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중국발 저가 공습과 내수 절벽…벼랑 끝 철강·석화 현주소
- [벼랑 끝 K중후장대]①
여수·포항 산단 덮친 불황의 늪…수출길 막히고 저가 밀어내기에 안방마저 초토화
전기료 폭등·올해 본격화된 탄소 규제 청구서까지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지난 10월 26일 오후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인근 흥국상가. 퇴근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거리는 한산했다. 한때 작업복 차림의 근로자들로 북적이던 골목에는 ‘임대 문의’ 안내문을 붙인 빈 점포들이 줄지어 있었다. 문 닫힌 가게 안에는 먼지 쌓인 집기류만 남아 있었다. 국내 최대 석유화학 산업단지 중 하나인 여수산단의 불황이 주변 상권까지 번진 모습이었다.
한국 제조업의 두 축인 철강과 석유화학 산업이 깊은 불황에 빠졌다. 글로벌 경기 둔화에 중국의 저가 물량 공세까지 겹치면서 기업들은 감산과 설비 폐쇄, 사업 재편에 나서고 있다. 공장 가동이 줄자 일자리가 감소하고 주변 상권까지 위축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이번 위기가 일시적인 경기 침체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에 국내 수요 부진, 탄소 규제와 에너지 비용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기존의 대량 생산 중심 사업 모델이 한계에 부딪혔다. 철강·석유화학 업계에서는 단순한 업황 회복을 기다리기보다 산업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포항·여수 덮친 설비 폐쇄·통폐합
철강 산업의 심장부인 경북 포항의 사정도 여수와 다르지 않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수년째 이어진 수익성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올해 들어 노후 설비를 영구 폐쇄하거나 한계 사업을 도려내는 고강도 구조조정을 상시화하고 있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1제강공장과 1선재공장을 잇따라 폐쇄했으며, 올해도 중국산 저가 공세에 밀려 수익성이 바닥을 친 범용 철강 라인의 추가 감산과 저수익 자산 정리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제철 역시 장기화한 국내 건설 경기 침체로 형강과 철근 수요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포항 2공장 축소 운영에 이어 지난해 6월부터는 무기한 휴업에 들어갔다. 아울러 올해 당진과 인천 공장의 전기로 가동률을 낮추며 비상 감산 체제를 굳힌 모습이다.
석유화학 업계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여수와 대산 산단에서는 나프타분해시설(NCC) 가동 중단과 사업 통폐합이 올해 업계 최대 화두로 떠올랐다. LG화학은 올해 한계에 봉착한 기초유분 설비의 지분 매각과 합작법인(JV) 전환, 하위 공정 스크랩(폐쇄) 등 고강도 포트폴리오 재편을 단행 중이다. 장기 적자 늪에 빠진 롯데케미칼 역시 여수 공장의 일부 기초유분 설비 가동 중단을 이어가며 비핵심 해외 법인 매각과 자산 유동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설비 가동 중단과 감산의 장기화는 곧바로 지역 경제와 고용 시장의 붕괴로 이어졌다. 정기 대보수 공사가 대폭 축소되면서 올해 여수산단 내 플랜트 건설 일자리는 예년 대비 반토막이 났고, 물동량 급감으로 화물노동자들의 수입도 크게 줄었다. 입주 기업들의 영업적자 누적으로 여수시와 포항시의 법인지방소득세 징수액마저 바닥을 치며 지자체 재정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포항에서 자영업을 하고 있는 A씨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인구도 줄고 젊은 사람들도 다 빠져나갔다”며 “야근이 사라지거나 직원들을 다른 곳으로 보낸 공장도 적지 않다. 시내도 많이 한적해졌다”고 말했다.
끝나지 않는 ‘차이나 쇼크’…생존 해법은
올해 들어서도 국내 철강·석화 업계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중국 변수’의 고착화다. 중국이 대규모 증설을 통해 기초 소재 자급률을 100% 이상으로 끌어올린 데다, 자국 내 경기 부진으로 남아도는 물량을 올해도 글로벌 시장에 헐값으로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철강 분야에서는 국산 대비 톤당 10만~20만 원 저렴한 중국산 후판과 열연강판이 편법 우회 수출 물량까지 더해져 국내 유통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여기에 착공 물량 급감 여파로 올해 최악의 보릿고개를 지나고 있는 국내 건설 경기 침체가 겹치며 건자재용 철강 수요가 사실상 증발했다.
석유화학 역시 한때 전체 수출의 50%에 육박하던 대중국 수출 비중이 올해 30% 선마저 위태로운 지경으로 쪼그라들었다.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 스프레드는 올해 내내 손익분기점(톤당 300달러)을 한참 밑도는 100달러대 후반에 갇혀 기업들의 현금 흐름을 말리고 있다.
여기에 연이은 인상으로 고공행진 중인 산업용 전기요금은 기업들의 숨통을 죄고 있다. 여수산단과 포항·당진 제철소 기업들이 감당해야 하는 전력비 부담은 수년전과 비교해 크게 증가했다.
아울러 현금 흐름 악화로 이자 비용조차 감당하기 버거운 상태가 이어지자 신용평가사들은 주요 철강·석화 기업들의 신용등급과 전망을 잇달아 하향 조정하고 있으며, 이는 곧바로 1·2차 중소 협력사들의 유동성 위기로 전이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현재 한국 철강과 석유화학이 마주한 위기를 과거와 같은 ‘경기 순환적 사이클’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향후 2~3년간의 업황 시나리오 역시 가시밭길이 예상된다.
석유화학은 내년부터 2028년 사이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의 ‘COTC’(원유에서 직접 화학제품을 뽑아내는 공정) 설비가 본격 가동에 들어간다. 원가 경쟁력에서 비교가 안 되는 중동발 물량까지 쏟아질 경우 국내 범용 석화 산업은 영구적인 불황에 빠질 수밖에 없다.
철강 역시 중국의 감산 지연과 인도 등 신흥국의 증설로 인해 탄소 저감 기술이 없는 일반 강재의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전망이다.
이상원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석유화학산업 생존전략과 관련해 “다시 성장 궤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범용제품 중심의 포트폴리오를 고부가가치 소재로 완전히 탈바꿈시켜야 한다”먀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이차전지 소재, 바이오플라스틱 등 스페셜티 영역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전부는 연구개발(R&D)와 세제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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