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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록달록 쿠션’으로 세계 컬렉터 홀렸다…틀을 깨는 ‘이혜민의 오브제’ [이코노 인터뷰]

연약한 것, 버려지는 재료에 천착…‘반전의 오브제’로 변주
조각·회화, 설치·비디오아트 등 다양한 장르로 폭넓은 작업

이혜민 작가. [사진 신인섭 기자] 
[이코노미스트 김설아 기자] 알록달록한 쿠션이 차곡차곡 쌓여 밀도 있게 서로를 지지한다. 정해진 경계가 없는 듯 좌우상하로 길게 이어진 조각들이 서로 무수히 중첩되며 연출하는 장면이다. 가느다란 실과 자투리 천, 흩어지는 솜…. 형태가 모호한 재료의 집합체에 불과한데도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그대로 투영된다. 

그곳에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쿠션의 모습은 없다. 부드럽고 폭신한 감촉은 겹겹이 쌓여 견고함을 드러내고, 브론즈로 캐스팅한 쿠션 형태의 조각은 어떤 외부 환경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내면을 환기시켜 준다. 심지어 어떤 쿠션은 버려진 과자 봉지로 겹겹이 쌓여 하나의 부조 작품으로 탄생했다. 

‘재계 컬렉터’도 반한 동양의 美…모순적 메시지 

모두 설치 미술가인 이혜민 작가의 작품이다. 일반 대중에겐 생소하지만 그는 예술계에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실력파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NYU)에서 설치미술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20여년간 그는 작품 작업과 개인전을 쉬지 않고 반복하며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재계의 아트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수집하며 꾸준히 소장해오고 있다. 

이 작가는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예술계가 인정한 예술가’이기도 하다. 미국의 미술 평론가이자 작가인 로버트 C. 모건은 이 작가의 작품을 보고 “은유적 공명과 촉각의 매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평했다. 쿠션을 촘촘히 연결해 마치 하늘로 승천하려는 용처럼 꿈틀거리게 연출한 작품은 아트바젤 홍콩이나 아트바젤 마이애미 같은 세계적인 아트페어에서도 극찬을 받았다. 동양미와 반전이 잘 표현된 작품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이혜민 작가의 작업실. [사진 신인섭 기자] 
“시작은 베개였어요. 마땅한 미술 재료가 없어서 버려진 이불과 솜, 헌옷 등을 자르고 바느질해서 수십 개의 베개를 만들고 그것들을 엮었죠. 베개는 잠을 잘 때 꿈을 꾸게 해주고 나의 비밀 이야기를 들어주며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는 존재잖아요. 연약한 천으로 만든 베개를 강하게 만들어 커다란 꿈이 이뤄진다는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쿠션 설치 작품이 그의 시그니처지만 이 작가는 ‘설치 미술’이라는 단어만으론 온전히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를 ‘제한 없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일상으로부터 얻는 재료에 제약이 없듯이 그는 설치를 비롯해 조각과 회화, 비디오아트 등 여러 가지 장르를 넘나들며 작업한다. 작업실도 한 두 곳이 아니다. 주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내지만 보다 큰 작품을 구현할 때는 용인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을 만든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 미국에서의 개인전도 꾸준히 열고 있다.

“저는 작업하는 모든 과정에서 어떤 틀을 두지 않아요. 일상 속에서 작품의 재료를 찾고 그 재료들을 연단해 재료가 가진 성질을 반전시켜요. 끊임없이 붓질하고 쌓으면서 중첩의 결을 만들고, 그것이 결국 고정된 이미지를 부수는 거죠.”

그렇게 작가는 어디 한 곳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확장해왔다. 처음엔 천으로 만들어지던 작품들이 브론즈로, 액자나 석고 붕대 등 다른 재료로 변주돼 왔다. 쓰다 남은 천과 누군가의 아픔을 치료해준 뒤 버려진 붕대들, 사소하고 하찮아 보이는 재료들이 그의 손을 거치면 치유와 정화의 도구로 재탄생 됐다. 낡은 석고 붕대에 물을 발라 레이스 형태로 다듬으며 드레스의 결로 표현하거나, 바다에 비친 하늘과 별의 모습을 통해 죽음과 삶, 행복과 슬픔이 서로 반사되는 것이라고 재해석하는 식이다.

“솔직한 작업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붕대나 액자는 저마다 아픈 사람을 치유해거나, 주인공을 빛내주는 역할을 하지만 일정 가치가 다 되면 버려지잖아요. 하찮아진 존재들을 보면 새로운 가치를 줘야겠다는 도전정신이 생겨요. 버려지는 것과 다시 쓰이는 것, 연약한 것과 강한 존재, 부드러움과 딱딱함 같은 반전과 모순의 메시지를 주고 싶었어요.

이혜민 작가. 그의 작품은 내로라하는 재계의 아트 컬렉터들이 수집하며 꾸준히 소장해오고 있다. [사진 신인섭 기자] 
“작품으로 시대와 소통…예술가의 사회적 책무 다하고파”

때로는 스스로 표현하는 메시지 뿐 아니라 시대가 직면한 사회적 현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사회적인 상황이나 환경적 특성 등 시대가 반영하는 것들을 예술가만의 방식으로 소통하고 싶다는 바람이다. 피카소가 전한 말처럼 이 작가 역시 “예술가는 예술로 사회를 이야기하고 지켜나갈 책임이 있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과거 피카소는 대표작인 ‘게르니카’를 통해서 조국의 내전과 전쟁의 비극을 알렸고, 그의 작품은 어떠한 텍스트나 말보다 대중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선명해 현재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때가 되면 떠나지만 작품과 예술은 그대로 남아있죠. 향후 작업을 통해 사회적인, 나아가 외교적인 역할까지 하고 싶어요. 가장 한국적인 천과 동양적인 물감 등 제 작품이 동양의 미를 잃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고요. 예를 들어 전쟁이 있는 나라를 상징하는 천과 우리나라 전통의 천들을 엮어 아픔을 함께 공유하고 평화적인 메시지를 주는 거죠. 전 세계 아젠다인 지구 온난화 해결을 위한 대응 의식을 만드는 데도 아티스트로써 어떤 역할을 해내고 싶어요. 작품을 매개로 사회와 소통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예술가의 책무를 다하는 길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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