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변압기만 웃는게 아니다…AIDC가 다시 매긴 ‘K기술 몸값’
- [AI 데이터센터, 4개 벽을 넘어라]⑤
철도·공장서 쓰던 UC·버스덕트, AI 데이터센터 핵심 인프라로
20년 된 광증폭기·광케이블도 수백억원 수주
철도·풍력발전에 쓰이던 울트라커패시터(UC), 공장에 전기를 공급하던 버스덕트, 통신망에서 사용하던 광증폭기, 자동차·에너지저장장치(ESS)에서 축적한 수냉 기술까지 기존에는 AI와 거리가 멀어 보였던 기술들이 새로운 시장을 만나고 있다.
철도용 UC·공장용 버스덕트…AIDC 덕에 다시 각광
AIDC 열풍에서 가장 먼저 주목받은 것은 단연 전력 인프라다.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 데이터센터가 세계 곳곳에 들어서면서 변압기를 비롯한 전력기기 업체들이 대규모 수주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AI가 불러낸 전력 특수는 변압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른 산업에서 오랫동안 사용하던 기술이 AIDC의 새로운 핵심 설비로 떠오르는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기술이 울트라커패시터(UC)와 슈퍼커패시터(SC)다. UC와 SC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빠르게 방출하는 커패시터의 일종으로, 일반 배터리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전력을 저장하고 내보내는 데 특화돼 있다.
최근에는 이 같은 특성이 AIDC에서 주목받고 있다. 순간적으로 전력 사용량이 치솟는 등의 상황이 발행해도 전력 변동을 완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LS머트리얼즈나 비나텍 등이 AIDC용 커패시터 시장 공략에 적극 나서고 있고 특히 미국 시장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전기차 보조 출력과 풍력발전, 스마트그리드 등에 SC를 공급해 온 비나텍은 올해 미국 블룸에너지와 412억원 규모의 데이터센터용 SC 시스템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LS머트리얼즈도 10월 초 미국 현지 전력 관련 업체와 대규모 UC 공급 계약을 마무리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특히 LS머트리얼즈는 지난 3월 충·방전 수명을 600만회 이상으로 늘린 AIDC용 UC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기존 범용 제품보다 수명이 약 6배 길고 순간적인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력 피크에 대응할 수 있도록 고출력 성능과 방열 기능을 강화한 것이 특징이다.
UC나 SC 기술은 충·방전을 반복해도 성능 저하가 적어 그동안 철도와 풍력발전, 전기차, 산업 설비 등의 보조전원으로 활용돼 왔다. 하지만 AIDC 열풍 속 이 기술들이 새로운 시장에서 수요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버스덕트도 비슷하다. 버스덕트는 구리나 알루미늄 도체를 금속 외함 안에 넣어 대용량 전력을 전달하는 배전설비다. 과거 공장과 대형 건물 등에 주로 사용됐지만 서버의 전력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AIDC 내부에 대규모 전력을 공급하는 핵심 인프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가온전선의 미국 자회사 LSCUS는 지난 5월 미국 빅테크 기업과 5년간 버스덕트를 공급하는 최대 4조원 규모의 장기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생성형 AI 기업 등에 600억원 규모의 공급계약을 따냈고, 지난 8월에는 미국 AI 클라우드 데이터센터에 2000억원 규모의 버스덕트를 공급하는 계약도 맺었다.
오래된 광통신 기술도 AIDC를 만나 새로운 시장을 맞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약해진 광신호를 빛 상태 그대로 증폭해 전송하는 광증폭기다. 여러 데이터센터를 하나의 AI 연산망처럼 연결하는 DCI(데이터센터 간 연결) 수요가 늘면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2000년부터 광증폭기를 상용화해 온 라이콤은 올해 6월 후지쯔에서 분사한 네트워크 장비업체 원피니티(1Finity)와 미국 AIDC용 광증폭기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광케이블도 고밀도화되고 있다. 한정된 공간에서 더 많은 데이터를 전송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대한광통신은 올해 미국 하이퍼스케일 AIDC에 광섬유 864가닥을 한 케이블에 담은 ‘864심 광케이블’을 약 411억원 규모로 수주하기도 했다.
美 수요 커지며 달라지는 진출 방식
AIDC 열풍에 맞춰 기존 기술의 적용처를 바꾸거나 아예 사업 방향을 전환하는 기업들도 늘고 있다. 특히 막대한 열이 발생하는 AIDC에서는 냉각 효율이 중요해지면서 자동차·ESS·발전소 등에서 축적된 열관리 기술이 주목받는다.
자동차 부품회사로 출발한 한중엔시에스는 현재 ESS용 수냉식 냉각시스템을 주력으로 사업 방향을 전환했다. 올해 상반기 내연기관 자동차 부품 사업을 종료했고 ESS 매출 비중은 96.87%까지 높아졌다. 회사는 ESS에서 쌓은 수냉 기술을 기반으로 데이터센터용 UPS(무정전전원장치)와 BPS(백업전력시스템) 냉각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발전소와 석유화학 플랜트에서 쌓은 기술을 AIDC로 확장하는 움직임도 있다. 산업용 열교환기 업체 디티에스(DTS)는 기존 열교환 기술을 데이터센터에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한편, 데이터센터 폐열로 전기를 생산하는 ORC(유기랭킨사이클) 사업도 신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처럼 AIDC 열풍으로 국내 기업들이 오랫동안 축적한 기술도 새로운 수요처를 찾고 있다. 전력 업계 관계자는 “한국 기업들이 전력기기와 커패시터, 케이블 등에서 기술력을 쌓아온 만큼 해외 업체들이 다른 국내 기업까지 소개해달라고 문의하는 경우도 있다”며 “AI를 위해 새로 개발한 기술뿐 아니라 기존 산업에서 검증된 기술이 미국 AIDC 시장에서 다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진출 방식도 달라지고 있다. 개별 부품을 따로 공급하는 데서 나아가 블룸에너지 같은 현지 전력·인프라 기업을 중심으로 여러 국내 기업이 하나의 공급망에 들어가는 형태다. 실제 블룸에너지와 연결된 AIDC 공급망에는 비나텍의 SC 시스템과 LS일렉트릭의 배전 솔루션 등이 포함돼 있다.
이 관계자는 “철도·공장·발전설비 등에 쓰이던 기술이 이제 AIDC의 전력 안정성을 뒷받침하고 있다”며 “AIDC 투자가 늘수록 국내 산업용 부품·장비 기업들이 글로벌 AI 공급망에 진입할 기회도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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