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일반
“버리는 것만으론 생존 못해”…철강·석화가 마주한 '40조의 벽'
- [벼랑 끝 K중후장대]③
‘그린 스틸’과 ‘초격차 소재’에 명운 건 철강·석화
포스코 수소환원제철·현대제철 복합공정 본궤도
[이코노미스트 원태영 기자] 중국발 저가 물량 공세와 글로벌 탄소 규제라는 이중고에 직면한 국내 철강·석유화학 업계가 체질 개선에 사활을 걸고 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이끌었던 ‘범용 제품 대량 생산’ 모델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고부가가치 ‘스페셜티’(특수소재)와 탄소 배출을 줄이는 친환경 기술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린 스틸’로 돌파구 찾는 철강업계
유럽연합(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가 올해 본격 시행되면서 탄소 배출량이 기업의 비용 부담으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철강업계도 저탄소 제철 기술 상용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현대제철은 당진제철소에서 고로(용광로) 쇳물과 철스크랩(고철)을 녹인 전기로 쇳물을 혼합하는 ‘전기로-고로 복합 프로세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하고 탄소저감강판을 양산하고 있다.
약 1600억원을 투입한 이 공정은 기존 고로 제품보다 탄소 배출량을 약 20% 줄이면서도 자동차용 고강도 외판재에 필요한 품질을 유지한다. 전기로 방식의 불순물 제어 문제를 보완해 글로벌 완성차 업체들의 저탄소 공급망 요구에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다.
포스코는 한국형 수소환원제철 기술인 ‘하이렉스’(HyREX) 상용화에 주력하고 있다. 하이렉스는 석탄 대신 수소를 환원제로 사용해 철광석에서 철을 생산하는 기술이다.
수소를 활용하면 기존 석탄 기반 공정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특히 고가의 펠릿(가공 철광석)을 사용하는 일부 해외 공법과 달리 가루 형태의 철광석을 직접 활용할 수 있어 원가 경쟁력도 높다는 설명이다.
포스코는 정부 국책과제 선정을 계기로 포항제철소에 연산 30만톤 규모의 하이렉스 데모 플랜트(실증 설비)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2030년까지 상용화 기술을 검증하고 노후 고로를 단계적으로 대체할 계획이다.
문제는 막대한 전환 비용과 에너지 인프라다. 포스코가 기존 고로를 수소환원제철로 전환하고 관련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약 40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된다. 공급 과잉으로 수익성이 악화한 상황에서 민간 기업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규모다.
전력 확보도 과제다. 기존 공정보다 최대 8배에 달하는 무탄소 전력이 필요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가운데 송배전망 확충 지연과 산업용 전기요금 상승이 상용화의 걸림돌로 꼽힌다.
범용 버리고 ‘스페셜티·순환경제’로
중국의 공급 확대로 범용 기초유분 시장에서 경쟁력이 약해진 석유화학 업계는 반도체·모빌리티용 고부가 소재와 폐플라스틱 재활용, 바이오 화학 분야에 연구개발(R&D)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LG화학은 수익성이 악화한 기초유분 사업 비중을 줄이는 대신 배터리 소재와 이차전지 도전재용 탄소나노튜브(CNT), 자동차용 고기능성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식물성 원료 기반 바이오 소재 등을 강화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자회사 등을 통해 반도체 세정용 초고순도 과산화수소와 이차전지 분리막용 소재, 고부가 합성수지 등 스페셜티 제품군을 확대하고 있다. 금호석유화학도 전기차 타이어의 마모를 줄이고 연비를 높이는 고기능성 합성고무(SSBR)를 앞세워 사업 구조를 바꾸고 있다.
친환경 순환경제로의 전환도 핵심 전략이다. 주요 석유화학 기업들은 폐플라스틱을 열분해해 석유화학 원료로 재활용하는 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울산·당진·여수 등에서는 열분해유 관련 공장 구축과 실증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만 신사업 투자가 곧바로 수익성 개선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바이오 소재와 폐플라스틱 재활용 제품은 기존 화석연료 기반 제품보다 생산 원가가 1.5~2배가량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 규제가 느슨한 시장에서는 고객사들이 추가 비용 부담에 소극적이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매출에서 범용 제품이 차지하는 비중도 여전히 높다. 스페셜티 사업의 수익을 범용 설비의 적자가 상쇄하는 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형 빅딜과 정부 지원 시급
전문가들은 친환경·스페셜티 중심의 기술 전환이 성과를 내려면 공급 과잉을 해소하는 구조조정이 병행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참고할 사례로는 과거 석유화학·철강 산업의 불황에 대응해 사업 재편을 추진했던 일본이 꼽힌다.
일본은 1980년대 오일쇼크와 1990년대 버블 붕괴, 2000년대 이후 중국의 부상 등 산업 환경이 급변할 때마다 설비 통폐합과 사업 개편을 추진했다. 정부는 산업경쟁력강화법 등 제도적 지원으로 기업들의 사업 재편을 뒷받침했다.
일본 정부는 기업 결합과 사업 재편을 지원하고 설비 폐기 등에 세제 혜택을 제공했다. 미쓰비시화학과 미쓰이화학 등도 노후 에틸렌 생산설비(NCC)의 통합·재편을 추진하며 전자재료 등 고부가 소재 사업을 강화했다. 철강업계에서는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의 합병 등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고 고부가 기술에 집중할 기반을 마련했다.
국내에서도 여수·대산·울산 등 주요 석유화학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NCC 설비를 통폐합하거나 합작법인(JV)으로 묶는 ‘한국형 빅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기업 간 자산 가치 산정을 둘러싼 이견과 공정거래법상 기업결합 심사 부담 등으로 구조조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기업의 자구 노력과 함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친환경 설비와 고부가 소재 개발에 막대한 투자가 필요한 만큼 세제·금융 지원과 사업 재편을 위한 제도 개선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기간산업의 경쟁력을 회복하려면 정부의 산업 정책과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며 “수소환원제철 설비 투자와 친환경·스페셜티 R&D에 국가전략기술 수준의 세액공제 혜택을 부여하고 직접 보조금 지원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업 재편 기업에 대한 공정거래법 특례와 금융·세제 패키지 지원 등을 통해 정부가 기간산업 재건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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