는 가정용 제품도 나와 큰 사랑을 받았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아류 게임들이 쏟아져 나왔다.
 

IT 세대 탄생 끌어낸 퐁

퐁은 단지 오늘날 거대한 게임 산업의 첫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만 의미 있는 게 아니다. 컴퓨터 산업이 조금씩 싹을 틔우던 그때,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 그리고 젊은이들이 퐁 같은 게임을 통해 전자 분야에 꿈을 키웠다. 이렇게 자라난 ‘긱(geek)’들이 IT 산업과 문화를 만들어내는 주역이 되었다.
 
최초의 ‘퐁 키드’로는 아마 애플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열 아홉살에 대학을 중퇴한 스티브 잡스는 당시 막 퐁을 히트시킨 아타리에를 무작정 찾아가 일자리를 달라고 했다. 그렇게 아타리에 입사해 퐁의 후속작 ‘브레이크아웃’, 즉 ‘벽돌 깨기’ 게임의 하드웨어 생산 원가를 낮추는 업무에 자원한다.
 
당시 게임기는 지금과 달리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분리되지 않은 일체형 제품이었고, 반도체 칩은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잡스는 친구 워즈니악에게 설계를 맡겼고, 워즈니악은 몇일 사이에 시제품에 150개 정도 들어있던 칩을 40여개로 줄인 기판을 만들어냈다. 이 일로 잡스는(당시 관련자들 기억이 다르기는 하지만) 5000달러에서 3만 달러 사이의 보너스를 받았다. 그리곤 워즈니악에게 회사에서 700달러의 보너스를 받았다며, 절반인 350달러를 건네는 우정(?)을 보였다.
 
어쨌든 아타리와 퐁은 잡스와 워즈니악이 애플을 창업하는데 일정 부분 밑거름이 되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스마트폰 세상에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미 퍼듀대 연구진은 2021년 돼지에게 퐁을 풀레이하는 법을 가르치는 연구를 했다. [사진 퍼듀대 웹사이트 캡쳐]

인공지능과 의식 연구에 영감 주는 퐁

아타리는 부침을 거듭하다 이제는 게임계에서 의미 없는 이름이지만, 올해 11월 출시 50주년을 맞는 퐁은 여전히 IT와 과학 분야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인공지능과 동물의 인식 등에 대한 선구적 연구에 종종 퐁의 이름이 등장한다. 날아오는 공의 방향과 속도를 인지하고, 이에 맞춰 채를 움직여 공을 받아 치는 간단한 과정에 정보의 인지와 판단, 적응과 대응 등 의식의 중요한 요소들이 고루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게임이기 때문에 오히려 초기에 대상을 학습시키기 더 좋은 면도 있다.
 
구글의 인공지능 자회사 딥마인드는 인공지능에 퐁과 벽돌 깨기 등 아타리의 게임들을 훈련시키며 딥러닝과 강화학습 기술을 발전시켰다. 하나의 AI 시스템으로 여러 종류의 게임을 학습하게 하는 혁신을 선보였다. AI에게 게임하는 법을 가르치면서 지능과 의사결정과 같은 인간 의식에 대한 이해도 넓힐 수 있었다. 퐁을 배운 딥마인드 인공지능은 몇 해 안 가 포커와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인간을 이겼다. 물론 이들이 만든 바둑 인공지능도 세계 최고의 프로 기사를 이겼다.
 
돼지가 어느 정도 의식적 능력이 있는지 알아보는 연구에서도 퐁이 쓰였다. 미국 퍼듀대 연구진은 2021년 돼지에게 퐁 플레이하는 법을 가르쳤다. 돼지를 위한 게임기를 만들고 적절한 보상을 주어 훈련시키자 돼지는 코로 조이스틱을 움직이며 퐁 게임 하는 법을 배웠다. 돼지 역시 과제를 개념적으로 이해하고 몸을 움직여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연구였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만으로 퐁 게임을 한 원숭이도 있다. 일런 머스크 테슬라 CEO가 뇌-기계 인터페이스(BCI) 기술을 상용화하기 위해 세운 기업 뉴럴링크 연구진이 2021년 보여준 성과다. 이들은 먼저 원숭이에게 퐁 게임을 가르쳤다. 돼지도 하는데 원숭이가 못할 이유는 없다.
 
원숭이의 뇌 안에는 뇌 신호를 수집 전송하는 ‘링크’라는 작은 장치가 삽입돼 있어 원숭이가 게임을 할 때 나오는 신호를 분석할 수 있었다. 연구진은 특정 움직임과 특정 뉴런을 연관 지었다.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원숭이는 생각만으로 퐁 게임을 조작했다.
 
50년 전 사람을 위한 오락으로 출발한 퐁은 이제 인공지능과 돼지, 원숭이까지 즐기는 게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 뇌 신경 세포까지 퐁 게이머 모임(?)에 합류했다.
 
호주 바이오기업 코티컬랩스와 모나시대학 등 공동 연구진은 사람 줄기세포에서 유래한 뇌 신경 세포와 쥐 배아의 뇌에서 가져온 신경 세포 80만 개에 미세전극을 연결해 배양 접시에 올린 '디시브레인(DishBrain)'을 만들었다. 그리고 외부에서 전기 자극을 주어 퐁 게임을 가르쳤다.
 
일런 머스크 테슬라 CEO가 설립한 뉴럴링크는 원숭이에게 퐁 게임을 하게 해 특정 움직임과 특정 뉴런을 연결하는 연구를 했다. [사진 뉴럴링크 웹사이트 캡처]
뉴런에 공의 위치와 채와의 거리 등을 나타내는 전기 자극을 주었다. 신경 세포가 이에 반응해 신호를 보낼 때 연구진이 설정한 채의 위치에 맞게 보내면 안정적 피드백 신호를, 맞지 않게 보내면 불안정한 피드백을 보냈다. 세포는 안정적 상태를 선호한다는 가설에 따른 것이었다. 실제로 세포는 피드백에 적응하며 퐁을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뇌신경 질환의 기전이나 신약이 뇌에 미치는 영향 등을 찾는데 활용될 수 있다. 나아가 의식에 대한 연구나 생체 기반 컴퓨팅 기기 제조에도 응용될 전망이다. 연구진이 굳이 퐁을 연구 소재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브렛 케이건 코티컬랩 수석과학자는 “퐁이 단순하고 익숙하다는 점도 있었지만, 기계학습 연구에 쓰인 초기 게임 중 하나라는 점을 기념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50년 전 우리에게 전자 형태의 가상 세계를 열어준 그 게임은 여전히 인지와 순간적 판단, 정교한 움직임을 요구하는 인식과 지능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장을 여는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 필자는 전자신문 기자와 동아사이언스 데일리뉴스팀장을 지냈다. 기술과 사람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해가는 모습을 항상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고 있다. [어린이를 위한 디지털과학 용어 사전]을 지었고, [네트워크전쟁]을 옮겼다.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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