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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증권 인수에 ‘노태우 자금’ 사용됐나?

[대법원에 간 SK성장사]②
노소영 측 ‘선경 300억’ 메모가 증거
SK 측 “계열사 자금 동원했던 것”


[이코노미스트 김윤주 기자] ‘재계 서열 2위’. 이는 SK를 대표하는 수식어다. 섬유 제품 위주의 중견기업에 머무르던 선경그룹이 현재의 재벌기업 SK로 성장하기까지 비결을 묻는다면, 인수합병(M&A)을 빼놓을 수 없다. 이같은 SK의 사세확장 배경이 최근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으로 인해 재조명되고 있다. 이혼소송의 쟁점이 SK의 성장과정에서 고(故)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유입 등 노 관장 측의 기여가 있었는지에 달려서다.

‘해묵은 논란’ 태평양증권 인수자금 마련 어떻게?
SK는 지난 1980~1990년대 유공(SK이노베이션), 태평양증권(SK증권), 한국이동통신(SK텔레콤)을 차례로 인수했다. 이렇게 몸집을 불려온 SK의 성장사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얽혀 있다는 의혹은 과거부터 지속적으로 논란이 됐다. 

특히 태평양증권 인수 과정에 이른바 ‘노태우 자금’이 사용됐다는 의혹이 일었다. 앞서 1995년에는 최 회장의 부친 고(故) 최종현 SK 선대회장이 태평양증권(현 SK증권) 인수 과정에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사용했다는 의혹 등과 관련해 검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관련 의혹이 사법 처리된 적은 없다.

당시 수사에 참여한 민유태 전 전주지검장은 2심 재판부에 낸 진술서에서 “SK그룹의 1991년 태평양증권 인수 당시 수백억원의 자금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언론보도에 대해 금융거래를 추적하는 등 다각도로 조사했다”며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SK그룹으로 흘러들어가 인수자금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SK의 ‘노태우 자금’ 사용 의혹에 다시 불을 붙인 것은 노 관장이 지난해 6월 이혼소송 과정에서 재판부에 ‘선경 300억’ 메모를 제출하면서다. 이 메모는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가 1998년 4월과 1999년 2월에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각 메모에는 ‘노재우 251억+90억’, ‘최서방 32억’ 등의 이름과 액수가 나와 있고, ‘선경 300억’이란 글귀도 나온다.

이를 근거로 노 관장 측은 “노 전 대통령이 선경에 지원한 300억원이 태평양증권 인수와 이동통신사업 진출 등을 비롯해 SK그룹의 사업자금으로 쓰였다”고 주장한다. 

증거는 없지만…SK “계열사 자금 동원했다”
SK 측은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우선 과거 상황을 살펴보면, 1991년 당시 최 선대회장은 그룹을 미래를 먹여살릴 포트폴리오를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태평양그룹은 경영난을 겪고 있어 증권사 매각에 나섰고, SK는 태평양증권의 인수 제의를 받았다.

증권사 인수를 결심했지만, 걸림돌이 있었다. SK는 금융기관 여신관리규정상 ‘대기업집단의 비주력업체 투자제한’ 조항으로 증권사 인수에 나설 수 없었다. 이에 최 선대회장 개인이 주체로 나서 태평양증권을 인수해야 했다.

또 다른 문제는 인수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인수자금은 약 571억원. 최 선대회장 개인 재산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려웠다. 이에 ㈜선경과 선경건설이 각각 100억원가량, 선경합섬(인더스트리)·유공해운·유공가스·워커힐·SKC 등이 수십억원을 분담했다. SK 계열사들이 마련한 자금은 사채시장을 거쳐 타인 명의 수표와 현금으로 만드는 과정을 수차례 거친 후 최 선대회장 명의 계좌에 입금됐다.

SK 관계자는 “당시 이 같은 부외자금이 법적으로 문제가 없던 것은 아니었고, 이후 분식회계로 인해 큰 문제가 됐지만 당시에는 회사 경영을 위해 불가피한 일로 판단했다”며 “각 계열사에서 자체 자금으로 사채시장에 돌려 다른 명의의 수표나 현금으로 전달받아 써서 현재는 정확한 상황 파악이 어렵다”고 설명했다. 

손길승 SK그룹 전 회장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도 나온다. 손 전 회장은 최 선대회장이 가까이 둔 인물이다. 1978년부터 1998년까지 약 20년간 경영기획실장을 맡으며 유공·태평양증권·한국이동통신 인수 등 실무를 맡았다. 최 선대회장이 작고한 1998년부터 2004년까지 SK그룹 회장도 역임했다.

한 매체 인터뷰에서 손 전 회장은 “제가 직접 10만원권 수표 1만장을 만들어서 태평양증권 서성환 회장님께 전달했고 그 자리에서 일일이 세어보기까지 했다”며 “이런 자금은 근거를 남기면 화가 될 게 뻔한데 누가 근거를 남기겠나”라고 반문했다. 이어 “태평양증권 인수 자금이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조성됐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노태우 비자금은 유입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SK서린빌딩 전경(왼쪽)과 아트센터나비. [사진 SK, 연합뉴스]

엇갈리는 주장…검찰 재수사 여부에 촉각
노 관장 측의 주장도 시기상 오류가 있다. 노 관장 측이 증거로 제시한 선경건설 명의의 300억원 규모 약속어음(50억원으로 6장) 발행 날짜는 1992년 12월이다. SK의 태평양증권 인수 시기는 1991년 12월로, ‘노태우 자금’이 태평양증권 인수에 쓰였다고 보기 어렵다.

SK 측은 “과거 수사 결과를 부정하고 ‘약속어음을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못한 것’이라는 자의적 추측과 신빙성 없는 ‘쪽지’ 하나로 비자금 받은 정경유착 기업 낙인을 찍은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 또한 지난 6월 3일 ‘구성원에게 드리는 글’을 통해 “우리 그룹의 성장은 비정상적인 자금 지원이나 특혜로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수많은 구성원의 패기와 지성, 노력과 헌신으로 쌓아올린 것”이라고도 강조했다.

앞서 재판부는 지난 5월 30일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최 회장에게 재산분할로 1조3808억원과 20억원의 위자료를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SK의 성장에 노 전 대통령의 영향력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최 선대회장의 태평양증권 인수자금이 계열사 비자금이라는 최 회장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 회장 측이 계열사별 조달 내역, 수표 발행 내역 등 객관적인 자료를 제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다.

재판부는 “메모의 전반적인 기재 내용은 신빙성이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300억원의 금전적 지원 자체를 불법원인급여라고 볼 수는 없다”며 “1991년경에도 형사상 어떤 범죄 구성요건에 해당하지 않았으므로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고 판시했다.

추후 검찰은 ‘선경 300억원’ 메모에 관한 고발 내용을 검토한 뒤 수사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은 지난 9월 19일 고발장을 접수해 범죄수익환수부(유민종 부장검사)에 배당했다. 검찰은 고발 내용을 검토한 뒤 직접 수사하거나 경찰에 이송할지 아니면 각하할지 등을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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