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칼럼
만화 ‘검정고무신’은 왜 불공정계약의 대명사가 됐나[백세희의 컬처&로(LAW)]
- 출판사-작가 간 장기 분쟁...결국 고인이 된 이우영 작가
항소심서 유족에 배상 판결났지만...해피엔딩 아닌 이유

‘검정고무신’은 1992년부터 2006년까지 만화 잡지 [소년 챔프]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 작가가 군 복무 중이던 1992년 무렵에는 동생인 이우진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만화는 단행본으로 45권이나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서울에서 살아가는 어린이 기영과 청소년 기철,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코믹하면서도 정감있게 묘사해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애틋한 만화가 어쩌다가 창작자에게 좌절과 고통을 주게 된 것일까. 원인은 잘못된 계약에 있다. 작가의 신뢰는 쉽게 배반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되돌리는 길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
‘비극의 시작’이 된 출판사의 제안
2007년 H출판사 측(이하 ‘출판사’)에서 이 작가 측(이하 ‘이 작가’)에 소위 ‘사업권’을 설정하는 계약의 체결을 제안했다. 사업권설정계약은 몇 차례 정리를 거쳐 2008년 6월 다시 체결됐다. 이 계약이 바로 작가를 옭아매는 핵심이다.
위 사업권설정계약은 ‘검정고무신’ 및 그에 파생된 모든 2차적 사업권을 출판사가 갖고 수익을 분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업을 하려면 캐릭터에 대한 지분이 필요하다고 작가를 설득해 출판사 대표가 9개 캐릭터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마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이른바 ‘양도각서’도 작성했다. ‘검정고무신’ 작품 활동과 관련된 업무는 출판사를 통해 진행해야 하고, 작가의 개인적인 계약에 대해서는 계약금 3배 상당의 위약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판사에 저작권 침해로 인한 형사고소 및 합의 권한을 위임하는 내용이다.
이를 바탕으로 출판사는 2015년 TV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시즌4’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 외에도 출판사는 캐릭터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만화를 계속 출판했고, 이 작가 역시 출판사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몇몇 웹사이트에 만화를 공급하고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출판사는 이 작가가 만화를 계속 만들어낸 것을 문제 삼고 2019년 11월 이 작가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출판사의 사업권에 따라 만화 및 그 2차적저작물의 제작·사용·배포는 오로지 출판사만이 할 수 있는데, 이 작가가 이를 어기고 자신이 직접 만화를 제작·배포한 것이 계약 위반이라는 것이다. 거액의 위약금을 배상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작가는 계약은 모두 무효라고 항변했다. 저작권 법리에 대한 이해와 거래 경험이 부족한 만화가로서는 ‘검정고무신’을 이용해 수익을 나누자는 출판사의 진의가 사실은 모든 권리를 다 내어놓으라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경솔하게 계약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위 계약들은 예술의 자유를 현저하게 제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무효라 주장했다.
피고가 되어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 작가에게 재판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2023년 3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재판은 남겨진 가족들이 이어받았다. 같은 해 11월 약 4년의 재판 끝에 드디어 1심 판결이 나왔다.
1심 법원은 작가를 옭아매는 이 사건 계약들은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사업화설정계약 및 양도각서가 현저히 불공평해서 처음부터 무효라고 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원은 계약은 모두 유효하다고 보았다. 출판사의 의도대로 쓰인 문구는 그대로 효력을 인정받았다. 모든 사업권은 출판사가 갖는 것이고, 작가가 이를 어겨 얻은 이익은 모두 위약금 산정의 기초 금액이 된다. 민법 제103조와 제104조를 위반하여 무효라는 작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약은 효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법원은 출판사의 일방적인 수익분배 조건 설정, 진행 및 분배 과정, 작가에 대한 출판사의 형사고소 사실을 기초로 당사자의 신뢰관계는 파괴됐다고 보았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급부가 이루어지는 ‘계속적 계약’은 기초가 되는 신뢰관계가 파괴되면 일방 당사자가 계약을 해지함으로써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지로 계약은 모두 해지된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작가를 옭아매던 계약은 2019년 10월 이전까지는 유효한 것이고, 판결을 선고하는 시점에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 해지 이후의 출판사의 ‘검정고무신’ 이용은 이 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판결은 계약들의 “효력이 존재하지 아니함을 확인”하고, 출판사는 캐릭터를 표시한 “창작물 및 이에 대한 포장지, 포장용기, 선전광고물을 생산, 판매, 반포, 공중송신, 수출, 전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
잘못된 언론 보도 : 불공정계약으로 무효?
다만 위 해지 시점 이전에는 출판사가 권리를 유효하게 보유하는 것이고, 이 작가가 이를 일부 침해한 점을 인정해 유족들이 출판사에게 손해배상금으로 7500만원 상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25년 8월 28일 항소심 법원은 1심과는 달리 오히려 출판사가 이 작가의 유족에게 4000여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언론은 드디어 불공정한 계약이 무효가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일부 변호사도 인터뷰를 통해 민법 제104조가 적용돼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가 된 것이라 설명했다.
필자도 항소심 판결문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언론 보도, 전문가 인터뷰 및 칼럼을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달랐다. 항소심 법원이 계약을 무효로 돌린 게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항소심이 드디어 ‘검정고무신’ 계약을 불공정계약으로서 무효로 인정한 것이라는 말은 판결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누군가의 잘못된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옮긴 것에 불과했다. 항소심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1심 판단과 동일하다.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인 것이 아니다. 단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시로 인해 장래를 향해 효력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1심과 달리 유족들이 오히려 4000만원을 배상받게 된 것일까? 이는 소송 기술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1심에서 작가는 출판사의 저작권 침해 사실을 주장하면서도 그에 따른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았다. 출판사의 이용은 금지하지만, 돈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은 것이다. 법원은 당사자의 청구를 넘어서는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러니 출판사의 손해액만이 판결 주문에 등장한 것이다.
2심에서 비로소 이 작가의 손해배상 청구가 추가되고 구체적인 금액이 등장한다. 재판부가 계산해보니, 양 당사자의 손해액이 각각 얼마이고 그 채권·채무를 대등액에서 소멸, 즉 상계를 하니 이 작가 측에 4000만원의 채권이 남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서로 잘못한 것을 더하고 빼면 출판사가 돈을 뱉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것
항소심에서 정의가 실현된 줄 알았는데…. 조금은 맥 빠지는 결론이다. 필자도 이게 맞나 싶어 눈을 비벼가며 60쪽에 달하는 항소심 판결문을 훑었다. ‘검정고무신’ 판결은 개인 창작자의 손을 들어주며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지 못했다. 곪을 대로 곪은 계약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해지돼야 비로소 그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었다. 계약의 구속력이란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작가가 쏘아 올린 공은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창작에 관여하지 않은 출판사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하며 선례를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개정하고 불공정 약관에 대한 대대적인 시정조치를 감행했다.
‘검정고무신’이 만든 변화의 시작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판결을 왜곡 없이 냉정하게 분석해 현실을 인식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계속 연구해야만 한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잊지 말자.
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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