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락가락 이주 대책에 “부동산 시장 불안·서민 주거 복지 퇴행“
[1기 신도시 재건축 과제]②
3만6000가구 이동 눈 앞, 이사할 집 확보 비상
인근 지역 전월세 가격 상승 효과, 10년 간 이어질 것
[이코노미스트 이병희 기자] 정부가 ‘1기 신도시’ 정비 선도지구를 공개한 가운데 재건축 사업을 계획대로 진행해 제대로 된 효과를 낼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선도지구로 지정된 해당 아파트 단지 주민들을 위한 이주 대책이 미흡하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1기 신도시 재건축 사업이란 1990년대 초반 분당·일산·산본·평촌·중동 지역에 들어선 신도시를 재정비해 주택 공급을 늘리고 주거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을 말한다. 정부는 11월 27일 분당 샛별·양지마을 등 수도권의 노후 아파트 13곳, 3만5987가구를 ‘1기 신도시 정비사업 선도지구’로 선정했다. 이는 1기 신도시 전체 가구 약 39만2000가구의 9.2% 수준이다.
선도지구로 선정된 구역은 노후 계획도시 정비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노후계획도시특별법)에 따라 즉시 특별정비계획 수립에 착수해 2025년에는 특별정비구역으로 지정된다. 정부는 2027년 착공, 2030년 입주를 목표로 재건축 사업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최소 8~10년 넘게 걸리는 재건축 과정을 압축해 6년 안에 마무리 짓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현재 선도지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이주 문제가 대표적이다. 재건축 사업으로 1기 신도시 전체 인구의 약 9%가 한꺼번에 인근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이를 소화할 만한 주택이 부족한 실정이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2027년 약 3만6000가구 철거를 시작으로 10년 동안 해마다 2만~3만 가구씩 이주(移住) 수요가 생기는데, 이에 대한 뾰족한 대책이 나오지 않고 있다.
문제는 부동산 시장에서 이주 수요를 받아내지 못할 경우 해당 지역 전월세 가격 상승을 부추길 수 있다는 것이다. 보통 주택정책의 목적은 ▲부동산시장 안정 ▲서민 주거 복지 향상 ▲주거수준 개선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많다. 그런데 이주 대책 없는 재건축은 대규모 이주에 따른 주택 부족 현상을 부르고, 이는 임대료 상승과 매매가격 상승으로 연결된다. 세입자의 경우 보증금을 감당하지 못해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 이는 주택 공급 확대를 통해 주거 복지 확대와 주택 시장 안정을 노리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당초 정부는 재건축을 진행하는 신도시마다 1곳 이상 공공 임대주택을 지어 이를 이주단지로 활용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분당을 중심으로 임대주택형 이주 단지 조성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이 계획을 사실상 철회하고 다시 이주 계획을 수립하기로 했다. 지난 6월에는 1기 신도시 주민들을 대상으로 이주 계획을 파악하기 위한 설문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후 영구임대아파트를 재건축해 이주 공간을 확보하는 방안으로 방향을 틀었다. 영구임대주택은 용적률이 낮게 설정돼 이를 완화하면 신규 주택 공급에 유리하고, 소유권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있어 사업에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토부는 “영구임대 아파트는 도심에 위치해 입지가 우수하고 밀도가 낮아 임대와 분양 등 신규 주택 공급에 유리하다”며 “(영구임대를 재건축한다면)1기 신도시 재건축 사업을 단순히 소유주를 위한 재건축 사업이 아니라 도시 재건축 컨셉으로 바꿔볼 수 있을 것”이라고 8월 발표했다.
이밖에 신규 유휴부지 개발을 통해 공공·민간 분양, 임대주택 등 다양한 유형으로 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주민들이 해당 주택에서 살다가 재건축된 집으로 입주하면, 머물렀던 집은 리모델링해 다시 분양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도 곧 한계에 부닥쳤다. 영구임대아파트를 재건축해도 이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이주시켜야 하는데 해결 방안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임대 기간 50년 이상 혹은 영구적인 공공임대주택 유형인 영구임대아파트의 경우 보증금이 저렴해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등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들이 영구임대아파트를 벗어나 다른 집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영구임대주택 재건축은 여러 방안 중 하나일 뿐인데 이 방법으로만 이주 수요를 해결하려고 하면 현실성 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대량의 이주 수요가 발생할 것이 명확하다고 해서 공공임대로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접근은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이주대책 마련 포기한 정부…“인근 지역 아파트 공급 확대”
정부는 결국 이주민 전용 단지나 주택을 공급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대신 인근 지역에 아파트 공급을 늘려 이주 수요를 자연스럽게 흡수하겠다는 것이다.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26일 “(1기 신도시 재건축은) 규모가 방대해 이주민을 위한 전용 단지를 공급하려 했지만, 사업 진행 상황에 따라 이주 단지에서 장기 공실이 발생할 수 있고 비효율적이란 지적이 많았다”며 “전용 단지뿐만 아니라 이주민 전용 주택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도심 개발 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이주대책까지 마련하는 마스터플랜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대규모 개발을 통한 주택공급이 필요한 일이지만, 세입자 등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거주 안정과 주거 복지 측면에서 여러 가지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선진국은 도심 재개발을 진행할 때 주민들의 이주 단지를 미리 조성하거나 신도시를 만들어 빈집을 확보한다”며 “이런 대책 없이 대규모 개발과 이주가 진행되면 최대 피해자는 집 없는 서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고 원장은 “해외에서는 정부가 바뀌어도 중장기 로드맵을 통해 공급 정책을 지속하고 복지를 유지하는데 이런 부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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