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나노 벽 넘은 중국 반도체, 세계 디지털 생태계 분열 촉진 [한세희 테크&라이프]
화웨이, 美 상무장관 中 방문 중 ‘보란 듯’ 스마트폰 신제품 공개
美 제재 후 4년 만에 나온 프리미엄 스마트폰 라인업 ‘메이트 60’
SMIC 7나노 공정으로 만든 AP 반도체 탑재…2018년 애플 수준
[한세희 IT 칼럼니스트] 지난 8월 말,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하던 기간 중 화웨이가 보란 듯이 최신 스마트폰 ‘메이트 60 프로’를 선보였다. 화웨이가 프리미엄 스마트폰 라인업인 메이트 새 제품을 내놓은 것은 4년 만이다.
한때 세계 최대 스마트폰 생산 기업이던 화웨이의 신제품 출시에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미국의 강력한 제재 때문이다. 미국은 2020년 미국 기술이 쓰인 반도체 장비나 소프트웨어 등을 수출하려면 미국의 허가를 얻도록 했다. 화웨이나 반도체 설계 자회사인 하이실리콘 등이 반도체를 만들거나 공급받지 못하도록 하는 실질적인 금수 조치였다. 이에 앞서 미국은 화웨이를 제재 대상 기업 리스트에 올려 미국 기업들이 화웨이와 거래하지 못하도록 했다. 구글 검색이나 구글 플레이 같은 스마트폰 기본 앱과 서비스들이 화웨이 스마트폰에서 사라졌다.
이후 미국은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인 SMIC에도 비슷한 제재를 가했다. SMIC는 중국에 대만 TSMC 같은 회사를 키우기 위해 정부가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파운드리 회사다. TSMC 출신 고위 임원들을 대거 영입하며 이른 시간 안에 공정 기술 수준을 확 높였지만, 14나노미터(nm) 공정 이후 벽에 부딪혀 있었다. 그러던 중 제재로 미국 등 서구권의 첨단 반도체 기술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더 큰 위기를 맞았다. 네덜란드가 미국의 반도체 제재에 보조를 맞추기로 함에 따라 최신 초미세 공정에 꼭 필요한 ASML의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도 들여올 수 없게 됐다.
미국의 반도체 설계 자산과 디자인 소프트웨어, 공정 장비 등이 없으면 첨단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렇게 중국의 발목을 잡는 것이 중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는 미국의 목적이었다. 하지만 화웨이는 이런 어려움을 뚫고 5G 플래그십 스마트폰을 만들어 냈다. 미국이 당혹스러워하고, 중국이 환호하는 이유다. 메이트 60 프로를 향한 중국의 ‘애국 소비’가 불붙었다.
7나노 벽 넘은 중국 반도체?
얼마 후 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테크인사이츠라는 반도체 정보 분석 기업이 메이트 60 프로를 입수해 내부를 뜯어봤는데, 제품의 두뇌에 해당하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반도체 ‘기린 9000s’가 SMIC의 7나노 공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설계는 하이실리콘이 했다. 7나노 공정은 애플이 2018년 출시한 ‘아이폰XS’에 탑재된 AP 칩에 적용된 기술이다. 최첨단은 아니지만 충분히 높은 수준의 기술이다. 적어도 SMIC의 기존 기술력보다는 분명히 한걸음 진보한 것이다. 미국이 철통같은 반도체 제재 장벽을 쳤음에도 하이실리콘은 5G 기반 AP를 설계했고, SMIC는 기존에 하지 못하던 7나노 공정을 결국 돌파하는 성과를 냈다.
이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으려는 미국의 제재에 구멍이 뚫렸거나, 제재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국이 기술적 돌파구를 만들어 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SMIC가 구세대 공정 장비를 개선하거나 개조해 미세 회로 제품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찾은 것일 수도 있다. 나라마다, 통신사마다 조금씩 다른 5G 통신망에 적용할 수 있는 안정적 설계도 찾아냈을 것이다. 물론 메이트 60 프로라는 이 특정한 제품에 7나노 공정에서 만들어진 5G 기반 AP 칩이 쓰였다는 것만으로 중국이 미국의 제재를 돌파했고, 공정 기술력의 도약을 이뤘다고 평가하기는 이르다. SMIC가 얼마나 높은 효율로 좋은 제품을 빠르게 만들어 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칩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알려진 바 없지만, 전문가들은 SMIC의 기린 9000s 제조 수율이 그다지 높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 강한 인상을 줄 수는 있지만, 자칫 반도체나 스마트폰을 만들면 만들수록 손해가 커지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재 미국 정부는 관련 상황을 파악해 대책을 마련하겠다는 정도의 입장만 밝힌 상태다. 어쩌면 조만간 더 강력한 제재 계획이 나올 수도 있겠다. 하지만 ‘화웨이와 SMIC가 7나노 반도체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은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제재를 시작할 당시부터 이미 제기됐던 우려를 다시 한번 깨우고 있다. 바로 중국을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몰아내려는 이러한 제재가 결국 중국의 기술 자립을 앞당기거나, 나아가 중국 중심의 독자적인 반도체 생태계를 형성하는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갈라진 세계, 분열된 기술
기술적 고립과 결핍은 때로 독자적 기술 개발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더구나 중국은 거대한 인구·영토·경제 규모는 물론 나름의 산업 생태계를 가졌다. 반도체 설계부터 부품·소재·장비·생산에 이르기까지 나라 안에서 독자적으로 돌릴 역량도 이미 어느 정도는 확인됐다. 구글 앱스토어 같은 것은 진작에 중국 자체 제품군으로 대체된 바 있다.
이렇게 만든 제품이 TSMC가 최첨단 공정 기술로 제조한 애플이나 엔비디아의 반도체, 또는 삼성전자가 만든 메모리보다 성능이 떨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중국이 내부에 거대한 자체 생태계를 운영한다면 이런 차이는 큰 의미가 없을 수 있다. 갈라파고스 안에 사는 동물은 바깥세상과 자신을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갈라파고스가 너무나 크다면?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은 글로벌 자유 무역 체계의 장점을 어느 정도 희생해서라도 전체주의의 확산을 막고 민주주의 진영의 가치를 지킨다는 전제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희생할 수 있을까? 최근 중국이 주요 공기업·공공기관 등에 직원들의 아이폰 사용을 금지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보도가 나왔다. 중국 정부는 그런 지침을 내린 바 없다는 공식 입장이지만, 우리는 이미 한한령 등을 통해 중국의 ‘비공식적’ 정책의 위력을 잘 알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의 성장세가 꺾인 지금, 최대 시장인 중국을 잃는다면 애플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화웨이까지 복귀해 시장을 잠식할 것이다. 시장조사 기업 트렌드포스는 최근 나온 아이폰15의 올해 총판매량을 지난해보다 5% 줄어든 2억2000만대 안팎으로 예상했다.
화웨이가 없는 서구, 아이폰이 없는 중국으로 갈라진 세계가 다가올 수 있다. 세계는 다시 하나의 시장에서 교류하는 사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는 어느 한 편에 서는 선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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