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 경쟁 속 곤혹스런 한국, 기회 만들 수 있을까? [한세희 테크&라이프]
[한국 반도체의 명암]⑤
반도체 둘러싼 지정학적 신경전에 韓 ‘곤란’
중국 정부, 미국 메모리 기업 ‘마이크론’ 제재
흔들리는 판…“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은 감수해야”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동북아시아에서 반도체를 둘러싼 지정학적 신경전이 가열되고 있다. 미국과 민주주의 진영 국가들의 대중 반도체 압박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도 반격에 나섰다. 이 신경전은 앞으로 주먹다짐으로 번지게 될까? 불행히도, 이 싸움에서 가장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은 대한민국이다.
중국은 지난 21일 ‘주요 인프라에 대한 보안 위협’을 이유로 미국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 제품의 자국 내 사용을 금지했다. 중국의 인터넷 규제기관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CAC)은 “마이크론 제품에 심각한 보안 문제가 발견돼 사이버 안보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라며 “중국의 주요 국가 안보시설 운영사는 마이크론 제품 구매를 중단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이 결정은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G7 정상회의 직후 발표됐다. 이번 G7에서는 “에너지나 경제적 의존 관계를 무기로 삼는 행위에 반대한다. 주요 광물과 희토류·반도체·배터리 등에 대해 강인한 공급망을 강화해 나갈 것”이라는 내용의 경제안보 성명이 발표되는 등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내용들이 나왔다. 공급망 같은 경제 안보 이슈를 놓고 G7 정상회의에서 공동 성명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G7 정상회담 직전인 18일에는 일본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삼성전자를 비롯해 대만 TSMC, 미국 인텔, 마이크론,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유럽 반도체 연구소 IMEC 등 세계 주요 반도체 기업 대표들을 초청해 일본에 대한 투자를 요청했다. 기술 파트너십을 강화하자는 뜻도 전했다. 참여 기업들은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특히 마이크론은 36억 달러를 투자해 히로시마에 첨단 D램 공장을 짓겠다며 구체적 계획을 내놓았다. 일본은 반도체 산업 육성과 해외 기업 유치를 위해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고, 마이크론과 TSMC 등은 이에 호응하고 있다.
중국 정부의 마이크론에 대한 조사는 최근 두 달 가까이 진행되었는데, 굳이 G7 정상회의 종료 시점에 맞춰 제재를 발표한 것은 중국의 반도체 기술 및 시장 접근을 차단하려는 서방 세계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중국 정부는 마이크론 제품의 어떤 요소가 자국 핵심 인프라에 위협이 되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같은 반도체와는 달리 연산을 수행하지 않고 데이터를 저장할 뿐인 메모리를 사이버 보안 위협이라며 제재한 것이 중국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
중국으로서는 마이크론이 자국 기업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이어가는 미국에 보복 조치를 하기 적합한 기업이다. 마이크론은 나름 미국의 주요한 기업이고 매출에 있어 중국 의존도가 높지만, 중국 및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진다. 마이크론은 연간 매출의 대략 10%인 30억 달러를 중국에서 번다.
한국, 고래 사이에 낀 새우 되나
마이크론이 빠져도 메모리 반도체 세계 1, 2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으면 메모리 부족 현상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반적 상황이었다면 그랬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서로 견제하며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는 중이다. 이미 미국은 지난달 마이크론 제품이 중국에서 제재받을 경우, 그에 상당하는 부족분을 다른 반도체 제조사들이 메우지 말기를 바란다는 요청을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은 마이크론 제재로 미국에 압박을 가할 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중국과 미국 중 어느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효과까지 함께 얻는 셈이다. 마이크론이 제재받으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단기적으로 중국 시장에서 수혜를 입을 수도 있겠지만, 두 회사가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마이크론 공백에 따른 추가 매출은 분산돼 티가 안 날 가능성이 큰 반면, 정치적 부담은 상당하다.
미국 상무부는 중국의 마이크론 제재가 발표된 직후 “중국의 행동으로 인한 반도체 시장의 왜곡을 막기 위해 핵심 동맹 및 파트너들과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한민국이 직접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렇더라도 한국 정부가 중국에 대해 강력한 입장을 보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한국은 중국과 인접해 있고 경제적으로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마이크론은 중국에 공장이 없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중국에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고 있다. 시장조사회사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낸드 플래시 메모리의 22%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SK하이닉스는 D램의 12%를 중국에서 제조한다.
한국 정부는 “개별 기업의 선택에 관여하기 어렵다”라는 논리로 한발 물러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앞서 우리 기업들은 중국 내 반도체 제조 시설에 대한 첨단 장비 반입 금지 조치와 관련, 미국으로부터 예외 조치를 얻어내기도 했다.
반도체 신질서의 등장, 한국의 선택은...
미국의 입장에 보조를 맞추는 흉내를 내며 한편으로는 중국을 자극하는 언동을 삼가는 것이 최선의 방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중국을 배제하고 민주주의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반도체 공급망을 만들려는 국제적 시도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민주주의 진영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것은 향후 더 큰 리스크를 불러올 가능성도 있다.
지금 판이 흔들리고 있다.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체계에 끌어들여 설계와 장비의 미국, 부품소재의 일본·유럽, 제조의 한국·대만이 세계의 공장 중국과 공존하는 자유무역의 시대는 적어도 당분간은 막을 내린 듯 보인다. 자국의 전체주의적 행태를 다른 나라에도 부과하려는 중국에 대한 저항이 서구 민주 국가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이에 따른 반도체 제조와 공급 네트워크 재구축이 시도되는 지금 이 시기를 일본은 적극 활용하려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 정부와 주요 반도체 기업, 대만 TSMC 등과 적극 협력하며 잃어버린 반도체의 영광을 되찾는다는 목표다. 2025년까지 2나노 공정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일본의 저력이 되살아날 수도 있다.
한국은 아직 중국에 대한 반도체 규제에 명시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어느 쪽을 선택하건 상당한 곤란은 감수해야 한다.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을 감수하는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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