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전쟁’ 아닌 ‘경영 능력 경쟁’ [EDITOR’S LETTER]
[이코노미스트 권오용 기자]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5000여 개 기업의 경영 실적을 기반으로 ‘100대 CEO’를 발표합니다. 단순히 매출·영업이익만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당기손익에 고용 지표도 반영해 경영 능력뿐 아니라 사회적 기여도까지 꼼꼼히 살펴 순위를 정합니다. 지난 8월 발표한 ‘2024 100대 CEO’에서는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이 1위를 차지한 가운데, 33위에 박기덕 고려아연 대표가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려아연은 비철금속 제련회사 중 유일하게 30위권에 들며 삼성·LG·SK·롯데 등 굴지의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1974년 문을 연 고려아연은 故 장병희·최기호 창업주가 함께 세운 영풍그룹의 핵심 계열사인데요, B2B(기업간 거래) 회사여서 대중에게는 생경하지만 아연·금·은·구리·납 등 다양한 비철금속의 제련 및 가공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로 세계 1위입니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전자기기에서 세계 정상이라면, 고려아연은 소재 산업에서 글로벌 넘버1이라는 얘기입니다. 특히 회사명에도 있는 아연은 전 세계 점유율 1위를 자랑하고 있는데요, 전 세계 단일제련소 기준 세계 최대 아연 생산량을 자랑하는 온산제련소를 갖고 있어 가능한 일입니다.
원소 기호 Zn인 아연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금속 원소입니다. 부식 방지를 위해 아연이 도금된 철강 제품은 자동차·건설·해양 산업 등에서, 아연·알루미늄 합금은 경량성과 강도가 뛰어나 항공우주 산업이나 자동차 부품 제작 등에 쓰입니다. 뿐만 아니라 반도체·전기차·이차전지 등 최첨단 산업에서 빠질 수 없는 기초 소재인 만큼 고려아연은 공급망 핵심 역할을 담당하는 기업으로서, 지속 성장 가능성이 매우 높은 초우량 회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소재 산업이 중요한 때 비철금속 제련 1위 회사가 우리나라에 있다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최근 고려아연의 경영권 쟁탈전이 크게 벌어져서 걱정입니다. 최대 주주인 영풍의 장씨 가문이 사모펀드사인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75년 동업자였던 현 경영진 최씨 가문의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지분 확보에 나선 것입니다. 이유는 고려아연의 수익성과 재무 건전성이 우려스러운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고려아연 측은 영풍이 자신의 사업이 부진하자 외부 세력(MBK)과 손잡고 ‘알짜 회사’를 먹으려고 한다고 맞섰습니다.
양측은 경영권 확보를 위해 고려아연 주식을 사들이는 ‘쩐의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공개매수 선공에 나선 영풍·MBK 연합은 3조6000억원 이상, 대항 매수에 나선 고려아연은 3조1000억원 이상의 총알을 준비하고 총력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7조원에 육박하는 ‘머니게임’인데요, 누가 이기든 ‘승자의 저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게 중론입니다.
고려아연이 그냥 사기업이면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그만입니다. 문제는 국가 경제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산업(기초 소재)을 책임지고 있는 대표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번 분쟁을 되돌릴 수 없다면, ‘쩐의 전쟁’이 아니라 ‘경영 능력 경쟁’이 되어야 합니다. 세계 1위 비철금속 제련회사를 어떻게 더 성장시켜 초격차 경쟁력을 갖도록 할 것인가? 더 잘하기 경쟁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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