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재벌 이야기?…드라마 ‘대행사’로 본 ‘실제와 허구 사이’
[대행사의 세계]② 드라마와 실제, 얼마나 같나
VC기획, 광고시장 1위 제일기획 모티브?
땅콩회항 사건, 최태원 회장 등 연상케 해
[이코노미스트 송현주 기자] “광고 대행사 출신 임원으로서 공감 가는 대목이 많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광고와는 또 다른, 메시지와 여론을 만드는 업계 리얼리티를 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해요. 실제 겪은 사건이 재연되기도 하고요.”
국내 대기업 계열 광고 대행사에 재직한 모 임원의 발언이다. 최근 JTBC 토일드라마 ‘대행사’가 인기몰이 중인 가운데 광고 세계가 실제와 얼마만큼 흡사한지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드라마 속 대행사와 실제 대행사는 어떤 게 같고 다를까. 총 16부작인 드라마 ‘대행사’는 VC그룹 최초로 여성 임원이 된 ‘고아인(이보영 분)’이 최초를 넘어 최고의 위치까지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그린 우아하게 처절한 광고대행사 오피스 드라마다.
드라마 속 업계 1위 VC기획은 현재 광고대행사 업계 1위인 제일기획을 모티브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인공 고아인 역시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을 모델로 한 것으로 업계는 추측하고 있다. 그는 제일기획에서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를 거쳐 그룹 내 여성 첫 임원(상무, 전무)이 됐고 부사장까지 오른 인물이다.
회장의 딸이라는 이유로 부임한 강한나 상무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딸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을 떠올리게 한다. 강한나는 VC그룹의 재벌 3세이자 하루아침에 VC그룹 상무가 되는 인물이다. 실제 이서현 이사장은 서울예술고와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한 이후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해 2013년까지 제일모직 부사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제일기획을 떠나 삼성복지재단과 리움미술관을 운영 중이다.
드라마 대사에는 실제 광고 카피가 활용되기도 했다. “사자가 자세를 바꾸면 밀림이 긴장한다”라는 문구가 대표적이다.
이 문구는 김하나 작가가 제일기획 카피라이터 시절 쓴 것으로,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 광고 문구다. S클래스의 탑승자 사고 예방 안전 기술인 '프리-세이프'(PRE-SAFE) '라는 신기술을 알리는 광고로 사고 위험을 감지하면 안전벨트, 시트 등이 알아서 작동하는 운전자 보호 기능이다.
‘대행사’ 3회에서는 ‘이끌든가, 따르든가, 비키든가’라는 문구가 등장한다. ‘배달의민족’ 앱을 운영하는 우아한형제들이 공개한 ‘송파구에서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몽촌토성역편’ 중 11번째 문구이기도 하다. 사실 이 문구의 원작자는 CNN 창립자인 테드 터너다. 극 중 고아인이 10시 회의에 늦은 직원들에게 ‘10시 1분은 10시가 아니다’라고 일침을 날린 것 역시 우아한형제들의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에 나온 문구를 각색했다.
‘일을 더 잘하는 11가지 방법’에는 ‘9시 1분은 9시가 아니다’와 같이 사소한 규율을 중요시하는 내용도 있고, ‘잡담을 많이 나누는 것이 경쟁력이다’, ‘휴가나 퇴근 시 눈치 주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책임은 실행한 사람이 아닌 결정한 사람이 진다’ 등과 같이 구성원들의 편의를 강조한 내용도 있다.
극 중 고아인은 장차 VC그룹의 사돈이 될 우원그룹의 김우원 회장이 구속되자 보석 허가를 받기 위한 광고를 준비했다. 광고주의 마음을 저격한 프레젠테이션으로 무려 300억원이 걸린 비딩을 따낸 고아인은 김 회장이 출소하면 치킨을 배달시키라고 조언한다. 그는 “출소 후 치킨 한 마리가 배달되는 사진이 찍히면 대중들의 시선이 달라진다. 그냥 치킨을 먹고 싶었던 나와 같은 한 인간으로 보일 거다”는 아이디어까지 제안했다.
이 에피소드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019년 구치소에서 석방된 뒤 집으로 돌아가 치킨부터 시켰다고 하는 일을 연상케 한다. 이재용 회장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돼 수감 생활을 했고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자택 앞에서 치킨 배달되는 장면이 한 카메라에 포착돼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재벌 갑질을 묘사하는 장면도 나왔다. 극 중 강한나(손나은 분)는 땅콩회항 사건을 저격하기도 했다. ‘대행사’ 2회에는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VC그룹 회장 딸 강한나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와인과 마카다미아를 주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뒤늦게 안대를 벗은 강한나의 얼굴을 확인한 승무원은 “죄송하다. 마카다미아 다시 접시에 담아드리겠다”며 봉지째 가져다줬던 마카다미아를 다시 회수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한나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아, 땅콩?"이라고 되물으며 실제 벌어졌던 '땅콩회항 사건'을 언급했다.
‘땅콩회항 사건’은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 오너 일가인 조현아 전 부사장이 이륙 준비 중이던 기내에서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으며 난동을 부린 데 이어 비행기를 되돌려 수석 승무원을 하기시킨 사건이다.
SNS 중독자로 설정된 강한나는 SNS를 통해 대중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재벌가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용진이형'으로 불리는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다. 정 부회장은 인스타그램 팔로워수가 이미 77만명이 넘을 정도로 SNS를 통한 영향력이 상당하다. 그는 다양한 일상 사진과 게시글을 올리며 일상을 공유하고 있다.
대행사 3회에서 강한나는 부친인 강용호(송영창 분)에게 요거트 뚜껑을 핥아먹는 모습을 몰래 찍어, SNS 방송으로 생중계했다. 이 방송에서 강한나는 "여러분 보셨죠? 요거트 만드는 회사를 가진 우리 아빠도 뚜껑을 핥아먹습니다. 다들 욜로 그런 거 하다 골로 가지 마시고, 아끼면서 사세요"라는 발언을 하는 방송으로 확제를 모아, 드라마에서 가장 '핫'한 SNS 스타 인플루언서에 등극했다.
‘재벌의 요거트 뚜껑 먹방’은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실제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최 회장은 미국 방문 중이던 지난 2021년 자신의 SNS에 현지 방문중인 사진을 올리자 한 누리꾼이 “회장님 무례한 질문이지만 혹시 회장님도 요XX(요거트) 뚜껑 핥아 드시나요?”라는 질문을 남겼다. 이에 최 회장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여러 사례를 비춰볼 때 드라마 속 장면들이 묘하게 대행사 업무 뿐 아니라 기업의 광고 문구나 재벌가 사건을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광고업계 한 관계자는 “유원그룹 광고 PT 장면 속 오너 일가의 무례한 행동들은 과거 광고회사의 악질 행태를 그대로 담아낸 사례”라며 “실제인 듯 허구인 듯 생각하게 하는 장면 연출이 드라마 몰입감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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