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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자 하는 이들과, 팔고자 하는 이들 [P기자의 길 위에서]

“설 명절이 대목이라는 말, 이제 옛말”
경기 악화에 얼어붙은 청량리전통시장
수많은 인파에도, 상인들 고충 이어져

산업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더 좋아합니다. 산업을 이끄는 주체는 단연코 사람입니다. 산업 현장을 취재하지만, 가끔은 사람 사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겠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 지금 전해드리겠습니다. <편집자 주>
청량리 시장에서 만난 한 청년이 얼어붙은 동태를 깬 뒤 손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이코노미스트 박세진 기자] ‘쾅·쾅·쾅’. 한 사내가 거대한 포대 자루를 바닥에 내리꽂는다. 북적이던 전통시장의 입구는 순식간에 압도된다. 포대 자루가 내는 굉음에 시장 방문객들은 하나, 둘 뒤를 돌아본다.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행위를 네댓 번 반복한다. 이윽고 연식이 오래돼 보이는 칼로 포대 자루를 북 북 긁어낸다. 그러자, 꽁꽁 얼어있던 동태들이 무수히 쏟아진다.

묵묵히 동태를 깨부수는 사내 주위로 상인들의 목소리도 연이어 울려 퍼진다. 이 목소리들은 미처 채워지지 않은 재래시장의 빈 공간을 메운다. “5000원”, “4000원” 저마다의 판매 가격을 외치는 소리부터, “엄마, 이거 한번 맛만 보고가 신선해” 등의 친절한 호객 행위도 뒤따른다. 엎치락뒤치락 귓전을 울리는 상인들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담겨있었다. 

사고자 하는 이들과, 팔고자 하는 이들이 모인 이곳은 ‘청량리전통시장’이다. 22일 방문한 청량리전통시장은 설 명절을 코앞에 둔 상인과 손님의 줄다리기가 한창이었다. 한눈에 봐도 북적이는 재래시장은 민족 대명절 ‘설날’이 다가왔음을 몸소 보여줬다. 다만, 상인들의 속사정은 달랐다. 재래시장을 찾은 손님들이 시장 길거리를 가득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은 울상이었다.

각종 해산물이 올려진 매대 앞, 제수용 자숙 문어 가격이 적힌 박스가 걸려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사람이 많아도, 지갑을 안 연다”

이날 기자가 가장 먼저 만난 상인은 강형근(가명)씨다. 그는 청량리전통시장에서 수산물을 판다. 매대에는 굴과 새우, 고동과 함께 제수용 자숙 문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신선했다. 노련한 손님들은 이미 이를 알아챘다. 매대 앞에는 3명의 손님이 기웃거리며 필요한 식재료를 구매하고 있었다. 이들 무리에 섞여 함께 구경하던 기자에게 주부 민인숙씨는 “이 굴 좀 봐 신선하지 않아”라며 웃어 보이기도 했다.

결국 민 씨의 장바구니에는 ‘신선한 굴’이 담긴 검은 봉지가 자리 잡았다. 흡족한 미소를 짓던 민 씨에게 전통시장을 찾은 이유를 물었다. 그는 “설 명절도 다가오고 이 분위기를 직접 느끼기 위해 시장을 찾았다”라며 “여기 둘러봐라. 사람들이 얼마나 많나. 이 사람들도 나처럼 꼭 물건을 사기 위해 방문했다기보다, 산책도 하며 싼 식재료가 있으면 구매하려고 방문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 씨가 떠나고 곁에서 매대를 책임지던 강 씨를 바라봤다.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손님 앞에서 애써 숨겨온 표정이다. 분명 시장 가득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이 어두웠던 이유는 단 하나다.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수년간 이곳에서 명절을 보내온 그지만,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마다 경기가 어려워진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고 전했다.

강 씨는 “2023년 설명절을 보내고, 새로운 2024년 설명절을 맞이했을 때 당시 수입은 반토막 났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며 “당장 보기에는 사람이 북적여서 장사가 잘 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매년 새해를 맞을 때마다 방문객이 줄고, 경기가 악화되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방문객이 줄었음을 느낀다는 강 씨의 주장은, 통계에서도 잘 나타난다. 소상공인진흥공단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9년 하루 평균 전통시장 방문객은 5413명으로 집계됐다. 이후 2020년에는 4723명으로 하락하더니, 2021년에는 4600명으로 더 추락했다. 2022년에는 일평균 4536명이, 2023년에는 3994명이 시장을 찾았다. 매년 꾸준히 하락세를 보인 셈이다. 

체감 경기도 얼어붙었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최근 발표한 ‘2024년 12월 소상공인 경기동향(BSI)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전국 전통시장 체감 BSI는 11월(63.2)보다 13.5p 감소한 49.7로 집계됐다. BSI지수는 100을 기준으로 높으면 낙관적, 낮으면 비관적임을 의미한다. 

가지런히 정리된 과일 박스 뒤로 한 행인이 걸어가고 있다. [사진 박세진 기자]
텅텅 빈 양손, 모두가 어렵다

청과물을 판매하는 상가 역시 상황은 같았다. 파란색 보자기로 포장된 과일 박스를 옮기던 박수혁(가명)씨는 기자에게 “안 바쁜데, 바쁜 척하는 것”이라며 자조 섞인 농담을 건넸다. 수레에 차곡차곡 박스를 쌓던 중 그가 처음으로 뱉은 말이다. 이윽고 그는 과거에는 과일 박스가 온 거리에 가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기자 앞에 놓인 과일 박스는 15개가 전부였다.

박 씨는 “전통시장뿐만 아니라, 소상공인 모두 장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것”이라며 “명절이 다가와 돌아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사람들이 물건을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 “전에는 사람들이 양손 가득 장을 봤다. 지금은 손이 텅텅 비어있지 않느냐”며 “전통시장에서 돈을 쓰는 사람들은 결국 서민이다. 지금 당장 서민 경기가 어려우니 돈을 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재래김을 판매하는 최현송(가명)씨 역시 같은 말을 전했다. 전통시장의 불황을 보기 위해선 행인들의 ‘손’을 유심히 보라는 것. 과거에는 양손 가득 장바구니가 넘칠 정도로 물건을 사갔다면,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의 물건을 사더라도 많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최 씨는 “사람은 많다. 근데 이 사람들이 소비를 안 한다”라며 “이제 뭘 사더라도 고민을 엄청 한다. 전통시장에서 설 대목이라는 말은 옛말이 된 지 오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 전통시장을 방문한 이들이 장바구니를 거의 안 들고 다닌다”라며 “장바구니를 꽉 채워 가던 전과는 다르다. 3개 구매할 것을 2개 구매하고, 2개 구매할 것을 1개 구매한다”고 말했다.

길게 펼쳐진 전통시장의 시작과 끝을 걷는 동안, 무수히 많은 손을 마주했다. 굳은살로 뒤덮인 동태를 깨던 손, 축축한 장갑을 낀 채 생선을 다듬던 손, 과일 박스를 옮기던 주름진 손, 뜨거운 연탄불 앞에서 능숙히 김을 굽던 손 등이다. 여러 손과의 대화를 끝으로, 방문객들의 손도 살펴봤다. 그제야 텅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풍성한 설 명절’이라는 말이 문득 낯설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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