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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몰입의 시대...“디깅러는 덕후와 다르다” [허태윤 브랜드 스토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돈·열정 쏟는 ‘디깅러’
혼자 즐기는 것 넘어서 공유하고 소비 자랑해
하위문화를 주류문화로 만드는 소비력에 마케터 주목

좋아하는 것에 돈과 열정을 아끼지 않는 디깅러가 등장했다. [사진 게티이미지]
[허태윤 칼럼니스트] “나는 이 나라의 여왕이 될 공주다. 한 나라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소양은 꼭 필요한 것이고 그래서 당연히 국어 공부를 해야 한다. 군주가 되면 외교도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다. 따라서 영어는 기본이다. 영어에 몰입하자. 이런 단순한 미분도 못하면서 훌륭한 군주가 되겠다고....”

어느 나라의 공주 이야기가 아니다. 이른바 자율감각 쾌락반응(ASMR)을 이용해 자신이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다는 콘셉트로 과몰입하며 공부하는 Z세대 학생의 새로운 학습법이다. 이뿐만 아니다. 평화로운 뉴욕 주택가의 아침 콘셉트, 자신을 귀족 자제로 몰입시키는 귀족 자제들의 왕실 도서관, 예비 법조인 로스쿨생 공부 콘셉트의 ASMR도 있다. 유튜브에는 이런 ASMR이 넘쳐 나고 많은 MZ세대가 이런 ASMR을 통해 자신을 몰입시켜 하나의 공부법으로 활용한다. 이는 몰입하는 재미를 느끼기 위해 콘셉트에 열중하고, 디테일이 살아 있는 콘셉트를 일상에 적용하거나 콘텐츠를 즐기는 디깅(digging) 소비현상이다.

원하는 굿즈 사기 위해 오픈런 하는 디깅러 
디깅 소비를 이해하기 전 우리는 디깅러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라면 돈도, 일상도, 열정도 아끼지 않고 한 분야를 ‘깊이 파는’(dig) 것을 디깅(digging)이라 하고, 그런 사람들을 디깅러(digging+er)라고 일컫는다. 과거에도 일본어의 오타쿠(オタク)에서 기인한 ‘덕후’라는 말이 있었지만 디깅러는 이들과는 다르다.

오타쿠 혹은 덕후는 하위문화나 소수의 관심사였던 일에 집착적 관심을 갖고 개인적 차원의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디깅러는 남들보다 더 전념해서 즐기고, 그 재미를 소통하고 자랑한다. 이들의 공유와 과시를 통해 디깅러의 하위문화가 주류 문화가 되기도 한다. 

디깅러의 등장은 최근 팝업스토어나 한정판 굿즈를 파는 매장이 열렸을 때 오픈런이 벌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슬램덩크’ 팬덤이 관련 굿즈를 사기 위해 팝업스토어 오픈 전날부터 노숙하며 오픈런을 하거나, 같은 영화를 5번 보았다는 N차 관람객이 나타나기도 한다. 디깅러는 자신이 열정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아낌없는 충성을 보이고 애정을 숨기지 않고 해당 콘텐츠를 공유하고 자랑하는 소비 방식을 추구한다.

자신을 특정 콘셉트로 과몰입하는 디깅은 관계지향 디깅으로 확장된다. ‘배달의민족’의 웹툰 플랫폼 ‘만화경’은 ‘구름톡’이란 기능을 통해 콘텐츠를 볼 때도 디깅러가 혼자 콘텐츠를 즐기지 않고 다른 디깅러와 소통하며 즐길 수 있는 소셜뷰잉(social viewing, 서로 다른 이들의 뷰잉을 공유하고 실시간 반응을 나누는 화면)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기능은 디깅러 사이에서 인기를 끌으며 서비스 오픈 2년 만에 100만이 넘는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포켓몬빵은 편의점뿐 아니라 대형마트, 온라인 몰에서도 품절 행렬이 이어지고 있고 편의점 앞에서 배송 차량을 기다리는 ‘오픈런’을 시도하는 소비자들도 나오고 있다. [사진 김채영 기자]
이중 마케터들이 가장 주목하고 있는 디깅러 형태로는 수집형 디깅이 꼽힌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캐릭터나 제품, 굿즈, 경험을 수집하는 디깅러이다. 이들은 관심분야 제품을 모으고 이를 과시하며 공유한다.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포켓몬빵 ‘띠부띠부씰’ 수집이 대표적인 수집형 디깅 현상이다.

IPX(라인프랜즈)의 BT21도 수집형 디깅러에게 큰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존재다. BT21은 BTS 멤버와 함께 만들어 세계적인 캐릭터 반열에 올랐다. 이 캐릭터들은 세계에 3000만 명으로 추산되는 공식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캐릭터는 공식 사회관계망서비스(SNS)계정까지 만들어 세계관과 스토리를 전파하고 있다.

주류시장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진로 이즈백’의 두껍상회도 마찬가지다. 두껍상회는 단 61일간만 팝업스토어 형태로 열렸지만 당시 1300만 명이 몰려, 각종 성인 디깅러의 놀이터가 됐다. 이곳에서는 140여 종이 넘는 다양한 굿즈가 판매됐고, 이중 참이슬 백팩은 출시와 더불어 순식간에 물량이 소진됐고 두껍 캐릭터를 이용한 술잔은 3만개 이상이 팔렸다. 
강남역 인근에 팝업스토어로 문을 연 '두껍상회 강남'. [사진 연합뉴스]

디깅 소비에 마케터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 
디깅 소비는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가 출간한 ‘트렌드 코리아2020’에서 10대 키워드 중 하나로 최초로 제시됐고, 2023년 같은 조사에서 다시 주요 소비트렌드로 소개됐다. 실제 2022년 말 글래드호텔이 호텔 이용자를 대상으로 트렌드 리포트 9 신(新)소비생황 조사결과에 따르면 MZ세대의 42%가 디깅 소비를 가장 관심 있는 소비의 형태로 꼽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위문화를 중심으로 한 ‘덕후’ 시대에는 특정 분야에 과몰입한 소비자 집단에 대해 마케터들이 주목을 할 이유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의 ‘중독’과 관련이 있었다. 자기만족을 얻지만, 드러내 놓고 ‘덕질’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공유의 기회가 적었고, 그러다 보니 규모의 경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디깅 소비 시대에는 마케터들이 이전보다 더 긴장하며 디깅러 움직임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과몰입은 선호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소비하고, 관련돤 지식을 쌓으며 지속적으로 향유하는 총체적인 과정이다. 열정분야에서의 몰입과 자기만족은 과시와 공유로 연결되고 나아가 반복적인 소비와 커뮤니티 소비로 연결되어 하위문화의 전성시대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마케터들은 과거 펑퍼짐한 시장 세분화 보다 시장과 소비자의 관심사에 대한 훨씬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디깅의 시대 소비자들은 과거 소비자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의 관심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과 몰입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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